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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청나라 궁정의 서양의사

by 중은우시 2024. 12. 25.

글: 관설령(關雪玲)

청나라 황제의 의료집단은 다원화된 팀이 있었다. 중견역량인 태의원(太醫院)의 의관(醫官)외에 서양의사도 중요한 일원이었다. 청나라 중기 서양의사들이 청나라궁중에 재직하면서 의료활동을 진행했다. 먼저 황실에서 일하면서 황제의 신체건강을 책임졌다. 나중에는 황제의 지시에 따라 다른 사람들의 질병치료를 위해 파견되기도 했다.

서양의사가 강희제의 병을 치료하다

서양인의사가 황제를 치료한 저명한 사례는 두 개가 있다. 각각 강희32년(1693년)과 강희47년(1708년) 강희제가 학질(虐疾)과 심계증(心悸症, 가슴이 두근거리는 증세를 가리킴)을 치료한 것이다.

강희32년 강희제의 신체상황에 관하여 강희제 자신이 쓴 바를 보면, "짐은 정월 초팔일부터 한병(汗病, 땀이 나는 병)이 시작되고, 십삼일부터 학질이 시작되어 하루 건너 한번씩 아주 심해졌다, 이십칠일 학질이 나았다."

강희제가 학질에 걸린 후, 태의원의 어의(御醫) 손휘백(孫徽百), 손사백(孫斯百)등이 치료하는 동시에, 포르투갈인 이시도로 루치(Isidoro Lucci S. J. 1661-1719, 중국명 盧依道)도 진단과 치료에 참여한다. 이시도로 루치가 입궁하였을 때는 강희제의 병세가 비교적 심할 때였다. 그는 강희제를 진맥한 후, 맥이 어지럽지만 잠시 생명의 위험은 없겠다고 말한다. 강희제는 궁에 보관하고 있던 그리말디(Claudio Filippo Grimaldi, 중국명 閔明我)와 플로렌스대공이 보내준 약품을 이시도로 루치에게 보여주면서, 그에게 어느 약이 학질을 치료하는데 쓸 수 있겠는지 물어본다. 그러나 이시도로 루치가 살펴보니 이들 약의 효능은 체력과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었고, 학질을 치료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며칠 후, 병세가 좋아지지 않은 강희제는 희망을 품고 다시 한번 플로렌스대공의 약품중에 특효약이 있는지 물어본다. 그러나 이시도로 루치는 사실대로 없다고 대답한다. 그 답변에 강희제는 불쾌해 했고, 이시도로 루치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게 된다. 얼마 후, 이시도로 루치는 강희제에게 보고한다. 금계납상(金鷄納霜, 퀴닌 quinine)이라면 학질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북경에는 그 약이 현재 없는데, 마카오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병이 위독할 때, 강희제는 프랑스인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 (Jean-Francois Gerbillon, 張誠), 조아킴 부베(Joachim Bouvet, 白晋)가 가져온 프랑스 약가루가 생각났다. 그러나 어의들은 복용하면 안된다고 생각하여 다른 치료법을 취하나 결과적으로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 강희제는 시간을 끌다가는 큰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우려하여,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약가루 반제(半劑)를 먹는다. 그러자 체온이 약간 내려갔다. 그후 며칠동안 아마도 그가 먹은 복용량이 부족했던지, 한열(寒熱)은 내려갔으나 여전히 여사(餘邪)가 남아 있었고, 며칠 후에는 다시 발병한다. 그리하여 조정의 상하가 모두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외성에서 북경으로 들어온 프랑스선교사 홍약한(P. Joames Fontaney, 洪若翰) 포르투갈 선교사 유응(劉應, Mgr Claudusde Visdel ou)이 인도항구도시 Pondicherry에서 부쳐온 금계납상 1근을 가지고 있었고, 두 사람은 그 약을 건륭제에게 바친다.

지난번에 프랑스 약가루를 먹을 때와 마찬가지로 황제가 금계납상을 복용해야할지를 두고 조정에서 논쟁이 벌어진다. 결국 조정대신들은 의견일치를 본다. 어의가 약제를 만든 후에 먼저 마셔보는 규정에 따라, 민간에서 몇몇 환자를 찾고 또한 소어투(索額圖), 밍주(明珠)등 4명의 중신들이 차례로 먼저 약을 먹어본다. 그 결과 환자는 병이 완전히 나았고, 병이 없던 사람은 평안무사했으며, 아무런 부작용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아무런 망설임없이 금계납상을 먹는다. 그날 오후 한열증세가 사라진다. 그후 며칠동안 강희제는 계속하여 약을 먹었고, 얼마 후 완전히 낫는다.

