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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아편전쟁: 군사상의 무능, 도덕상의 무치

by 중은우시 2024. 12. 23.

글: 최애역사(最愛歷史)

한쪽은 강경한 태도의 청나라 흠차대신(欽差大臣)이고, 다른 한쪽은 절대로 타협이 없는 영국의 주중상무감독이다. 이들은 "교흉(交凶, 흉수를 내놓는 것)"과 "구결(具結, 책임을 인정하는 서면)"문제를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는 1839년 중국-영국관계의 주요 내용이다.

찰스 엘리엇(Charles Elliot, 1801-1875)의 고집을 임칙서(林則徐)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광동순무(廣東巡撫)와 이 일에 대해 언급할 때, 임칙서는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의혹을 얘기한다: "엘리엇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더라도 출로가 없는데, 왜 마음을 돌리지 않는 것일까?" 임칙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영이(英夷)"두목은 왜 이 두 가지 '천경지의(天經地義)'한 일에 대하여 이처럼 '명완불령(冥頑不靈)'하는 것일까?

북경과 런던에서 도광제(道光帝)와 영국외상 파머스턴경(Lord Palmerston, Heny John Temple, 1784-1865, 중국명 巴麥尊)도 마찬가지로 광동사태의 진전을 주목하고 있었다.

이전에 임칙서의 호문소연(虎門銷煙)과 엘리엇이 마카오에서 철수하고 주강구(珠江區)에서 무장충돌한 사건을 "첩보(捷報)"로 황제에게 보고되었다. 도광제는 보고를 받은 후, "영이"에 대해 천조상국식으로 경멸하고 무시했다.

런던에서는 "철두노서(鐵頭老鼠)"라고 불리던 아편판매업자 윌리엄 자딘(William Jardine, 1784-1843, 중국명 威廉 渣甸)은 청나라조정의 아편무역금지에 불만을 품고, 미리 영국으로 돌아가 동방사회의 '폭행'과 '불공정'을 얘기하면서, 정부로 하여금 대중전쟁을 일으키도록 유세하고 다녔다. 그러나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그리하여 자딘은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였다: "그들은 멍청하기 그지없다. 중국인의 우리에 대한 모욕, 폭행과 불법무역을 하나로 묶어서 얘기하면서 마치 그런 일이 없다는 듯이, 수치가 아니라고 여기고, 이미 소훼(銷毁)된 아편에 대한 배상을 거절했다." 엘리엇이 직접 많은 영국인들이 해상에 갇혀 있다는 보고를 한 후에, 파머스턴경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된다. 멀리 이국타향에 있는 엘리엇에게 도움을 제공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전선의 소식이 사실과 다르게 보고되면서, 후방에 있던 영국, 중국의 의사결정권자들은 더욱 급진적이고 호전적이 된다.

1840년 4월, 영국 하원은 대중전쟁개시건을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일부 토리당의 의원들은 도덕적인 관점에서 이번 '부도덕한' 전쟁을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찌기 중국에 오래 거주했고, '중국통'으로 알려진 조지 토마스 스타운턴(Sir George Thomas Staunton, 1781-1859, 중국명 小斯當東)과 주강구충돌에서 한쪽 귀를 잃은 해군 마오스(茂斯)가 나타나서 얘기하자, 영국의 여론이 바뀌게 된다.

결과 하원에서 271 대 262표로 주전파가 승리하고, 전쟁은 일촉즉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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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이전에, 청나라와 영국간의 연락은 단순히 상업에 국한되었다. 이전에는 비록 매카트니(George McCartney, 1737-1806, 중국명 馬戞爾尼), 애머스트(William Pitt Ahmerst, 중국명 阿美士德, 1773-1857), 네이피어경(Lord Napier, William Napier, 중국명 律勞卑, 1786-1834)등이 전후로 이런 관계를 정치외교분야까지 확장하고자 노력했지만 콧대높던 대청황제는 시종 서양인과의 평등한 교류를 원치 않았다. 그리하여 수교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난다. 더욱 심한 것은 네이피어경이 이로 인해 분함을 참지 못하고 마카오에서 객사한 것이다.

