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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송빈빈(宋彬彬) 배후의 인물들....

by 중은우시 2024. 9. 20.

글: 원릉(袁凌)

송빈빈, 그녀는 문화대혁명기간동안 송요무(宋要武)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의 원로 송임궁(宋任窮)의 딸이다. 문혁기간 저명한 홍위병으로 북경의 "홍팔월(紅八月)"기간동안 모택동에게 홍수장(紅袖章)을 채워주는 사진때문에 전국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문혁기간 북경사범대학부속여자중학교의 홍위병 지도자였으며, 2024년 9월 16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송빈빈 배후의 사람을 알아야, 비로소 문혁배경하의 송빈빈의 죄와 벌을 알 수 있다.

1966년 8월 18일, 송빈빈은 천안문 성루에 올라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의 팔에 수장을 채워주었고, 모택동이 "빈빈은 문질빈빈(文質彬彬)의 그 빈이냐"고 묻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무가 필요하다(要武嘛)"고 말하자 그녀는 그후 이름을 "송요무"로 바꾸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녀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후 "송요무"의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게 될 줄은. 얼마전 그녀가 오랫동안의 침묵을 깨고 공중에 사죄했을 때도 다시 한번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송빈빈은 매체에 이렇게 말했다: 수십년동안 그녀에게는 두 명이 있었다. 하나는 송빈빈이고 하나는 송요무이다. 전자는 진실한 그녀이고, 후자는 그녀가 등에 짊어진 '홍위병폭력'의 부호이다. 송빈빈을 송요무로 바꾼 것은 그녀 본인이 그때 모택동에게 수장을 달아준 거동 및 이전에 교장 변중운(卞仲耘)의 죽음에 어느 정도 역할을 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온 요소도 적지 않다. 홍위병의 부호가 된 송빈빈의 배후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서 있다.

그들은 각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보통의 '노홍위병' 송빈빈을 한걸음 한걸음 '송요무'의 위치로 내몰았다. 이들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 문혁배경하의 송빈빈의 죄와 벌을 진정으로 논할 수 없다.

  1. 팽소몽(彭小蒙)

문혁기간 팽소몽은 '송요무'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중학홍위병이었다(중국의 중학은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임). 다만 그녀가 유명해진 것은 수장을 달아주었다는 기연때문이 아니라, 선봉에 서서 싸워얻은 것이다.

팽소몽은 북경대학부속중학의 학생이었다. 당시 선생님의 회고에 따르면, 1966년 7월 26일, 그녀는 중앙문혁이 비를 맞으면서 학교의 1만명 학생과 선생을 접견할 때, 앞장서서 동두피대(銅頭皮帶, 구리고리가 있는 가죽허리띠)를 들고 공작조 조장 장승선(張承先)을 때렸고, 빗물과 핏물이 섞여 흘러 그 자리의 모든 선생과 학생, 그리고 현장에 있던 중앙지도자들까지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강청(江靑)의 칭찬과 열렬한 포옹을 받는다. 이때부터 홍위병은 폭력으로 구타하는 무타(武打)의 기풍이 성행하게 된다. 5일후, 모택동은 청화대학 홍위병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팽소몽이 장선승을 구타한 대회에서의 연과 그녀가 이끄는 "홍기전투소조"를 칭찬한다. 강청은 더더욱 팽소몽과 그녀의 '전우들'을 '소태양(小太陽)'이라고 치켜세웠다.

그후 팽소몽은 사람을 구타하는 일에는 모두 직접 나섰고, 아주 두드러졌다. 왕우금(王友琴)의 <문혁수난자>에 따르면, 북대부중 초중1년여학생 만홍(萬紅)은 부친이 우파여서 남홍위병에게 구타를 당해 여자화장실로 숨어 피하려고 했다. 당시 팽소몽이 여자화장실 안에 있었다. 만홍은 팽소몽에게 사정했다: "모주석을 너는 만나보았고, 너는 정책을 알지 않느냐. 그들에게 나를 때리지 말라고 해달라." 그러나 팽소몽은 그녀를 여자화장실에서 끌고 나왔다. 그리고 만홍을 등받이없는 의자에 서서 비판을 받도록 하고, 동두피대로 때린다. 그리고 한 동료학생은 의자를 빼버렸고, 그녀는 시멘트바닥에 고꾸라져 얼굴과 코가 멍이 들고 부풀어올랐다.

왕우금은 또한 이런 내용도 기록했다. 팽소몽은 북경외국어학교, 제12여중, 등시구중학등 학교로 가서 연합활동을 고무했다.

