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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1357

비참했던 동주"(東周)": 삼주병존(三周幷存)에서 이주분치(二周分治)까지... 글: 조작적초광인(造作的楚狂人)​기원전770년, 주유왕(周幽王)이 신국(申國)과 견융(犬戎)의 협공하에, 여산(驪山)에서 사망한다. 제후들은 태자 의구(宜臼)를 주평왕(周平王)으로 세우고, 낙읍(洛邑)으로 천도한다. 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평왕지시(平王之時), 주실쇠미(周室衰微), 제후강병약(諸侯强幷弱), 제(齊), 초(楚), 진(秦), 진시대(晋始大), 정유방백(政由方伯)"주평왕때, 주의 왕실이 쇠약해진다. 제후들은 강국이 약국을 병합하고, 제, 초, 진, 진의 세력이 커지고, 정치권력은 이들이 차지한다.​이 때가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동주(東周)"시대이다. 그러나, 그 시대에 살던 사람들에게 "주(周)"는 오직 하나이다. 동, 서의 구분은 없었다. 동주(東周), 서주(西周)는 단지 .. 2024. 11. 17.
한국전쟁 지원군 전쟁포로의 2/3가 타이완으로 가다.... 글: 조대부(趙大夫)​통계에 따르면, 지원군전쟁포로중 6,673명이 대륙으로 돌아가고, 14,334명이 타이완으로 갔으며, 그외에 12명은 인도로 갔다.​이들 전쟁포로들이 대륙으로 돌아온 후 여러가지 불공정대우를 받다가 나중에 명예회복된 것과 관련한 자료는 비교적 많으니 여기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그렇다면, 타이완으로 간 이들 14,000여명은 어떻게 지냈을까?​1. 대만으로 가는 과정​ 1954년 1월 20일, 새벽 9시, 14,00여명의 전쟁포로는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휘날리며, "대만으로 돌아간다"는 구호를 외치며, 한국의 판문점부근의 유엔군전쟁포로수용소를 떠난다. 손중산, 장개석의 대형사진을 든 대만대표단이 이들을 맞이하러 왔고, 전쟁포로들을 열렬히 환영했다.적지 않은 전쟁포로들은 속속 .. 2024. 11. 15.
대우전위(大禹傳位): 익(益)과 계(啓)의 왕위계승다툼 작자: 미상​대우(大禹)의 왕위승계에 대하여 기록에 따르면, 대우의 아들인 사계(姒啓)의 승계는 선양제(禪讓制)를 타파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 과연 어떤 권력투쟁이 있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대우가 사계에게 왕위를 승계시키는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대우의 후계자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일찌감치 죽어버린 고요(皋陶)외에 치수에 공이 있는 익(益)이 있었다. 사계와 익의 관계에 관하여는 3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익계읍양(益啓揖讓)"설.​ , 등 문헌이 대표적이다. 대우는 영명한 지도자라고 주장하면서, 계와 익은 모두 대현(大賢)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선양제가 폐지된 것은 대세의 흐름이고 사람이 이를 되돌릴 수 없었다고 한다.​맹자는 이렇게 말했다. 먼저 선양이 요순(堯舜)때는 합리적.. 2024. 11. 15.
잊혀진 전쟁: 청일전쟁의 육상전투(2) 글: 팽배신문(澎湃新聞)​1894년 봄, 조선에 대규모 농민반란이 일어난다. 조선왕조는 이를 진압할 힘이 없어, 중국주조선특사 원세개(袁世凱)의 적극적인 주장에 힘입어 조선왕조는 6월 3일 청정부에 구원병을 청한다. 6월 4일 광서제는 북양대신 이홍장에게 육군을 조선에 보내어 난을 평정하도록 하라고 지시한다. 청일전쟁의 육상전투의 역사는 여기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조선파병명령을 받은 후, 이홍장은 휘하의 야전부대에서 선발한다. 그가 선발한 부대를 보면, 주로 근대화정도가 높고, 군기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직예연군부대의 인원들이다. 그리고 직예제독 섭지초와 태원진총독 섭사성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한다. 그리고 윤선초상국에서 상선을 보내어 이들을 조선수도 한성의 남쪽에 있는 아산에 상륙시킨다. ​선두부대로.. 2024. 11. 12.
잊혀진 전쟁: 청일전쟁의 육상전투(1) 글: 팽배신문(澎湃新聞)​130년전에 발발한 청일전쟁은 근대중국의 운명에 중요하고 심원한 영향을 끼쳤다. 전쟁패배의 결말은 직접적으로 1840년이후 중국이 군사자강으로 국가자강을 추진한 양무모델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해주며, 새로운 자강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이는 이 오래된 전쟁이 군사자체를 뛰어넘는 역사적인 귀감의 의미를 지니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일전쟁에 대한 반성은 시간을 초월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끊임없는 과정에 맞추어 청일전쟁도 자주 새롭게 조명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에서 폭넓은 주목을 받고, 토론하고 기념하고 있다. 자주 현실의 이슈에 대하여 청일전쟁을 꺼내어 귀감으로 삼곤 한다. 그러나, 아주 특별한 점이라면 역사상의 청일전쟁은 실제로.. 2024. 11. 12.
19세기 첫 10년: 중국해적의 황금십년(黃金十年) 글: 최애역사(最愛歷史)​건륭제는 자칭 중국의 태평성세를 창조하고 이어갔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자신의 아들, 태청제국의 황위계승자 애신각라 옹염(顒琰)(즉 가경제)를 화약통 위에 올려놓았다.​화약통에 앉아 있게 된 가경제는 사고가 빈발하는 제국에 대하여 한 순간도 쉬지 못하고 심신이 지쳐갔다.​힘겹게 3년을 참고나서 마침내 거탐 화신(和珅)을 무너뜨린다;누가 알았겠는가, 사천,호북의 백련교(白蓮敎)의 난은 일촉즉발이 되어 청나라중기 최대의 내부전란이 된다.그동안, 자금성안에서는 기이한 암살사건이 발생하여,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다.나중에 또 한 무리의 천리교도(天理敎徒)가 태감의 내부호응하에 황궁으로 쳐들어와, '한당,송명에도 없었던 일'이 일어난다.​이뿐아니라, 제국의 변방 - 화남.. 2024. 1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