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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1326

강청의 전남편 당납(唐納): 신비한 신분의 수수께끼 (2) 글: 하월명(賀越明) 홍콩 창간에 막후연락 및 총편집을 맡다. 당납의 중공당원신분은 그와 두번이나 동료로 함께 일했던 원로신문인 서주성이 가장 먼저 밝혔다. 처음에는 간접적으로 밝힌다. 그는 1980년대초에 (상해인민출판사1981년판)에 "오소주(吳紹澍)와 "라는 절에서 1947년 5월 가 국민당정부에 의해 폐쇄당한 후, 다음 해에 오소주와 함께 대만으로 간 일을 언급한다. "우연하게도 상해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당원동지가 홍콩에서 비밀리에 상해로 돌아와서 나에게 말했다. 민혁(民革)이 이미 홍콩에 성립되었고, 기관보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임조(李任潮) 선생은 나에게 가서 주재해달라고 했다..." 홍콩에 성립된 민혁의 전칭은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로 주석은 이제심(李濟深)으로 자가 '임조'였다.. 2023. 3. 4.
유경당(劉慶棠)이 본 "사인방(四人幇)" 유경당(劉慶棠) 구술 진도수(陳徒手) 정리 유경당이라는 '발레왕자'는 문혁때 관직이 문화부 부부장, 중공10대 주석단성원, 제4기 전인대 주석단성원에 이른다. 1976년, '사인방'이 타도된 후 즉시 격리조사를 받았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문화부 부부장으로 있던 유경당은 사인방과 밀접하게 접촉했고, 그들의 행동거지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다. 상사와 부하관계, 동료관계, 친구관계이므로 피차간에 애증이 교차할 것이므로 어느 정도 편향될 수는 있고 완전히 객관적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우리가 사인방을 이해하는데 조금 다른 측면에서의 인식과 사고를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1. 요문원(姚文元): 산양처럼 수염을 길렀다. 유경당의 인상 속에서 요문원.. 2023. 3. 2.
백선용(白先勇): 나의 모친 마패장(馬佩璋) 글: 백선용 모친 마패장 여사는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 마유기(馬維琪)는 과거출신으로 흥안현령(興安縣令)을 지냈다. 모친은 장녀였으며, 친남동생이 한명있고, 서출남동생, 여동생 둘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모친을 매우 아꼈고, 그의 장상명주(掌上明珠)였다. 들은 바에 따르면, 모친이 시집을 가기 전에, 그녀는 소매에 열쇠를 가득 달고 다니면서, 집안일을 관장했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마작을 두기만 할 뿐 집안일은 신경쓰지 않았다고 한다. 모친은 젊었을 때부터 혼자서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일면을 보였다. 건괵불양수미(巾幗不讓鬚眉)의 기백을 보였다. 어렸을 때, 모친의 조모는 그녀에게 전족을 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녀는 발이 아프자 할머니를 발로 차고 방문을 뛰쳐나가 난리를 펴서 결국 전족을 하지 않았.. 2023. 3. 2.
손책(孫策)은 강동을 평정하면서 얼마나 많은 인재를 거두었을까? 글: 역사대작회(歷史大炸燴) 손책(孫策)의 강동을 평정하기 위한 발걸음은 195년(이전인 194년에 원술은 일천여명을 손책에게 귀속시키고, 부친 손견도 이전에 부하들을 손책에게 넘겨준다) 장강을 건너 유요(劉繇)를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200년까지, 전후로 오현(吳縣), 회계현(會稽縣), 단양현(丹陽縣), 예장현(豫章縣), 여릉현(廬陵縣, 예장현에서 분리됨), 여강현(廬江縣)등 강동육현(江東六縣)을 차지한다. 그 기간은 6년이 걸렸다.이것이 강동의 기반이고, 동오의 기반이다. 손책은 수천명으로 강동을 휩쓸면서 약한 집단에서 강한 집단으로 거듭난다. 그 동안 그가 거두어들인 사람의 수는 날로 늘어났다. 거기에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포함되어 있었을까? 두명의 도독(都督), 네명의 명신(名臣), 일곱명의.. 2023. 2. 27.
오함(吳晗): 평생 중공에 충성하였으나, 중공의 감옥에서 죽은 어용학자 글: 진뢰(秦雷) 오함(吳晗)은 청빈한 집안 출신으로 자신의 근면함과 노력으로 호적(胡適)에게 인정을 받아, 1931년 청화대학 사학과에 합격하고, 1934년 청화대학을 졸업한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재능이 출중하여 1937년에는 겨우 28살의 나이로 운남대학 교수로 채용된다. 1940년 오함은 서남연대(西南聯大)로 옮겨 교수가 되고 그때부터 공산당과 접촉하게 된다. 오함의 부인 원진(袁震)은 중공원로 동필무(董必武)의 제자이고, 두 사람은 함께 중경으로 가서 동필무를 만난 적도 있다. 1943년 7월, 오함은 곤명(昆明)에서 중국민주동맹(中國民主同盟)에 가입하고, 공산당이 조직한 "서남문화연구회"등에서 활동하면서, 완전히 호적의 "독서구국(讀書救國)"론을 포기하며 중국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며, .. 2023. 2. 25.
