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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1325

중국 신동(神童)의 역사 (3) :당금, 그리고 신동의 통상적인 결말 글: 유랑미(柳浪美) 9. 당금의 신동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장애령(張愛玲)의 유명한 말을 알고 있다: "이름은 어릴 때 알릴 수록 좋다(成名要趁早)". 이 말을 많은 가장들은 금과옥조로 여긴다. 윈난(雲南) 쿤밍(昆明)의 6학년 초등학생 진X석(陳X石)은 결직장암유전자연구과제로 전국청소년과기창신대회에서 3등상을 받는다. 그는 12살때 이미 유전학, 유전자조합, 유전자변형, 생물화학, 임상샘플분석, 직장암을 연구했고, 암을 일으키는 변형유전자 C10orf67을 발견한다....14일만이 전문지식을 배웠다. 6학년의 12살짜리 초등학생의 학술조작이 이 정도로 터무니없다. 직장암을 연구할 줄 알고, 전문용어도 술술 얘기하다니, 도대체 이해를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진군의 일기장을 보면, "나는 유전자가 뭔.. 2023. 4. 11.
중국 신동(神童)의 역사 (2): 명, 청, 민국, 신중국 글: 유랑미(柳浪美) 5. 명(明)의 신동들 신동을 진정으로 추앙한 것은 명왕조이다. 특히 젊은 나이로 과거에서 거인이 되거나 진사가 된 신동은 주목을 받았다. 그리하여, 적지 않은 신동들이 어린 나이에 과거급제한 후 명나라의 최고위직 문신이 되었다. 예를 들어, 명나라제일신동으로 불리는 해진(解縉)은 18살에 거인이 되고(해원, 즉 1등), 19세이 진사가 되며, 명나라의 수보(首輔)가 된다. 이동양(李東陽)은 18세때 진사가 되어 내각수보가 된다; 양일청(楊一淸)은 4,5살때 책을 읽고 글을 썼으며, 7,8세때는 이미 문장을 제대로 썼던 유명한 신동이다. 10살때 한림수재로 추천받고, 18세때 진사가 되며, 내각수보에 오른다; 양정화(楊廷和)는 12살에 거인이 되고, 19살에 진사가 되었으며 내각수보.. 2023. 4. 11.
중국 신동(神童)의 역사 (1): 선진, 한위, 당송. 글: 유랑미(柳浪美) 중국은 자고 이래로 영웅을 많이 배출하였고, 서로 다른 시기에는 서로 다른 유형의 신동도 많이 배출되었다. 그들은 찬란한 별빛처럼 신주대지위의 하늘에 떠 있었고, 어떤 경우는 유성처럼 그저 밤하늘을 순식간이 지나가버렸다. 영성(靈性)이 개체의 차이를 결정한다. 영성과 천부를 가진 아니는 반드시 총명하고, 한번 배우면 바로 익히며, 한가지를 가르치면 열 가지를 깨우친다. 스스로 익혀서 인재로 성장하고, 심지어 스스로 이치를 깨닫는 능력이 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오성이 뛰어난 아이들을 '신동'이라 불렀다. 간단하게 신동의 의미를 말하자면, 근본적으로 아동시기에 소년 심지어 청년시기에 완성할 수 있는 일을 해낸다는 것이다. 신동을 배양한다는 것은 나이와 달리기를 하는 것이다. 그.. 2023. 4. 10.
영태공주릉(永泰公主陵): 무측천 손녀의 묘에 얽힌 이야기... 글: 야독문사(夜讀文史) 1958년, 섬서(陝西) 함양(咸陽)부근의 양산(梁山)에서 채석노동자들이 산을 깎아 돌을 캐고 있었다. '쿠궁'하는 큰 소리와 함께, 열린 깨트린 돌의 아래에 크기가 균일하고, 배열이 나란한 돌로 쌓은 석벽이 발견된다. 이는 분명 능묘(陵墓)이다. 공사팀은 즉각 공사를 중단하고, 현지의 문화재당국에 연락한다. 문물국은 소식을 들은 후, 즉시 고고인원을 파견하여 현장조사를 진행한다. 사료기재를 종합하여, 연구자들은 이곳은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와 여황 무측천(武則天)의 합장능인 '건릉(乾陵)'이라고 판단한다. 그후 몇년간 고고학자들은 건릉주변을 탐사했고, 차례로 여러개의 배장묘(陪葬墓)를 발견한다. 그중 1킬로미터 바깥의 배장묘는 전문가들의 주의를 끌었다. 이 묘는 총면적이 .. 2023. 4. 10.
조자룡의 장판파(長板坡)전투 전설들..... 글: 기사석금(記史惜今) 수백년동안, 삼국이야기는 역사에서 소설, 다시 민간이야기를 거치면서 변화해왔다. 당양(當陽)은 일찌기 삼국시대의 고전장(古戰場)으로서, 자연히 여러 민간이야기로 전해내려오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정사(正史), 연의(演義, 소설)의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현지 민중들의 상상력까지 보태지면서, 현지의 산 하나 물 하나, 풀 하나 나무 하나, 민속풍정까지 모두 신화같은 전설적인 색채를 띄게 되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 파란만장한 역사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처럼 고토(故土)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여러 이야기는 모두 해당 지방의 특색을 띄게 되었고, 많은 에피소드와 인물이미지는 적지 않게 바뀌게 되었다. 정사기록인 의 이와 관련된 부분은 짧은 몇 마디에 불과하다: "그리고 선.. 2023. 4. 5.