8월 18일의 천안문성루접견때, 팽소몽은 대단했다. 그녀는 유일하게 북경홍위병을 대표하여 발언한 사람이고, 전국에 라이브로 방송된다. 그녀와 비교하자면, 송빈빈이 모택동에게 수장을 달아준 것은 우연한 일이다. 다만 더욱 중요한 것은 송빈빈이 천안문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 팽소몽때문이라는 것이다.

공단(孔丹)의 회고록 <난득본색임천연(難得本色任天然)>에서 팽소몽의 회고를 인용하여 이렇게 말했다: 당시 홍위병이 천안문에 올라가는 것은 중앙선전부 부부장 옹문도(雍文濤)가 안배한 것인데, 옹문도는 팽소몽에게 사람을 추천해달라고 말한다. 팽소몽은 사대여자부속중학, 제4중, 북대부중과 청화부중등 학교에서 학교마다 20명을 추천한다. 이 회고에 따르면, 당시 천안문성루 아래에는 이미 수십만의 홍위병이 모여 있었고, 누가 천안문에 올라갈지에 대한 결정권이 팽소몽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핑소몽이 사대부속여중을 추천하지 않았다면, 송빈빈은 천안문성루에 올라갈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것이고, 하물며 모택동에게 홍위병수장을 달아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마찬가지로 청안문성루 아래에는 팔중(八中)의 진소로(陳小魯, 진의의 아들)등이 있었지만, 성루에 올라길 기회는 얻지 못했다.

팽소몽이 고른 것을 보면, 그녀가 운동을 비교적 잘 한다고 생각하는 학교를 위주로 했다. 그러나 일정한 기준은 없었다. 예를 들어 4중의 홍위병책임자 진효(秦曉), 공단은 모두 사람을 때리는 것은 주장하지 않는 '정책파'였다. 사대여부중에서 격렬하게 공작조에 반대하는 '주의병(主義兵)'들도 성루에 올라갈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노홍위병내부에 무슨 명확한 '보(保)공작조'와 '반(反)공작조'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송빈빈은 모택동에게 수장을 채워준 후, 그녀와 팽소몽은 그날 가장 핫이슈가 된 두 명의 홍위병이 된다. 다만 '송요무'의 개념적인 의미가 점점 팽소몽을 눌러버리게 된다.

왕우금의 기록에 따르면, 문혁이후, 팽소몽은 신문에 글을 발표하여, 그녀 자신과 부모가 분혁때 박해를 받았다고 적었다. 그러나 그녀가 홍위병으로 잘나가던 시기에 대하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팽소몽의 부친은 전국적십자회의 지도자였다. 고위간부자제에 속했다. 다만 송빈빈의 부친 송임궁처럼 상장(上將)이나 정치국위원같은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이것도 아마 그녀가 홍위병의 대표자로 낙인찍는데 부적합한 원인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녀가 송빈빈을 천안문성루로 올려보내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2. 유진(劉進)

유진은 송빈빈을 천안문성루로 올라가도록 만든 두번째 핵심인물이다.

유진은 송빈빈과 고등학교3학년 같은반친구이다. 1966년 6월 2일, 그녀는 방송에서 섭원재(聶元梓)의 대자보를 듣고, 앞장서서 사대여부중에서 최초로 문혁을 요구하는 대자보를 쓴다. 그리고 송빈빈등으로부터 서명을 받는다. 공작조가 학교에 진입한 후, 유진은 공작조가 잉명한 사생대표회의 주석이 되고, 송빈빈등 4명은 부주석이 된다.

공작조가 철수한 후, 이어서 변중운사망사건이 발생한다. 이번 사건에서, 유진은 송빈빈과 마찬가지로, 저학년 학생들의 구타행위를 제지하지 않았다. 사후에 그녀들은 변중운을 병원으로 이송하고, 그 자리에 있던 이송문(李松文) 선생등과 함께, 메모지에 이름을 남긴다. 이 메모지에는 유진이 끝에서 두번째로 쓰여 있고, 송빈빈은 맨 끝에 쓰여 있다. 그날 저녁, 유진과 송빈빈은 함께 북경시위서기 오덕(吳德)에게 상황을 보고한다. 오덕은 "죽으면 죽는거지"라고 말한다. 다음 날 유진은 학교방송에서 경과와 오덕의 말을 보고한다. 유진은 말했다: "일부 동창들은 '죽으면 죽는거지'라는 한 마디만 기억했다."