군사는 정치의 연속이자 보장이다. 대중전쟁이 결정된 후, 영국은 조지 엘리엇(George Elliot, 1784-1863, 중국명 懿律)을 전권대표 겸 원정군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파머스턴경이 중국재상에게 보내는 서신>을 휴대하고 중국으로 떠난다. 무력으로 청나라조정이 이전에 했던 불쾌했던 일을 책임지게 하고, 배상하하게 하고, 영토할양받고, 수교하며, 항구를 개방하도록 압박하여, 정치적인 관계를 건립하고자 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영국군은 최대한 청나라의 권력중심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일찌기 사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영국이 임칙서의 전쟁대비를 꺼려서, 분쟁이 발생한 광주(廣州)를 공격하는 것을 포기했다고 알려졌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북경에서 수천리 떨어진 광주에서보다 경기(京畿)지구의 해상문호인 천진이야말로 중국조정을 압박하기에 최선의 무대였던 것이다.

1840년 6월, 인도와 영국본토등지에서 온 2개의 영국함대가 차례로 주강구에 도착한다. 해군사령관 고든 브레머(Gordon Bremer, 1786-1850 중국명 伯麥)는 함대를 이끌고 북상한다. 1주일후 조지 엘리엇의 함대가 뒤늦게 도착했고, 일부 선박을 남겨 주강구를 봉쇄한 후, 주력은 모두 북상하여 브레머를 쫓아간다.

하문(廈門)의 외해를 지날 때, 조지 엘리엇은 사람을 보내어 상륙하게 한 후 <파머스턴경이 중국재상에게 보내는 서신>을 전달하고, 현지관리로 하여금 청나라조정에 보내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청나라조정은 일찌감치 서양인을 대신하여 문서를 전달하는 것을 금지하는 훈령을 내린 바 있다. 하문동지(廈門同知) 채관룡(蔡觀龍)은 수령을 거부하였을 뿐아니라, 화살을 쏘아 영국인의 상륙을 저지한다. 영국군함 브랜디(布郞底)호는 대포를 발사하여 하문을 공격한다. 7월 3일의 이 포격전은 생각지도 않게 영국군이 북상하면서 벌인 최초의 전투가 된다.

하문연해의 포대는 모조리 파괴되고, 영국군은 승리한 후 떠나간다. 그러나 어찌 알았으랴. 당시 민절총독(閩浙總督)으로 있던 등정정(鄧廷楨)은 이 패전을 승전으로 포장하여 보고한다. 도광제는 보고를 받은 후 특별히 주비(朱批)로 "잘했다(所辦好)"는 세 글자를 남긴다.

산은 높고 황제는 멀리 있다. 전선과 자금성의 긴 거리는 거짓말도 통하게 만들었고, 관리들은 죽어라 사실을 날조하여 거짓을 보고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의 전투과정을 보면, 이런 '분식'수법은 약속이나 한 듯이 각지방 관리들이 모두 사용한다. 반복하여 자신과 관련된 패전을 가리고, 황제가 그들의 노력을 믿고 벌을 내리지 않도록 시도했다.

하문전투이후 삼일째 되는 날(7월 5일), 영국의 선봉부대가 정해(定海, 지금의 절강성 주산)에 도착한다. 정해총병(定海總兵), 장조발(張朝發)과 지현(知縣) 요회상(姚懷祥)은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영국군의 의도를 알아보려 한다. 브레머는 군대의 위세를 보이며 두 사람에게 투항을 권유한다. 그러나 요회상은 엄중하게 거절한다: "그렇다. 너는 강대하고 우리는 약소하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싸울 것이다!" 그후 쌍방은 전쟁상태에 진입한다.

그러나, 정해전투는 양군간의 거대한 전력차이를 확인시켜주었다. 개전당일, 영국은 단지 5척의 전함과 일부 육군만으로 약 2,600명에 이르는 청나라 수비부대를 궤멸시킨다. 장조발과 요회상은 모두 전사한다. 영국군이 정해를 점령한 후 설치된 포대를 보고 깜짝 놀란다. 화포에는 "Richard Philip 1601"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240년이상이 된 골동품이라는 것을 알고 영국군은 깜짝 놀라면서도 비웃었다.