강희47년 십일월, 십팔아거(十八阿哥) 윤개(胤祄)의 죽음과 황태자 폐위라는 두 가지 의외의 사건을 겪고나서, 강희제는 심신소모가 너무 심해지고 신체가 허약해져서 심장이 빠르게 뛰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태의원의 의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유럽인에게 도움을 구하게 된다. 그들은 프랑스인 나덕선(羅德先, Bernard Rohdes)이 의학에 정통하다는 말을 들어 그라면 아마 황제의 병세를 호전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나덕선은 약으로 강희제의 병세를 안정시켰을 뿐아니라, 포도주로 후속보조치료를 했다. 이때부터, 강희제는 포도주를 즐기게 되고, 포도주를 보약처럼 마시게 된다. 강희48년, 49년 사이에 각지의 서양인들에게 포도주를 바치도록 지시했고, 그리하여 포도주를 바치는 붐이 일어난다.

그외에 나선덕은 강희제의 윗입술의 종기도 치료했다. 1715년 육월말부터 칠월 이십오일 사이에 열하(熱河)에 머무르던 강희제의 윗입술에 종기가 생겨난다. 황제는 나선덕에게 치료를 명했고, 나선덕은 원만하게 임무를 완수한다. 이탈리아인 마국현(馬國賢, Matteo Ripa, 1682-1746)은 나선덕이 고약을 만들어 강희제의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한 사실을 글로 남겼다. 여러 차례 서양의사의 실력을 직접 경험한 강희제는 나선덕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고, 강희제는 또한 그가 관심을 가진 몇몇의 치료를 그에게 부탁하기도 했다. 중국의사들이 그들의 병을 치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선덕은 그들의 건강을 회복하게 만들어 황제를 기쁘게 했다.

황자, 관리들의 병을 치료한 서양의사들

서양의사들의 치료대상은 황제에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황자의 병도 치료해주었다. 강희제때 그런 사례가 아주 많다.

강희31년(1692년), 나이어린 황구자 윤당(胤禟)(당시 나이 9살)이 귓부분에 감염증으로 농종(膿腫)이 귀옆으로까지 커졌다. 그리하여 고열로 혼미상태에 빠지고, 병세가 위중했다. 외과의사인 장 밥티스탄 리마가 성공적으로 윤당을 구해준다.

처음에 리마는 붉게 달군 철기로 농종을 째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나이어린 윤당은 그런 치료를 받을 담량이 없어서 치료방안은 잠시 보류된다. 나중에 병세가 악화되고, 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좋은 치료방법을 내놓지 못하자, 윤당은 부득이 리마의 수술을 받게 된다. 수술때 이탈리아인 이소도로 루치가 옆에서 도운다. 수술한 날 밤에 윤당이 혼미상태에 빠지다 두 의사는 긴급히 궁중으로 불려들어온다. 이소도로 루치는 진맥후에 윤당에게 별 일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얼마 후 윤당은 완전히 낫는다.

서양의사는 황제, 황자외에 조정관리들에 대한 치료도 진행했다. 예를 들어, 강희42년(1703년) 십월, 옹우특부(翁牛特部)의 왕 반디(班第)가 미골 아래에 종기가 난다. 병세가 심각하여, 강희제가 나덕선에게 잘 치료해줄 것을 당부한다.나덕선은 처음에 매일 고약을 여러번 붙였으나, 며칠이 지나도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니 상처안에 약심지가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후 10일 정도가 지나서 완전히 치유된다.

청나라때 궁중에 서양의사수량이 가장 많았던 때는 강희제시절이다. 서양의사에 대하여, 강희제는 적극적으로 치료를 부탁했다. 옹정제는 강희제와 달리 서양의사에 대해 무시했다. 건륭제는 서양의사에 대해 별 상관이 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오는 사람은 막지 않고, 가는 사람은 붙잡지 않는다.

강희,옹정,건륭이후, 서양의사는 청나라궁중에서 사라진다. 청나라말기, 서양의학붐이 중국을 석권하면서 광서제때 다시 서양의사들이 청나라궁중에 모습을 보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