그후 유진과 송빈빈등은 함께 사대여부중 "문화대혁명주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임이 되고, 송빈빈등은 부주임이 된다. 이 조직은 공작조와 가까운 학생들과 공작조에 반대하는 학생들과 연락하며, 계속하여 학교의 '문혁'을 이끌었다. 이후 송빈빈이 모택동에게 수장을 채워준 일로 학교내에 분쟁이 일어난다. 그리하여 유진과 송빈빈은 함께 주비위원회에서 나온다.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과정을 살펴보면, 유진과 송빈빈은 항상 함께 행동했고, 또한 항상 유빈이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8.18" 모택동이 홍위병을 접견하는 당일, 유진은 영대(領隊)를 맡았다. 홍위병이 천안문성루에 올라 지령을 받을 때, 부친을 따라 하남에서 북경으로 왔으며, 항상 나서지 않았던 유진은 송빈빈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는 학생회에서 문체부장을 맡아 아는 사람이 많으니 네가 각 반에서 40명을 뽑아서 가라" 송빈빈은 이렇게 하여 천안문에 오르게 되었고, 유진은 성루아래에 남아 있게 된다.

사후에 보면, 유진의 이 결정은 두 사람을 문혁에서의 역할이 중대하게 나눠지게 만든다. 송빈빈은 이로 인하여 송요무가 되었고, 유진은 계속하여 유진으로 보통의 간부자제, 노홍위병으로 남는다.

송빈빈이 성루에 올라갔지만, 그녀가 모택동에게 수장을 채워줄 수 있었던 것은 자연히 그녀 부친의 신분이 작용했다. 송빈빈 본인은 이렇게 회고한다. 뒤에 서 있던 공군대원(空軍大院)에 사는 남학생이 그녀에게 모주석에게 수장을 달아주라고 부추겼다. 그리고 곁에 서 있던 공안부장 사부치(謝富治)는 송임궁과 함께 근무한 경험이 있다(이력을 살펴보니, 두 사람은 모두 상장계급을 받았고, 해방전쟁시기 사부치는 진기노예야전군 병단정위를 송임궁은 제2종대 정위를 맡았었다), 그리하여 송빈빈을 알아보았다 그리하여 송빈빈이 수장을 달아주는 것을 허락한 것이다.

송빈빈 본인은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은 그녀에게 부친이 누구인지 묻지 않았고, 그녀를 알지도 못했다. 그저 그녀에게 이름을 물어봤을 뿐이다. "요무마'라는 말도 별다른 의미없이 나온 것인데, 이 세 글자의 분량은 보통이 아니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같이, 홍팔월의 '무투'폭력붐을 불러오게 된다. 문약한 송빈빈도 이때부터 '송요무'로 변신하게 된다.

송빈빈의 고관자제신분은 그녀로 하여금 모택동에게 수장을 달아주게 할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보공작조'의 입장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수장을 바친 행위는 학교내에서 논쟁을 불러왔다. 공작조에 반대하는 '주의병'은 그녀에게 수장을 바칠 자격이 없다고 공격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운동의 발전방향에 불리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면, '주의병'은 지도자의 속마음을 잘 캐치했다고 할 수 있다. '홍얼다이' 송빈빈이 수장을 바칠 때 모택동은 이미 그녀의 부친대의 '주자파'들도 공격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것이 아마도 송빈빈에게 부친의 이름은 묻지 않은 원인이고, 직접 그녀의 이름을 '개명'시켜준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날 성루에 올라간 학생은 모두 400여명이다. 만일 유진이 송빈빈은 성루에 올라가게 하고, 자신은 아래에 남지 않았더라면 이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2007년, 실험중학으로 이름을 고친 사대여부중에서 걸출한 교우를 선정했다. 처음에 선발평가에 참가하기로 한 것은 송빈빈 본인이 했다. 그러나 이후 송빈빈에 대하여 논쟁이 일어나자, 학교는 유진에게 의견을 구한다. 유진은 만일 송빈빈을 빼버리면 송빈빈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이 더욱 커질 것이고, 또한 송빈빈은 문혁후에 조사를 받은 '삼종인(三種人, 임표 강청반혁명집단의 반란을 추종한 사람, 방파사상이 엄중한 사람, 타잡창(打砸搶)분자를 가리킴)도 아니다. MIT 지구행성과학과에서 대륙최초로 박사학위를 받은 여박사로서 저명한 교우에 선발될 자격이 충분함에도 결국 그녀는 보류되게 된다.

교우들의 의견은 송빈빈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며칠 후 그녀는 계속하여 선발에 참가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선발에 참여하기로 한 결정의 결과는 그녀의 예상을 벗어났다. 그녀는 다시 한번 논쟁의 회오리에 휘말리게 된다.

