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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1291

경신지변(庚申之變): 1860년의 영불연합군(하) 글: 구양철생(歐陽哲生) 외교조약의 체결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의식이다. 청나라의 전통적인 관례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외국인과 북경에서 담판하고 직접 조약을 체결하지 않는다. 제2차아편전쟁을 종결시키는 은 청나라가 처음 북경에서 서양인과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 관례를 깬 것이다. 청나라조정에 있어서 실로 영불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서 압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역대이래로 체결된 조약의 내용을 주목했고, 조약체결현장의 내외에 대하여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기실 북경에서 조약을 체결한 것은 그 자체가 연구해볼만한 중요한 이슈이다. 영국군은 원명원을 불태운 후, 공친왕에게 보낸 서신에서 그들은 이 조치의 의도를 표명하고, "30만은냥을 피해자가족에게 배상할 것을 요구한다. .. 2023. 6. 25.
경신지변(庚申之變): 1860년 북경의 영불연합군(상) 글: 구양철생(歐陽哲生) 1860년의 "경신지변"은 근대중국이 급전직하하는 역사적 전환점이다. 또한 청나라 통치집단이 진정으로 깨닫고, 자구자강을 도모한 시작점이다. 이 해에 영불연합군은 원명원(圓明園)을 불태우고, 안정문(安定門)을 점령했다. 청나라조정은 어쩔 수 없이 영불연합군과 을 체결하게 된다. 만일 제2차아편전쟁이 끝났을 때 을 체결한다. 그것은 단지 아편전쟁의 재판이었다. 나중에 다시 곡절이 생겨 제2차아편전쟁은 새로운 업그레이드버전, 확대버전으로 상승하게 되고, 전쟁은 쌍방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역사의 조류는 열려진 갑문처럼 더 이상 청나라통치자의 의지대로 흐르지 않았다. 중국은 영불연합군의 무력공세에 밀려 자본주의세계의 식민체계로 한걸음 더 빠져들게 된다. 제2차아편전쟁은 중국.. 2023. 6. 25.
남제(南齊): 23년간 존속했으나, 자손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 글: 역사유비유희(歷史有悲有喜) 제고제(齊高帝) 소도성(蕭道成)이 임종하기 전에, 황위를 이어받을 장남 소색(蕭賾)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만일 유송(劉宋, 남조의 첫번째 왕조를 가리킴)이 골욕상잔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일족이 기회를 잡아 황위를 빼앗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깊이 새겨서 경계로 삼아야 한다!" 소도성은 그가 유송에게서 황위를 찬탈하여 남제를 세울 수 있었떤 것은 유송황실이 내분으로 서로를 죽이는 바람에 그가 기회를 잡을 수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전에, 남조송의 유씨종친은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 송효무제(宋孝武帝) 유준(劉駿)이 거병하여 황위를 빼앗은 후, 황제위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종실을 대거 살육하는 서막을 연다. 유준의 동생인 상동왕(湘東王).. 2023. 6. 19.
원나라때 이슬람과의 천문학 교류와 접촉 글: 강효원(江曉原) 징기스칸이 남정북전(南征北戰)하면서, 유라시아대륙을 가로지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의 뒤에는 중국을 차지한 원(元)과 유럽, 아시아의 여러 칸국이 병립하고 있었다. 원나라는 명목상 종주국이고, 각국간의 문화와 교류가 아주 활발했다. 이 시기의 중국천문학과 이슬람천문학간의 접촉에 관하여 국내외의 학자들이 모두 기술한 바 있다. 전체적으로 사람들에게 주는 인상은 이런 접촉이 존재한 것은 확실하지만, 적지 않은 구체적인 이슈는 아직 명확한 단서나 결론이 없다. 본문에서는 대체로 연대순서에 따라, 비교적 중요한 6가지 이슈에 대하여 간략하게 기술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이 시기의 중국과 이슬람천문학간의 교류와 접촉에 대하여 더욱 전면적이고 분명한 인식을 얻고자 한다. 1. 야율초재(耶律楚.. 2023. 6. 18.
"관도대전(官渡大戰)"에 대한 의문점 글: 이경서(李慶西) 에는 관도대전을 쓰면서, 관우(關羽)가 조조(曹操)의 백마(白馬)에서의 포위당한 상황을 풀어준 것부터 시작한다. 그 일은 제25회 후반부에 쓰여 있다. 원소(袁紹)는 대장 안량(顔良)을 보내 여양(黎陽)에서 황하를 건너게 했고, 안량은 황하남안의 백마에서 유연(劉延)을 증원하러 가던 조조의 군대와 부닥친다. 안량은 송헌(宋憲), 위속(魏續) 두 장수를 연이어 참하고, 무예가 뛰어난 서황(徐晃)마저 물리친다. 그리하여 조조군영의 여러 장수들은 전율하게 된다. 이때 정욱(程昱)이 나서서 추천하여 관우가 출전한다. 책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조조가 산 아래 안량이 배치한 진세를 가리키며, 기치가 선명하고 칼과 창이 빽빽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엄정하고 위엄이 있어, 관우에게 말하기를, .. 2023. 6. 18.
