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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1291

황하(黃河) vs 이수(伊水): 대우치수(大禹治水)는 어느 강일까? 글: 지도제(地道帝) 비록 이미 4천여년이 흘렀지만, 고대 중화대지의 대홍수는 지금까지도 후손들 사이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대대손손 구술로 이어져 내려오면서 신화가 되었다. 황당무계한 신화적인 요소를 배제하면, 우(禹)가 홍수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공주(共主)"의 지위를 확립하게 된 것은 다툼없는 사실이다. 비록 하(夏)왕조의 창시자가 우인지 계(啓)인지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논쟁이 남아 있지만, 요순우(堯舜禹)가 번갈아가면서 우두머리가 되었던 선양제(禪讓制)에서 부사자계(父死子繼)의 방식으로 바뀐 것은 우와 계 부자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우의 권위는 치수에서 왔는데, 다만 그가 도대체 어느 강을 다스렸던가? 어떤 방식으로 다스렸던가? 이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정설이 없다. 우가 치.. 2023. 5. 24.
열국(夨國): 서북에 존재했던 수수께끼의 국가 글: 소연부독서(召燕不讀書) "보천지하(普天之下), 막비왕토(莫非王土), 솔토지빈(率土之濱), 막비왕신(莫非王臣)"(하늘 아래 왕의 땅이 아닌 것이 없고, 땅 위에 왕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다). 이는 역사학자들이 서주(西周)시대를 개괄한 말 중에서 가장 적절한 말이다. 그 의미는 주왕조의 통치범위내에 모든 사람은 주나라천자에게 고개를 숙이고 칭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치대로라면 일반적으로 다른 어느 사람도 '왕'이라고 스스로를 칭할 수 없다. 그러나, 실제 그랬을까? 섬서성(陝西省) 농현(隴縣)에는 서주의 도성에서 10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왕(夨王)"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진 동기(銅器)가 나왔다. 이는 사람들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그럼 서주시기에 감히 '왕'을 칭할 담량을 .. 2023. 5. 22.
대청의 흠차대신(欽差大臣)이 어린 버트란드 러셀(Bertrand Russell)을 만나다. 글: 왕정(王丁) 1877년 초여름의 어느 일요일 오후, 청나라의 주영공사관(駐英公使館)의 일행 4명이 러셀 공작의 집을 방문한다. 나중에 이 방문에 참가했던 사람중 3명이 기록을 남기는데, 각각 정부(正副) 흠차대신인 곽숭도(郭嵩燾),유석홍(劉錫鴻)과 통역관 장덕이(張德彛)이다. 어린 러셀이라 함은 바로 나중에 대철학가로 195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인 버트런드 러셀(1872-1970)이다. 그는 일찌기 2차례에 걸쳐 영국수상을 맡은 John Russell 공작의 둘째손자이다. 중문으로 번역된 외국사람의 이름이 기이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어린 버트런드 러셀을 만난 내용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같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하여 그 이야기를 알리고 근대대외교류과정에서 러셀과 중국의 인연에 대하여 하나의.. 2023. 5. 20.
발해(渤海)와 일본(日本)의 해상교류 글: 송정(宋靖) 발해국(698-926)은 '해동성국'으로 불리웠고, 나라는 200여년간 존속하면서, 동북아 여러 나라, 지역과 문화 및 경제교류를 진행했다. 발해국은 동북아에서 중요한 항구를 보유하고 있었고, 해상교통로를 통하여 발해국 남경(북한 함경남도 북청군의 청해토성(靑海土城))에서 출발하여 직접 신라로 가고, 다시 일본으로 갔다; 발해국 동경(지금의 길림성 훈춘시 팔련성. 일설에는 북한 부거리)에서 출발하여, 직접 일본으로 갔다. 대일항로는 비교적 안전했다. 발해국은 강역이 동해에 닿았고, 5개의 교통간선중 하나로서 일본도(日本道)는 발해의 제2대왕인 대무예(大武藝, 718-737)시기부터 개척되었다. 그때 일본은 신라와의 관계가 좋지 않아 일부러 발해와 '친인결원(親仁結援)'의 우호관계를 건립.. 2023. 5. 19.
왜 이전에는 장진호(長津湖)전투를 꺼내지 않았을까? 작자: 운(雲) 한국대통령 윤석열이 4월 27일 미국의회에서 연설하면서, 미국해병대가 1950년 장진호전투에서의 공헌을 찬양했다. 윤석열의 연설은 장진호전투를 다시 한번 조명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도 장진호전투에 관해서 몇가지를 얘기를 해보기로 한다. 첫째, 왜 이전에는 장진호전투를 꺼내지 않았을까? 10년전 대륙에서는 기본적으로 장진호전투를 꺼내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은 장진호전투를 몰랐다. 이건 무엇때문이었을까? 먼저 유백승(劉伯承) 원수가 장진호전투에 대하여 평가한 말을 들어보자: "하나의 병단(兵團, 3개軍)이 한개 사단을 포위해서, 거대한 댓가를 치른 후에도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적을 궤멸시키지도 못했다. 적은 편제를 갖추어 전투에서 철수했고, 모든 장비와 부상병까지 데려갔다." 유백승 원수.. 2023. 5. 18.