최근 들어 유진은 계속하여 교우들에게 8.5사건의 역사진면목을 환원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다. 2013년 1월 4일, 북경대학 전 우공학사(禹公學舍)에서 개최된 "8.5사건진상"세미나에서, 유진은 자신은그녀와 송빈빈의 변중운사망 및 천안문수장사건에서의 진실한 역할을 환원하여, 송빈빈과 책임을 분담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다. 그건 그녀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3. 남자기자.

송빈빈이 모택동에게 수장을 바친 후, 오후에 학교로 돌아왔고, <광명일보>의 젊은 남자기자와 인터뷰를 하게 된다. 그녀는 모택동이 그녀에게 두 마디 말을 했다고 들었다면서, 그 두 마디 말을 적어달라고 한다.

이틀 후, <광명일보>는 <나는 모주석에게 홍수장을 달아드렸다>라는 글을 발표하면서, 작자를 '송요무(송빈빈)'이라고 적었다. 이 글은 송빈빈이 자술하는 말투로 그녀가 송요무로 개명했다고 하였다. <인민일보>도 이를 전재하며, '송요무'라는 이름은 전국에 알려지게 된다.

송빈빈은 말했다. 이건 그녀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그녀는 '요무'로 개명한 일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이 '개명'을 인정해버렸다. 송빈빈은 마대자루로 담을 만큼의 편지들을 받게 되는데, 수신인의 이름은 '송요무'였다. 송빈빈과 송요무 두 이름을 모두 사용하기 불편해지자, 송빈빈은 송암(宋巖)으로 개명하여 문혁이후까지 사용했다.

송빈빈이 송요무로 개명하였는지 아닌지에 대하여 그녀의 친구들조차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진소로는 송빈빈 남편과 학교친구이다. 그도 21세기초에 송빈빈 본인의 입으로 듣고나서야 개명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송빈빈이 '송요무'로 변신한 후, 초가(抄家, 가산몰수), 파사구(破四舊)에 참가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무한으로 갔던 일은 '송요무'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키는 작용을 했다. 송빈빈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왕임중(王任重)이 그녀와 유진을 동원하여 무한으로 가서 호북성위를 보호하도록 했다. 이는 아마도 '송요무'의 영향력을 빌리려는 의미였을 것이다. 유진은 가지 않았지만, 송요무는 4명의 학교친구들과 함께 갔다. 그녀는 이유에 대해 왕임중이 송임궁의 옛부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한에서, 송빈빈은 호북성위를 보호하자는 글을 발표한다. 그녀에 따르면 이름을 송빈빈으로 적었는데, 성위에서 송요무로 바꿔서 발표했다고 한다. 게다가 여러 마디의 욕설을 덧붙였다고 한다. 당시 송빈빈은 의외로 여겼다. 이 글은 영향력이 아주 컸고, 송빈빈의 학교마저도 "요무학교"라고 불렸다. 그후 "귀여아(鬼女兒)"를 보내 호북성위를 보호하려 한 것이 되어 나중에 강청이 송임궁에게 덧씌우는 죄명중 하나가 된다.

개명을 시작한 것은 그 <광명일보>의 남자기자이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송빈빈에 따르면, 문혁후 그녀는 <광명일보> 사장 목흔(穆欣)을 찾아가서 그 기자가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했으나,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만일 송빈빈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젊은 남자기자"는 당시의 정치주제에 적합하게 창조적으로 지도자의 한마디 말을 가지고 '송요무'라는 마력을 지닌 이름을 만들어 냈다. 세월이 흐른 후, 자연스럽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게 되고, '삼종인'의 혐의를 피할 수 있었다.

이런 창조적인 기자는 송빈빈을 '송요무'로 만드는 마지막 계단을 만들어주었다. 그의 보도수법은 건국후 신문사상의 여러 '경전명편(經典名篇)'을 떠올리게 만든다.

4. 유란란(劉蘭蘭)

1월 4일의 세미나에서 <기억>의 편집인 오적(吳迪)은 8.5사건에 참가하여 변중운을 구타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다: 류란란(劉蘭蘭, 혹은 劉楠楠). 이는 최근 들어 유일하게 거명된 구체적인 '흉수'이다.