장한수(張恨水): 3명의 부인, 13명의 자식, 민국시대 최고의 베스트셀러작가 글: 습문화(拾文化) 장한수가 평생 가장 자랑스러워한 것은 바로 글솜씨이다. 양으로 따지자면 그는 민국시대 작가들 중에서 절대로 첫손에 꼽힐 것이다. 50여년간 집필하면서 3000여만자를 썼다. 동시에 여러 소설을 연재하는 것도 다반사였다. 최고기록은 동시에 7편의 장편소설을 연재한 것이다. 그렇게 많은 스토리라인, 그렇게 많은 인물이 있지만, 한번도 헷갈리지 않았고, 한번 글을 쓰면 고치지도 않았다. 더욱 놀라운 점은 그가 한손으로 소설을 쓰면서, 다른 한손으로는 마작을 했는데, 둘 다 실수없이 해냈다는 것이다. 질로 따져도 그는 팬들사이에서는 대가중의 대가이다. 진인각(陳寅恪)이 두 눈이 멀고 나서, 매일 친구 오복(吳宓)에게 부탁해서 장한수의 소설 을 읽어달라고 부탁해서 병상의 무료함을 달랬다고 한.. 2023. 2. 22.
개풍(凱豊): 준의회의(遵義會議)때 모택동을 가장 무시했던 중앙위원. 글: 묘안관사(猫眼觀史) 모주석과 같은 중국의 영수도 전쟁시대에는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으면서, 다른 이들의 냉대를 받았었다. 특히, 1932년 10월애 개최된 영도회의(寧都會議)후 그는 한때 홍군 지도층에서 철저히 배제된 적도 있다. "사실은 웅변보다 강하다." 1935년 1월에 개최된 준의회의(遵義會議)에서 박고(博古)를 대표로 한 잘못된 노선으로 당과 홍군은 사상유례없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여기에서, 모택동은 마침내 당중앙과 홍군의 지도자지위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준의회의때 한 사람의 그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오랫동안 모주석이 가슴에 담아두게 된다. "너, 모택동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아느냐? 너는 기껏해야 를 봤을 뿐이잖나. 군사지식이라는 것이 모두 거기에서 배운 것이고. 지금은 쓸모가 .. 2023. 2. 20.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의 여덟 아들: 2명은 황제가 되고, 5명은 비명에 죽다. 글: 정회역사(情懷歷史) 당고종 이치(628년 7월 21일 - 683년 12월 27일). 자는 위선(爲善), 당나라의 제3대 황제. 당태종 이세민의 아홉째 아들이다. 정관23년(649년), 당태종이 사망한 후 태자 이치가 즉위하니 바로 당고종이다. 당고종은 즉위후 "영휘지치(永徽之治)"를 열어 당나라의 국력을 전성기로 끌어올린다. 다만, 현경5년(660년)이후, 당고종은 자주 머리가 어지러워, 조정의 정무를 처리하는데 영향을 주어, 무측천이 점차 대권을 장악하게 된다. 홍도원년 십이월 정사일(683년 12월 27일), 당고종은 정관전(貞觀殿)에서 사망하니, 향년 56세였다. 그의 아들들은 당나라조정 내부투쟁의 원인으로 이치의 8명의 아들은 대부분 선종(善終)하지 못했다. 1. 이충(李忠) 이충은 당고종 .. 2023. 2. 20.
영천순씨(潁川荀氏): 동한에서 남북조까지... 글: 소태양(小太陽) TV드라마 에서 왕징쏭(王勁松)이 연기한 순욱(荀彧)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지모가 뛰어나서, 조조에 전심전력을 다하는 동시에 한황실에 충성하며 한나라의 이익을 보호했다. 순욱은 동한과 조위집단의 중요인물인데, 그의 뛰어난 개인적인 능력이외에 우리가 살펴보아야할 점은 그의 배후에 있는 가족세력, 즉 영천순씨(潁川荀氏)이다. 동한에서 시작하여 남조에 이르는 명문거족으로서 순씨가족의 역사는 많은 왕조들보다 길었다. 오늘은 영천순씨의 역사를 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순씨가족의 탄생 영천은 오늘날의 하남성(河南省)에 소재하고 있고, 낙양(洛陽)과 이웃하고 있는 중원의 복지(腹地)이고, 경제중심이 남방으로 옮겨가기 전까지 이곳은 교통요지였을 뿐아니라, 역대왕조의 정치와 문.. 2023. 2. 17.
고륜화효공주(固倫和孝公主):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십공주(十公主) 글: 왕옥호(王鈺浩) 고륜화효공주는 건륭제가 65세에 얻은 막내공주이다. 만일 그녀가 사내아이였다면 아마도 가경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혼후 집안이 망하면서 고독하게 13년을 살다가 죽는다. 건륭제의 일생을 보면, 수명이 길어서 재위기간도 길고, 후비(后妃)와 자녀도 많았다. 그가 12살때, 강희제는 사람을 시켜 그의 사주팔자를 살펴보는데, 결과는 '홍복제천(洪福齊天, 하늘과 같이 큰 복을 타고났다)'이라는 말을 듣는다. 아마도 그것때문인지, 그는 팔자가 아주 셌고, 그의 후비, 자녀는 대부분 그보다 먼저 죽는다. 십공주가 태어나기 전에 그는 이미 26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65세가 되던 해 살아있는 자녀는 겨우 11명이었다. 아들중 가장 어린 황자는 열살이었고, 딸들은 일찌감치 시집을.. 2023. 2.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