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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1291

명나라말기의 농민군은 "삼국연의(三國演義), 수호전(水滸傳)"을 병법서로 활용했다. 글: 역사D학당(歷史D學堂) 명나라말기에 중국의 대지는 풍운변환(風雲變幻)하여 전쟁이 지속되었다. 정규교육을 받은 관료들과는 달리, 농민반란군의 지도자들은 반란군을 지휘하여 싸울 때, 그들의 머리맡에 놓아두고 참고한 병법서는 대체로 , 등의 소설이었다. 청나라사람들은 이렇게 기록한 바 있다: 장헌충(張獻忠), 이자성(李自成)등의 무리는 "처음에는 모두 오합지졸이었고, 기율이 없었다" 그라나 나중에 성을 점령하고 지역을 차지하면서 점차 세력이 커진다. 그들이 '점점 지혜를 갖게 된' 원인은 바로 "듣기로 모두 의 전투사례는 그들이 전투할 때 유일하게 참고하는 비본(秘本)이었다." 을 쉽게 풀어쓴 것으로서, 과 는 실용성과 재미를 모두 갖추고 있다. 그래서 농민군들은 이 소설을 보배처럼 여긴 것이다. 멀리 .. 2023. 3. 12.
"황러시아계획": 러시아의 중국침략야망 글: 종극신앙(終極信仰) 황러시아계획은 후세인들이 날조한 인터넷글이 아니라, 각종 기록이 남아 있다. 정식학술간행물에도 기재되어 있고( 朱哲芳 저), 중국의 지방현지에도 기록되어 있으며(아이훈현지(璦琿縣誌)제8권), 대학학보에도 있다(길림사대학고1979년제4기 등등). 16세기부터, 제정러시아는 동쪽으로 확장을 시작하며, 두 차례의 야크샤전투(알바진전투)이후 1689년 청나라와 제정러시아는 첫번쨰 국경조약 을 체결하여 중러양국의 국경을 정한다. 비록 국경이 정해졌지만, 제정러시아는 조약을 준수하지 않았고, 청나라정부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점을 이용하여 실질적으로 중국의 영토를 잠식해 들어간다. 실질적인 점유가 형성되고, 그 토지위에서 러시아인의 인구비율이 우세를 점했을 때, 다시 청나라정부를 압박하여.. 2023. 3. 9.
강청의 전남편 당납(唐納): 신비한 신분의 수수께끼 (1) 글: 하월명(賀越明) 2012년 8월 23일은 당납 선생의 기일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지 꼬박 24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당납"이라는 이름은 알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사인방"이 타도되면서, 나라를 떠난지 오래되고 이름없이 살아가던 그가 다시 중국인들의 시야에 들어왔고, 보통민중들이 화제로 올리는 인물이 되었다. 일찌기 "사랑때문에 목숨을 버리려 했다" 1970년대말부터 현재까지, 신문잡지에는 당납을 소개하는 글이 적지 않았다. 수가 많아서 일일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총괄해서 말하자면, 이들 글 중에서 이전에 당납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몇몇 언론종사자들의 회고한 내용을 제외한 나머지 글들은 대부분 포풍착영(捕風捉影)하거나 다른 사람의 글을 베낀 수준이었고, 적지 않은 글들은 .. 2023. 3. 4.
산채(山寨)에서 제국(帝國)까지: 청나라는 어떻게 여진통일을 완성했는가? 글: 기사석금(記史惜今) 여진족은 중국역사상 위대한 민족이다. 일찌기 두번이나 중원으로 들어와 정권을 잡고, 금(金), 청(淸) 두 왕조를 건립한다. 오랫동안, 여진족은 부락들이 난립하는 상태였다. 일단 여진부락이 통일되면, 아주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1583년, 누르하치가 거병한 이후, 홍타이시(皇太極, 청태종)이 여진부락을 철저히 정복할 때까지, 후금은 반세기를 들여 마침내 통일을 완성한 것이다. 이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1. 건주여진(建州女眞) 각부의 통일 명나라후기 여진은 건주여진, 해서여진(海西女眞)과 야인여진(野人女眞)의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다. 먼저 건주여진부터 얘기해보자. 건주여진의 기원은 흑룡강 오국성(五國城)일대로 금(金)나라의 핵심지역이다. 명나라초기 도문.. 2023. 3. 2.
<유지단(劉志丹)>: 소설 한권으로 6만명이 연루되는 사건이 되다. 글: 왕우군(王友群) 1954년, 중공중앙선전부는 공인출판사(工人出版社)에 '중공열사' 유지단에 관한 책을 출판할 것을 요청했고, 공인출판사는 유지단의 제수(弟嫂)인 이건동(李建彤, 리젠통)에게 집필을 부탁한다. 1962년 여름, 6차례나 원고를 수정한 소설 이 , , 에 연재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옛날 유지단과 충돌이 발생한 바 있는 윈난성위 제1서기 염홍언(閻紅彦, 얜홍얜)이 이의를 제기하여 연재가 중단된다. 염홍언은 반대의견을 중공중앙에 제출한다. 염홍언에 따르면, 소설 에 나오는 긍정적인 이미지의 인물은 고강(高崗, 가오강)을 모델로 한 것이며, 이 소설은 "고강"의 명예회복을 위해 쓴 것이라는 것이다. 고강은 섬북근거지의 창건자중 한명이다. 1940년대 연안정풍때 염홍언은 중공고위층에 고강의.. 2023. 2. 28.