오적은 이렇게 말했다. 그 여학생은 초중을 북경시제3여중을 다녔고, 고중때 사대여부중에 들어왔다. 군대간부자제이다. 교우의 회고에 따르면, 그날 변중운을 구타할 때, 한 무리의 '삼군총부대원(三軍總部大院)'에 사는 여학생들이 가장 심하게 구타했다. 왜냐하면 그녀들은 공부를 잘하지 못했는데, 이깨 기회를 잡아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유란란은 그중 가장 심하게 때린 사람이다. 오적에 따르면, 유란은 그후 군대에 들어갔고, 문혁후에 '삼종인'조사때 그녀는 "쌍개(군적, 당적박탈)"당하고, 구금되어 재판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공단(孔丹)이 중앙지도자에게 '노홍위병변호'를 올리면서 위기를 넘기게 된다.

"누가 진짜 흉수이냐"는 문제에 있어서, 전후로 몇몇 원로의 자녀들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사후에 그녀들은 8.5 변중운구타사망사건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나의 아이러니한 현상이 있다. 변중운의 죽음을 둘러싸고, 사대여부중의 교우들은 여러 저작을 출판했고, 서로 다른 입장에서 조사를 진행했다. 예를 들어 왕우금의 <학생이 선생을 때리는 혁명>과 유진, 섭유려(葉維麗), 풍경란(馮敬蘭)등의 조사가 있다. 다만 이들 저작과 조사결론에서, 누구도 그날 직접 변중운을 구타한 사람의 이름은 거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섭유리등의 기록에는 가장 심하게 때린 사람에 대한 묘사가 있는데 왕왕 "한명은 마르고 키가 컸고, 한명은 얼굴이 둥글었으며, 문혁전에 아주 유명했다."라는 것이다. 실제 누가 때렸는지는 공개적인 비밀인 것으로 보인다. 다만 조사결론이나 세미나에서 교우들은 여전히 진짜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진짜흉수를 추궁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또 다른 원인은 구타에 참여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누가 우두머리인지도 따지기 어렵다는 것이다. 풍경란이 최근에 발표한 8.5사건에 대한 종합기술에서는 그저 그녀를 "유모모(劉某某)"라고 적었다. 오적이 언급한 "류란란"은 유일하게 보일듯 말듯 드러난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만일 끝까지 때린 사람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면, 송빈빈은 "변중운죽음"이라는 부담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5. 공단(孔丹)

공단은 최근 들어 진효와의 "홍얼다이욕설전(紅二代罵仗)"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문혁때 송빈빈과 함께 노홍위병에 속했고, 함께 사람을 마구잡이로 때리지 말자는 '정책파'에 속했다. 그리고, 8.18일 동시에 천안문성루에 올라갔지만, 직접적인 관계는 없다.

1966년 8월 31일, 공단은 다시 천안문에 오른다. 아마도 송빈빈을 흉내내려한 것이겠지만, 그는 당시 강청(江靑)과 임표(林彪)에게 "서규(西糾)"홍위병수장을 달아준 후에 모택동에게도 달아주려 했지만, 주은래에 의해 저지당했다.

공단은 문혁후에 한번 '상서(上書)'행위를 하여 전체 노홍위병집단의 운명에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간접적으로 송빈빈의 현재 논쟁의 화근을 심은 셈이 되었다. 1984년, '노홍위병'은 문혁후에 '삼종인'조사를 받게 된다. 공단은 홍얼다이 신분으로 진운(陳雲)에게 글을 올린다. 그리고 글에서 '노홍위병'은 문혁때 견결하게 유등(劉鄧)을 우두머리로 하는 '노일배무산계급혁명가'을 지지하고, 중앙문혁이 당과 권력을 찬탈하는데 반대하고, 비록 초가파사구때 과오가 있기는 하지만, 공로가 과실보다 크며, 각급노간부를 타도하는 것을 목표로 한 조반파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말한다. 이 이유는 확실히 요점을 찔렀고, 진운등의 지시가 내려온다. 그리하여 노홍위병들은 혐의를 벗어나고 후계자대열에 끼어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노홍위병들을 변명한 이유중 확실히 '홍팔월'을 빼버린다. 그들이 주도학 폭력행위임에도.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8.5사건에 참여하여 변중운을 구타한 유란란은 원래 재판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이 문제는 시종 정리되지 못했다. 다수의 노홍위병들은 앞날을 보장받는 동시에 '변중운의 죽음'과 유사한 심리적인 상처가 발효된다. 역사와 심리적인 채무는 계속하여 누적된다. '송요무'같은 부호화된 인물이 떠안게 된다. 송빈빈은 이로 인하여 외국으로 나가서 살아야 했고, 2003년 귀국한 후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며, 계속하여 '송요무'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마침내 그녀와 진소로같은 '노홍위병'들이 앞에 나서 사죄를 했다. 소잃고 외양간고치는 격이고, 오래 쌓인 문제를 되돌리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