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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1380

방국진(方國珍): "원나라를 망하게 한 자는 방국진이다(亡元者, 國珍也)" 글: 서북낭(西北狼)​청나라때의 명사연구자인 부몽린(傅夢麟)은 원나라말기 농민반란을 연구하면서 내린 결론은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원나라를 망하게 한 자는 바로 방국진이다(亡元者, 國珍也)"​그렇다. 부몽린이 보기에, 원나라에 가장 크게 해를 끼친 자는 진우량(陳友諒)도 아니고, 장사성(張士誠)도 아니며, 더더구나 주원장(朱元璋)은 아니었다. 오히려 원나라말기 난세에 존재감이 별로 없는 소군벌 방국진이었던 것이다.​더욱 이해되지 않는 점이라면, 반원의 기치를 가장 먼저 들었던 방국진은 원말의 난세를 무사히 넘기고, "명태조 주원장의 통치하에 말년을 편안하게 보내면서, 자손을 보호하고, 부귀복록을 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강남백만병을 모조리 죽여버렸다는 주원장이 왜 유독 자신과 천하.. 2024. 10. 6.
후춘화(胡春華)의 재등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글: 이정요(李淨瑤)​전 중공황태자이자 후진타오(胡錦濤)의 격대지정후계자인 후춘화가 최근 들어 자신만만하게 나타나서 내몽골을 시찰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분석한다: 후춘화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내가 돌아왔다"고 드러내는 것은 강력하게 복귀했다는 것이라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르게 분석한다. 후춘화가 재등장한 것은 분명 왕후닝(王滬寧)의 음모일 것이라고.​중국의 관영매체보도에 따르면, 9월 9일부터 13일까지, 전국정협 부주석 후춘화는 전국정협농업및농촌위원회 특별시찰단을 이끌고 내몽골을 시찰했다.​9월 9일, 내몽골자치구당위서기 쑨샤오핑(孫紹騁), 자치구당위부서기, 자치구인민정부주석 왕리샤(王莉霞), 자치구정협주석 장얜쿤(張延昆)이 후허하오터에서 후춘화를 맞이한다. ​해외의 시사평.. 2024. 9. 26.
이윤(伊尹)의 수수께끼: 상왕태갑(商王太甲)을 쫓아낸 후 스스로 다시 권력을 돌려주었을까? 글: 자귤(紫橘)​고대 권신(權臣)의 찬위탈권(纂位奪權)을 얘기하면 모두 상(商)나라때의 이윤(伊尹), 한(漢)나라때의 곽광(霍光)을 떠올린다. 자신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군왕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윤, 곽광은 군왕의 권력을 침탈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다만, 곽광의 사적은 비교적 구체적이나, 이윤의 사적은 비교적 모호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윤이 현신(賢臣)이라 여기고, 탕(湯)을 보좌하여 천하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윤은 권신이다. 직접 상왕태갑을 쫓아냈다. 이런 권신의 최후가 좋을 수 있을까?​1 이씨부락(伊氏部落)​오늘 얘기할 상나라때의 저명한 대신 이윤은 사마천이 에서 "이윤의 이름은 아형(阿衡)이다"라고 하였다. 에서는 "이름이 지(摯)이다"라고 하였다. 한나라때의.. 2024. 9. 26.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군왕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신하가 임신한 소첩을 바치다. 글: 역사대미감(歷史大微鑒)​옛사람들은 이런 말을 했었다: "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사를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不孝有三, 無後爲大)" 이를 보면, 옛사람들은 가족혈맥의 전승을 매우 중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보통백성도 마찬가지이니, 왕실은 더욱 신경썼다. 황제가 만일 생육능력이 없다면, 이는 단순히 효 불효의 문제가 아니라, 황위를 노리는 자들이 기회를 노릴 수 있어, 통치지위에 위기가 미치고, 국가가 동란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전종접대(傳宗接代)'는 황제의 가장 중요한 직책중 하나가 된다.​역사상 후사를 두지 못한 군주는 많다. 한소제 유불릉, 한애제 유흔, 명무종 주후조, 광서제 재첨, 선통제 부의가 모두 일국지군으로 후사를 두지 못한 경우이다. 그리고 춘추전국시기에 한 초나라.. 2024. 9. 25.
육군양가자(六郡良家子): 동탁(董卓)이 권력을 잡은 기반 글: 자귤(紫橘)​양한(兩韓, 서한 및 동한)은 무덕(武德)이 충만했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한나라때 북방에서 전투를 벌이던 병사들과 장수는 대부분 )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민풍이 사납고, 집안자산도 충분하고, 장비도 우수하였다. 그들은 우림군(羽林軍)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관직과 작위를 얻으려년 적극성이 아주 높았다. 이것이 바로 한나라군대가 강대했던 주요한 원인이다. 양한은 이로 인해서 흥했고, 동한은 바로 육군의 후인이다. 그러나, 동한말기 군벌할거가 일어나면서 우림군 건제는 사라지고, 육군양가자라는 집단도 역사에서 인멸되어버린다.​육군(六郡)과 양가자(良家子)​소위 양한의 육군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반고(班固)의 이다. 그러나 그는 육군이 구체적으로 어.. 2024. 9. 25.
모백온(毛伯溫): 명나라는 안남(安南)을 정복했는가? 글: 자귤(紫橘)​가정제(嘉靖帝)는 각박과은(刻薄寡恩)한 것으로 유명했고, 시기심이 많은 군주였다. 그가 진심으로 대한 사람을 실로 많지 않다. 역사상 대명이 자자한 엄숭(嚴嵩), 서계(徐階)도 가정제로 하여금 안심하게 만들지 못했다. 가정제의 유모의 아들인 금의위지휘사(錦衣衛指揮使) 육병(陸炳)은 비록 그의 신임을 받았지만, 가정제가 직접 그의 전포(戰袍)를 벗겨주는 영광은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모백온이라는 명나라의 개국공신 유백온(劉伯溫)과 성만 다른 인물은 가정제가 그를 위해 지어준 시에서 "태평대조귀래일(太平待詔歸來日), 짐여선생해전포(朕與先生解戰袍)"라는 시를 지어주었다. 그럼 도대체 이 모백온은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었을까?​명나라와 안남(安南)​홍무제때, 안남국왕(安南國王) 진일규(陳日喹)는.. 2024.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