전촉(前蜀): 양자(養子)로 흥하고, 양자로 망하다. 글: 종횡오천년(縱橫五千年) 당나라말기, 왕건(王建)은 촉(蜀)지방에 할거하면서 전촉정권을 건립한다. 왕건이 강산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그는 120여명의 양자를 거둔다. 이들은 모두 그를 위해 선봉에 서서 적진을 돌파하고, 계책을 내어, 왕건이 황제의 보좌에 오르도록 도와주었다. 그러나, 왕건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강산을 이들 양자들 때문에 잃게 될 줄은. 925년, 후당(後唐)의 장종(莊宗) 이존욱(李存勗)이 병력을 파견하여 결국 전촉을 멸망시킨다. 그렇다면, 전촉의 흥망과 양자들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1. 전쟁터를 누비다. 안사의 난(安史之亂)이후 당나라는 전성기를 지나 쇠망의 길로 들어선다. 지방에는 강력한 번진들과 장수들이 존재하고, 조정에는 환관들이 힘을 얻는다. 이들은 자신의.. 2023. 2. 24.
남송(南宋)이 항주(杭州)를 도읍으로 정한 이유는....? 글: 심경독사(深更讀史) 정강지치(靖康之恥)이후 북송(北宋)이 멸망하고, 황족은 일망타진된다. 송휘종(宋徽宗)의 아홉째아들이자, 송흠종(宋欽宗)의 동생인 강왕(康王) 조구(趙構)만이 유일하게 그물에 걸리지 않은 물고기(漏網之魚)가 되었다. 그는 대신들의 옹립으로 하남(河南) 상구(商丘)에서 황제로 등극하니 그가 바로 송고종(宋高宗)이다. 그러나, 상구에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금나라병사들이 쳐내려오기 때문에 황급히 양주(揚州)로 도망쳐야 했다. 다시 금나라군대가 양주로 쳐들어오자, 그는 다시 낭패하여 장강을 건너 진강(鎭江)을 거쳐, 항주(杭州)로 간다. 그러나, 항주도 안전하지 않았다. 1129년(건염3년) 구월, 금나라군대가 다시 장강을 건너 남으로 쳐내려온다. 송고종은 즉시 신료들을 데리고 남으로.. 2023. 2. 16.
"중공특과(中共特科)": 비밀조직의 진실한 이야기 글: 원천(源泉) 오늘 이야기나눌 것은 역사상의 "중공특과"이다. 이 조직은 중국공산당사에도 애매모호하게 기록한 신비스러운 조직이다. 공산당사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소련이 아직 설립되기 전에, 볼세비키당은 건립초기 심각한 생존위기를 맞이한다. 내부의견이 분열되고, 반대당은 강력했으며, 여러 방면에서 짜르체제를 옹호하는 전통역량이 있었다. 이때 레닌의 주도하에 볼셰비키당에는 "체카"라는 특무조직을 두어, 암살과 테러활동을 벌이는데, 극히 잔혹하고 극단적인 수단으로 반대파와 경쟁상대를 제거한다. 최종적으로 공산세력이 집권당이 된다. 그리고 소련공산당을 그대로 복제한 중국공산당도 마찬가지의 과정을 거친다. 대륙의 저명한 다큐멘터리작가 왕판(王凡)이 최근 출판한 에서 여러 당사자들이 직접 겪.. 2023. 2. 14.
남창폭동(南昌暴動): 참가한 지도자들의 서열은? 글: 고벌림(高伐林) 중국의 정치와 문화전통은 역대이래로 존비유서(尊卑有序), 즉 위계질서를 중시하며 강상(綱常)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한다. 봉건등급에 반대하고, 사람은 평등하다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 중국공산당도 권력을 잡은 후에는 역시 존비유서를 따졌다. 여기에서 필자는 유방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천하를 차지한 후 논공행상을 벌이는데, 문신과 무신들이 서로 취한 상태에서 공을 다퉜다. 서로 소리치고, 검을 뽑아 탁자를 베고, 기둥을 쳤다. 유방은 그런 것이 꼴보기 싫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때 숙손통(叔孫通)이 유방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여, 등급제도, 예악규장을 제정하여 신하들을 교욱하고 백성들을 따르게 한다. 다시 조회를 개최하자 신하들은 황공해 하면서 법도를 따랐다. 유방은 그제서야 .. 2023. 2. 9.
일본은 남경대학살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글: 모유화설(毛有話說) 남경대학살은 2차대전때 중국을 침략한 일본군이 범한 비인간적인 죄행이다. 1937년 12월 23일 남경이 함락되고, 일본군이 학살을 시작한 때로부터, 국제여론의 광범위한 주목과 강력한 비난을 받았다. 예를 들어, 1938년 2월 11일 는 사론 에서 이렇게 썼다: 이번 남경등지에서의 살륙강간은 인류역사상 부끄럽고 슬픈 한페이지이다. 일본군벌의 본질은 무한한 침략이고 그 침략수단은 이런 간음살인방화약탈이다. 전세계 백인과 일반 유색인종은 모두 이는 인류공동의 대적이라고 인정한다. 하루빨리 전세계의 정신을 동원하여 공론의 권위로 일본의 선량한 인민들이 깨닫게 함으로써 잔혹한 군벌들이 제재받도록 해야 한다. 다만, 전시에 군부의 신문출판에 대한 검열등의 원인으로 일반일본국민들이 '남경.. 2023.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