정해를 점령한 후, 조지 엘리엇등은 또 다시 서신전달을 시도한다. 진해(鎭海, 지금의 영파시 진해구)에 주둔하고 있던 절강순무(浙江巡撫) 오이공액(烏爾恭額)에게 <파머스턴경이 중국재상에게 보내는 서신>을 보낸다. 그러나 오이공액도 법령을 어길 수 없어 사람을 시켜 원본 그대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이 일을 조정에 보고한다. 그런 모습을 보자, 영국군은 더 이상 하문에서처럼 시간과 탄약을 낭비하지 않고, 소수의 군대를 남겨 정해에 주둔시킨 후, 계속 북상한다. 그리고 그해 8월 11일 천진(天津) 백하구(白河口)에 도착한다.

당시 천진의 최고지방관리는 직예총독(直隸總督) 기선(琦善)이었다.

영국군이 도달하기 전에, 도광제는 임칙서가 6월말보낸 영국군북상에 관한 보고를 받는다. 다만 그는 상대방이 이렇게 신속히 진군할 줄은 몰랐다. 위험한 기색을 느낀 황제는 기선에게 지시한다. 만일 영국군의 태도가 공손하면 "천조의 제도를 알려주고, 광동에서 호시(互市)를 계속하도록 하라"고 한다. 잘 달래서 돌려보내라는 것이다. 만일 기세등등하고 말을 듣지 않으면, 군대를 동원해서 토벌하라고 했다. 황제의 영이에 대한 태도는 약간 완화되는 동시에 일찌감치 오이공액으로부터 영국군이 국서를 전달하고 싶어한다는 것이 흥미를 느낀다. 그리하여 기선에게 이렇게 명령한다: "만일 서신을 전하려고 하면, 그것이 오랑캐문자이건 한자이건 가리지 말고 즉시 보내도록 하라." 그는 도대체 영국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한문으로 번역된 <파머스턴경이 중국재상에게 보내는 서신>이 황제에게 올라왔을 때, 도광제는 첫부분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관리들이 본국에서 중국에 주재하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해를 입히며, 해당관리는 대영제국의 위엄을 모독했으므로, 대영의 국왕은 수륙군대를 중국해역으로 보내어, 황제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아마도 번역인원이 용어가 부당하여 죄를 받을까봐, 번역할 때 내용을 바꾸어버려서 도광제에 대한 공손한 내용을 추가했다. 한문번역본 <파머스턴경이 중국재상에게 보내는 서신>과 영문원본을 비교하면, 태도와 기세에서 차이가 아주 크다.

도광제는 서신을 읽어본 후, 이들 영국인들은 그저 광동에서 임칙서에게 화가 나서, 북경으로 와서 나에게 호소하려는 것이구나라고 여긴다. 그는 심지어 단순하게 이렇게 생각했다. 영국인들 앞에서 임칙서를 처벌하기만 하면, 이전의 모든 분쟁과 불쾌했던 일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9월 17일, 황제는 기선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광동으로 가서 사건을 조사하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기선으로 하여금 영국인에게 "총사령관 조지 엘리엇등은 모두 남으로 돌아가서, 처분을 기다리면 된다"고 알린다.

도광제의 허락을 받고, 흠차대신 기선과 접촉한 후, 조지 엘리엇등은 북방의 항구가 겨울에 얼어버릴 것을 우려하여 광동으로 돌아가 협상하는데 동의한다.

이번 북상으로 영국은 출병목적을 잠정적으로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포함외교'의 도움으로 성공적으로 이전에 전달하는데 실패했던 국서를 청나라황제에게 보내는데 성공했으니, 결국 양국정부간의 연결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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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선과 엘리엇은 각각 육로와 해로로 남하한다. 1840년 11월하순, 쌍방은 거의 동시에 광동에 도착한다. 그 달, 조지 엘리엇은 병으로 귀국하고, 찰스 엘리엇이 그의 직책과 업무를 넘겨받는다.