황소(黃巢)는 왜 실패했는가? 글: 청풍명월소요객(淸風明月逍遙客) 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의종(唐懿宗)은 황음사치(荒淫奢侈)하고, 지취금미(紙醉金迷)하며, 환관이 권력을 농단하고 ,번진이 지방에 할거했으며,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각지에서는 반란이 여기저기서 일어났고, 결국 대규모의 황소의 난(黃巢起義)이 일어난다. 황소는 875년에 거사하여, 884년 죽을 때까지 전후로 10년간 활약했다. 이 십년간은 881년 황소가 장안에서 황제를 칭한 시점을 기준으로 나눌 수 있다. 앞의 6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기본적으로 파죽지세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지만, 뒤의 4년간은 황소의 반란군이 병패여산도(兵敗如山倒), 즉 산사태가 난 것처럼 무너져서, 궤불성군(潰不成軍), 궤멸하여 제대로 싸울 수 있는 군대가 아니었다. 와 의 기록을 보면, 황소는 교.. 2023. 3. 16.
엽문(섭문, 葉問): 알려지지 않은 놀라운 사실... 글: 이광송(李廣松) 일본인과 싸우고 미군과 싸우는 는 네티즌들에게 핫이슈가 되었다. 여기에서는 여러분들에게 fact check를 해드리겠다. 황바이밍(黃百鳴)이 감히 마주할 수 없는 엽문에 관한 사실들에 대하여. "진짜 엽문"은 기실 또 다른 재미가 있다. 첫째, 엽문은 외국인과 싸워본 적이 없다. 영화에서는 일본장교, 영국권투선수, 미군을 이겼다고 하지만, 기록이 없다. 둘째, 엽문은 1949년 중국에서 홍콩으로 도망친다. 일본인을 피해서 도망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중국공산당이 집권하자 도망친 것이다. 섭문은 당시 '대도항(大逃港, 홍콩으로의 대탈주)'에 가담한 수십만 중국인중 한명인 것이다. 셋쨰, 엽문과 브루스리(李小龍)이 실제 만난 것은 외부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많지 않았다. 브루스리가.. 2023. 3. 8.
송인종(宋仁宗)의 3대 번민: 인모(認母), 폐후(廢后), 입저(立儲) 글: 원희(元曦) 이런 말이 있다. 청관난단가무사(淸官難斷家務事). 청렴한 관리도 집안 일은 판단하기 어렵다. 천자도 마찬가지이다. 그에게도 골치아픈 집안 일이 있다. 송인종은 일생동안 세 가지 일로 골치가 아팠다. 무슨 세 가지 일인가? 인모(認母), 폐후(廢后), 입저(立儲)이다. 쉽게 말하면, 누가 엄마이고, 누가 마누라이며, 누가 아들이냐는 세 가지 일인 것이다. 보통사람들의 집안 일은 그 자신의 프라이버시이다. 주변 사람들이 간여하기 힘들다. 그러나, 천자는 다르다. 왜 다른가?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천자는 권력이 크므로,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실제는 정반대이다. 천자에게는 프라이버시가 없다. 그의 집안일도 모두 나랏일이 되어 버린다. 대신들도 말을 하고, 언관.. 2023. 3. 8.
백숭희(白崇禧)의 부인 마패장(馬佩璋)의 일생 글: 문사왕왕(文史旺旺) "사생계활(死生契闊), 여자성열(與子成說), 집자지수(執子之手), 여자해로(與子偕老)" 이는 중 가장 마음에 와닿는 사랑의 시이다. '여자해로'라는 문구는 얼마나 많은 사랑하는 남녀들이 바라는 바인가? "이득무가보(易得無價寶), 난득유정랑(難得有情郞)"(무가지보를 얻기는 쉽지만, 사랑하는 남자를 얻기는 어렵다). 자신과 평생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얻기는 쉽다. 그러나 서로 도우면서 인생의 고난을 함께 겪고, 인생의 길에서의 비바람을 함께 막으며 손에 손을 잡고 흰머리가 될때까지 사는 것은 쉽지 않다. 쉽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바라는 바가 된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마패장(馬佩璋)이다. 현지에서 명망있는 마씨집안의 장상명주이다. 부친 마건경(馬建卿)은 현지의 명망있는 선비였.. 2023. 3. 6.
강청의 전남편 당납(唐納): 신비한 신분의 수수께끼 (2) 글: 하월명(賀越明) 홍콩 창간에 막후연락 및 총편집을 맡다. 당납의 중공당원신분은 그와 두번이나 동료로 함께 일했던 원로신문인 서주성이 가장 먼저 밝혔다. 처음에는 간접적으로 밝힌다. 그는 1980년대초에 (상해인민출판사1981년판)에 "오소주(吳紹澍)와 "라는 절에서 1947년 5월 가 국민당정부에 의해 폐쇄당한 후, 다음 해에 오소주와 함께 대만으로 간 일을 언급한다. "우연하게도 상해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당원동지가 홍콩에서 비밀리에 상해로 돌아와서 나에게 말했다. 민혁(民革)이 이미 홍콩에 성립되었고, 기관보를 준비하고 있으며 이임조(李任潮) 선생은 나에게 가서 주재해달라고 했다..." 홍콩에 성립된 민혁의 전칭은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로 주석은 이제심(李濟深)으로 자가 '임조'였다.. 2023. 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