금나라초기의 비여진인 맹안모극(猛安謀克) 글: 정니나(程尼娜) 맹안모극제도는 금나라 여진족의 아주 중요한 제도이다. 최소한 4가지 내용이 포함된다: 첫째, 지방하층행정조직이다; 둘째, 군사조직이다; 셋째, 군,정관리이다; 넷째, 세습작위이다. 앞의 3가지항목은 동시에 건립되었고, 마지막 1가지 항목은 약간 늦게 확립된다. 여기에서는 주로 지방행정조직으로서의 맹안모극제도가 비여진인지구에서 추진된 것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한다. 1114년, 여진인 완안아골타가 거병하여 요나라에 반기를 든다. 십월, 생여진(生女眞) 삼백호(三百戶)를 모극(謀克)이라 하고, 10개의 모극을 합하여 맹안(猛安)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여진사회 최초의 하층행정조직을 만들었다. 그것은 정치, 군사, 생산의 여러 직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관(長官)은 세습제였다. 금태조 아골타.. 2023. 6. 15.
우주대장군(宇宙大將軍) 후경(侯景)의 황제몽(皇帝夢) 글: 진량(陳良) 남북조시기는 중국이 남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남조(南朝)는 차례로 송(宋), 제(齊), 양(梁), 진(陳)으로 이어지고, 북조(北朝)는 차례로 북위(北魏), 동위(東魏)와 서위(西魏),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이다. 이 시기는 이전의 동진(東晋),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을 포함하여, 왕조교체가 아주 빈번했고, 적지 않은 강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힘만 있으면 제왕이 될 수 있었다. 이는 바로 "성두변환대왕기(城頭變幻大王旗)", "강산대유황제출(江山代有皇帝出), 각령풍소약간년(各領風騷若干年)"이었다. 진승(陳勝)이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느냐"고 말한 것처럼 특히 난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황제몽을 꿈꾸었던가? 후경(侯景)이라는 사람은 그런 꿈을 꾸었을 뿐아니라 며칠간 황제를 지내기.. 2023. 6. 13.
1271년의 천주(泉州): 한 이탈리아상인의 견문록 글: Jacob D'Ancona (아래 글은 그가 1271년 남송의 천주를 방문하고 쓴 의 내용임) 하나님의 보우하에 우리는 중국(Sinim)의 영토에 이르러, 자동성(刺桐城)에 도착했다. 이 지역은 현지사람들은 "천주(泉州)"라고 불렀고, 남다른 도시였다. 아주 큰 규모의 무역이 이루어지며, 만자국(蠻子國, 즉 남송을 가리킴)의 주요무역도시중 하나였다. 나는 나의 하인들과 배에 후추, 알로에, 단향목(檀香木), 장뇌(樟腦), 정선한 향수, 진귀한 옥석주보, 대추야자(海棗), 옷감등의 화물을 가득 싣고와서 상륙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 해는 양(羊)의 해였다. 왜냐하면 만자인(蠻子人, 남송인)들이 그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도에 대하여 동물의 명칭을 부여해서 불렀다. 용의 해, 소의 해, 뱀의.. 2023. 6. 12.
서하(西夏)의 자칭국명 "방니정(邦泥定)" 및 "백상국(白上國)"은 어떤 의미였을까? 글: 오천지(吳天墀) 서하정권의 건립자인 척발원호(拓拔元昊)는 일찌기 북송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자신의 나라를 "방니정(邦泥定)"이라 칭한 바 있다. 그 내용은 권485 에 나온다. 그리고 서하는 스스로 "백상국(白上國)"이라 칭했고, 실물증거도 있다. 예를 들면, 감숙성 무위현문화관에 보존된 에는 음각으로 한문을 새겼는데, 첫행의 표제가 "백상호국사양주감응탑지비문(白上護國寺感應塔之碑文)"이라고 되어 있다든지, 1975년 9월 영하박물관은 은천시 서하란산 동록의 서하제릉구에서 2호릉(하인종의 능)의 동서비정(碑亭)을 정리했는데, 이미 부서진 서하문(西夏文) 전체비액(篆體碑額)의 위에 서하문전체와 병합해서 번역된 한문(漢文)은 바로 "대백상국호성성덕지의황제수릉지문(大白上國護城聖德至懿皇帝壽陵誌文)"이라는 .. 2023. 6. 8.
진(秦)나라의 조상은 동이족(東夷族)인가? 글: 장회통(張懷通), 권필성(權弼成) 진나라 조상의 기원을 탐색하게 된 계기 진인(秦人)의 기원(起源)에 관한 기록이 가장 먼저 나타난 것은 이다. 에는 주효왕(周孝王)의 말이 기록되어 있는데, "짐은 그들에게 영토를 내주어 부용국으로 삼고 진(秦)의 땅에 살게하여 영씨(嬴氏)의 제사를 잇게 한다. 그리하여 '진영(秦嬴)'이라 한다." 이는 늦어도 서주시기에, 혈연관계와 지연단위를 핵심요소로 하는 '영진(嬴秦)'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이들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말하는 '진인(秦人)'이다. 진나라 초기역사연대는 서주에서 춘추초기까지이다. 즉 기원전677년 진덕공(秦德公)이 옹(雍)에 거하기 이전이다. 사학계에서 진나라초기역사에 대한 연구는 주로 문헌자료상 진선공(秦先公)의 소재지역, 이주등 활.. 2023. 5.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