12월 3일의 광주담판에서, 찰스 엘리엇은 <파머스턴경이 중국재상에게 보내는 서신>에 근거하여 5가지 요구사항을 내놓는다: 아편손실을 배상하라; 관리간에 평등하게 교류한다; 도서를 할양한다; 상업손실을 배상한다; 군비를 배상한다. 실제로 파머스턴이 사전에 준비한 조항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모조리 내놓으면 기선이 놀라서 도망칠 것같아서, 찰스 엘리엇은 처음부터 모든 조건을 내놓지 않았다. 그러나, 단지 5개조항뿐이었지만, 여전히 기선이 받은 지시와는 차이가 너무 컸다. 도광제가 동의한 것은 기껏해야 임칙서를 처벌하고 광주통상을 재개하는 선(임칙서는 이전에 찰스 엘리엇을 압박하기 위해 양국무역을 중단시킨 바 있다)의 두 가지뿐이었다.

도광제의 목표는 "협상으로 해결하되, 양보는 없다"는 것이었다. 이는 기선이 황제가 원하는 틀의 범위내에서 영국인과 평화협상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광제는 전선에서 수천리 떨어진 자금성에 있고, 수시로 전선에 있는 기선이 느끼는 점을 알 수가 없다. 하물며, 도광제는 많은 정도로 기선을 최종결정권이 없는 그저 전달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기선이 찰스 엘리엇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마찬가지의 문제와 무력함을 느낀다. 외무대신 파머스턴의 협상에 대한 요구조건이 너무 많아서, 그가 타협할 여지가 너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회담에서 기선과 찰스 엘리엇은 약속이나 한 듯이 하나의 '컨센서스'를 이루게 된다. 협상은 그저 북경과 런단 사이의 '불합리'한 구속을 타파하기만 하면 합의에 이를 수 있다. 그리하여, 두 명의 담판대표는 도광제와 파머스턴이 보낸 지시를 일단 내버려두고, 각각 주장을 제기하면서 협상테이블에서의 상황에 따라 처리하기로 한다.

다만, 쌍방의 의견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주장과 반박이 계속된다. 기선과 찰스 엘리엇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인내심만 충분하면, 상대방이 조만간 내가 내놓은 조건에 응할 것이다." 그리하여 쌍방은 다시 각각의 조항에 대하여 하나하나 협상을 개시한다.

아편손실배상에 관하여, 기심은 도광제가 '구두쇠'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북경에서 배상금을 내놓을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그러나, 찰스 엘리엇은 이득을 얻지 못하게 되면 다시 전쟁을 일으키려 할 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나중에 배상금은 600만원으로 정하고, 기선은 광주공행(廣州公行)의 행상(行商)들로부터 이 금액을 모아서 지급할 생각이었다.

도서할양은 모든 협상조건중 가장 양보하기 어려운 항목이었다. 기선은 청나라의 정치적 한계선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찰스 엘리엇에게 이렇게 말한다. 영토할양은 "천조에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그건 절대 안된다." 그러나 기선도 몇개의 통상항구를 추가로 여는 것을 교환조건으로 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하였고, 이 점은 찰스 엘리엇도 동의했다.

담판결과는 어쨌든 황제에게 보고하여 비준을 받아야 한다. 기선은 조심스럽게 담판상황을 도광제에게 보고하는 동시에, 영국군의 군사력이 엄청나다는 점을 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도광제는 보고를 받은 후 대노한다: "역이(逆夷)의 요구가 지나치구나. 너무나 마구잡이로 나가니 말로 해서는 듣지 않겠다. 당연히 무력으로 토벌하는 수밖에 없겠다. 요청한 하문, 북주 두 곳의 통상 및 아편가격배상은 모두 허용할 수 없다."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담판은 파탄날 수밖에 없었다.