주은래(周恩來)와 유소기(劉少奇)의 암중각축(暗中角逐) 글: 고문겸(高文謙) 1966년 8월 5일, 모택동은 에서 이상하리만치 격렬한 어조로 직접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유소기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반동의 부르조아계급입장에 서서, 부르조아계급독재를 실행하여, 프롤레타리아계급의 거대한 문화대혁명운동을 탄압하고, 시비를 전도하고, 흑백을 혼동하며, 혁명파를 토벌하고, 다른 의견을 억누르며 백색공포를 실행하며 스스로 득의하며 부르조아계급의 위풍을 키우고,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뜻을 꺽었다. 어찌 그렇게 독하단 말인가?" 모택동은 글에서 1962년 조정시기의 소위 '우경'문제를 연결시켜, 기세등등하게 유소기와 최종대결을 벌이겠다는 자세를 취한다. 모택동의 이 글은 그후 전체회의에 인쇄되어 배부되어, 회의참석자들이 유소기를 공격하는 무기가 된다. 전체회의는 바로 .. 2023. 5. 18.
정화(鄭和)는 미주대륙을 발견했을까? 글: 범금민(范金民) 2002년 3월, 영국의 퇴역장교인 개빈 맨지스(Gavin Menzies)는 1421년 정화함대가 미주대륙을 발견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 견해가 나오자 석파천경(石破天驚, 천지가 찢어지는 듯한 굉읍에 사람들이 놀라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에 깜짝 놀라다라는 의미임)처럼 세계를 뒤흔들었다. 학계에서는 정화함대가 가장 멀리 어디까지 갔을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연구붐이 일어난다. 그해 10월, 맨지스는 미국에서 그의 저작 를 출판한다. 2003년 11월, 타이페이의 위안류(遠流)출판사업주식유한공사가 바오자칭(鮑家慶)이 번역한 중문본을 출판한다. 중문본의 겉표지에는 이런 광고문구가 붙어 있었다: "폭발적인 내용, 기존의 인식을 뒤집다. 역사를 고쳐쓸 수 있는 놀아운 작품 과거의 역사교과.. 2023. 5. 17.
"일기토": 전쟁에서 장수들간의 1대1 싸움이 실제로 존재했을까? 글: 역사학당군(歷史學堂君) 예전에 를 읽으면, 가장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무장들간의 전투장면이다. "누가 감히 나와 삼백회합을 겨뤄보겠느나?"라는 말은 그때 입에 달고 다니던 말이다. 동시에 소설에서 장수들끼리의 일대일 싸움으로 승패를 결정짓던 방식은 필자의 고대전쟁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이 되어버렸다. 자라면서, 자연히 그게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장수의 용맹이 비록 쓸모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큰 작용을 하지는 못한다. 명장들 예를 들어 한신(韓信), 위청(衛靑), 곽거병(霍去病)같은 사람들은 개세적인 무공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소설에 나오는 진을 친 다음 진앞에서 무장들이 싸우던 것이 완전히 허구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사기를 고무시키는 각도에서 보자면 그 역사적 원.. 2023. 5. 15.
<조씨고아(趙氏孤兒)>이야기에 대한 고증과 역사복원 글: 사량소(史良昭) 는 경극(京劇)에서는 라고 부른다(고아를 찾아서 고아를 구한다는 의미임). 이 명칭은 일목요연하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보에 쌓인 사내아이가 아니라, 조씨와 아무런 현련관계도 없지만, 전력을 다해서 '고아를 구해준' 정영(程嬰)과 공손저구(公孫杵臼)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자신의 인생신조를 지키기 위하여, 한 사람은 사생취의(捨生取義, 목숨을 버려 올바른 일을 행하다)하고 한명은 인욕부중(忍辱負重, 치욕을 참고 견디다)했다. 어려운 줄 알면서도 기꺼이 나아갔고, 의로운 일을 하기 위해 용감히 나섰으며, 죽음을 전혀 겁내지 않았고, 고난이 닥쳐도 포기하지 않았다. 인간의 본성중에서 집착 이외의 모든 약점을 버렸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하여 결론을 내렸다.. 2023. 5. 14.
천자(天子)와 황제(皇帝): 중국고대왕권의 이중성 글: 와타나베 신이치로(渡邊信一郞) 모두 알다시피, 중국고대의 왕권은 천자와 황제라는 두 개의 칭호가 있다. 니시지마 사다오(西嶋定生)씨는 이 두 개의 칭호구별에서 출발하여 연구를 계속한 후, 처음으로 천자와 황제로 구성된 왕권의 이중성을 주제로 하여, 황제권력의 기능분화를 보여주었다. 니시지마씨는 황제육새(皇帝六璽)제도를 고찰한 후, 그중 천자삼새(天子三璽)와 황제삼새(皇帝三璽)의 구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천자삼새는 만이(蠻夷, 외국)과 제사에 사용되었고, 황제삼새는 국내정치에 사용되었다; 나아가 한나라때의 즉위의식에서도 천자즉위-황제즉위의 두 단계로 구성되었다는 점을 밝힌다. 그후, 오가타 이사무(尾形勇)씨는 즉위의식에 관하여 고찰하고, 가네코 슈이치(金子修一)씨는 옥새제도,즉위의식에 관한 .. 2023. 5.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