1841년 1월 7일, 찰스 엘리엇은 제1차협상에 인내심을 잃었다. 영국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이유로 광동 주강구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대각(大角)-사각(沙角)전투가 발발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영국군은 38명이 부상을 입고, 청군은 744명의 사상자를 낸다. 거기에는 청군부장(副將) 진연승(陳連昇)의 전사도 포함된다.

찰스 엘리엇의 무력시위에 기선은 자신의 카드가 너무 약하다는 것을 의식했다. 그는 황제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나서서 찰스 엘리엇과 평화협상을 시도한다. 찰스 엘리엇쪽에서도 기선은 너무 심하게 몰아부쳐 평화협상의 여지를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서신에서 이렇게 언급한 바 있다: 나는 우리가 더 이상 피를 흘리지 않고 이 일을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흠차대신(기선)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기꺼이 합의하기만 하면 우리가 얻는 것이 그가 주기를 바라는 것보다 더욱 클 것이라는 것을."

두 사람이 임의로 협상을 시도한 것에 대하여 모해건(茅海建)은 <천조의 붕괴>에서 이렇게 적었다: "소위 광동담판은 실제로 찰스엘리엇의 월권, 기선의 위지(違旨)행동이다. 그중 찰스엘리엇은 기선보다 훨씬 더 나아갔다." 찰스 엘리엇과 기선간에는 의견차이가 크기는 했지만, 쌍방 모두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 모두 전쟁이 더 이상 계속되는 것은 원치 않은 것이다. 그 후의 일련의 담판에서, 이 두 사람은 북경과 런던의 지시사항을 어기고, 서로 타협한다. 기선은 홍콩섬을 할양하기로 동의하고, 찰스 엘리엇은 정해를 돌려주기로 약속한다. 이렇게 쌍방이 초보적으로 합의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후세에 논쟁이 많은 <천비초약(穿鼻草約)>이다.

비록 합의가 초보적으로 달성되었지만, 황제의 기대와는 차이가 너무 컸다. 기선은 시종 서명할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기선의 지연전술에, 찰스 엘리엇은 다시 상대방을 압박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2월하순, 영국함대가 호문(虎門) 수역으로 들어온다.

호문을 지키는 사람은 광동수사제독(廣東水師提督) 관천배(關天培)였다. 1834년부터 네이피어경의 함대가 광주로 쳐들어간 사건이 발생한 이후, 청나라조정의 광주라는 해상문호를 특별히 중시했고, 그리하여 강소(江蘇)에서 관천배를 이곳으로 보내어 방어임무를 담당하게 한 것이었다. 당시 양광총독(兩廣總督) 노곤(盧坤)의 지원하에, 호문의 지리상황에 맞추어 3단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대각-사각, 노만(蘆灣) - 횡당도(橫檔島) - 무산(武山, 亞娘鞋島)과 대호산(大虎山). 1838년 관천배는 다시 무산에 포대를 증설한다. 그리고 횡당도와 무산에 두 개의 쇄강철련(鎖江鐵鏈)을 설치한다.

호문요새는 비록 중국으로서는 당시 가장 강력한 해상방어공사였지만, 개전후에는 적을 막을 수 없었다. 일찌기 대각-사각전투에서의 대패는 이미 호문의 수비군사들의 사기를 꺾어버렸다. 관천배는 의복까지 전당잡혀가면서 그 돈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자 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다. 5월 26일, 영국전이 노만-횡당도-무산방어선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대포의 사정거리 제한으로, 각 거점은 대부분 서로를 지원할 수 없었고, 각 거점은 영국군의 대포에 차례로 파괴된다. 무산 정원포대(靖遠砲臺)에서 지휘하고 있던 관천배도 포화에 전사한다. 더욱 심한 것은 횡당도를 지키던 장수들은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병사들을 놔두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버려진 수비군은 분노하여 이들 도망치는 장수들을 표적으로 삼아 포격했다.

노만-횡당도-무산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청군은 대호산 방어선도 포기한다. 영국군함은 호문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계속하여 강을 따라 깊이 들어가 광주를 압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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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선이 광주담판에서 "타협"한 것이 결국은 들통나고, 도광제는 크게 실망한다. 그는 기선을 면직시키고, 정역장군(靖逆將軍) 혁산(奕山)과 참찬대신(參贊大臣) 양방(楊芳)으로 하여금 그를 대체하게 한다. 동시에 주변 각성에서 1.7만의 대군을 광동으로 지원보낸다.

양방이 혁산보다 먼저 광주에 도착한다.

전쟁터를 수년간 누빈 귀주의 노장으로서 양방은 15살때부터 계소갛여 천초(川楚)의 백련교(白蓮敎), 하남(河南)의 천리교(天理敎)의 반란사건을 진압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나중에, 그는 도광제가 머리아파하던 신강(新疆) 장격이(張格爾)의 반란도 평정하여 크게 상을 받는다. 황제는 그에 대하여 "검성지영(黔省之英, 검은 귀주성을 가리킴), 어려서부터 병법을 알고, 전공이 현저하다. 먼저 계책을 세운 후에 움직인다"라고 칭찬했다.

1841년, 양방은 나이가 이미 칠순을 넘겼다. 급히 기용할 사람이 필요했던 도광제는 이 노장이 반드시 영이를 토벌하는데 옛날의 용기와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3월 5일, 양방이 광주에 도착했고, 혁직유임(革職留任)된 임칙서등이 잠시 광주의 군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영국군이 광주로 몰려올 때, 양방은 적을 물리치는 '절기(絶技)'를 보여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랑캐의 대포는 항상 우리를 명중시키고, 우리는 오랑캐를 명중시키지 못한다. 우리는 땅 위에 있고, 저들은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이는 주객이 뒤집힌 격이다.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분명 사교(邪敎)의 술법에 능한 자가 그 안에 있을 것이다." 상대방이 사술을 쓰면, 우리도 법술을 써서 깨트리면 된다. 그리하여 그는 부녀자들이 사용한 요강으로 사술을 막을 수 있다고 보고 부녀자들이 사용한 요강을 모아 배에 싣고 나선다.

당연히 부녀자의 요강으로 어찌 영국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겠는가. 광주의 동부와 남부의 강변에 있는 포대는 영국대포의 정밀사격에 신속히 파괴당한다. 그렇지만, "첩보"는 여전히 사실과 다르게 북경으로 계속 보내지고 있었다.

영이를 상대한 방법이 없게 된 양방은 3월 20일 찰스 엘리엇과 <정전무역협정>을 체결하고, 오랫동안 제한되었던 중영무역을 재개하기로 합의한다. "각국상인들이....일체 무역을 예전처럼 진행하는데, 전혀 막지 않고,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겠다."

광주 동부의 전투가 잠시 잠잠해진 후, 정역장군 혁산이 4월 14일 뒤늦게 도착한다. 비록 원월대군(援粤大軍, 광동을 지원온 대군)이 뒤를 받쳐주고 있었지만, 혁산도 마찬가지로 기전이 일찌기 처했던 곤경에 처하게 된다: 청군의 전투력은 영국인과 담판하는데 자신감을 줄만큼 되지 못한다. 명을 받아 광동으로 와서 오랑캐를 소탕할 임무를 받은 무장의 영국군에 대한 태도는 점점 기선과 비슷해진다. 심지어 양방의 조치도 묵인한다.

그러나, 양방이 일찌기 보낸 '첩보'로 사정을 모르는 도광제는 자신감이 급증한다. 멀리 북경에 있는 도광제는 5월초 혁산에게 최종 명령을 내린다: 반드시 전력을 다해 영이를 소탕하라.

퇴로가 사라진 혁산은 어쩔 수 없이 영국군에 대한 기습을 감행해야 했다. 다만 광주일대의 2만여명의 부대가 대규모로 이동하는데, 사람들이 모르게 할 수는 없었다. 5월 24일, 찰스 엘리엇이 먼저 손을 쓰고, 광주전투가 발발한다.

청군은 형편없이 패전한다. 광주외곽은 영국군에 모조리 점령당한다. 이번 참패에 대하여, 혁산은 진상을 그대로 황제에게 보고할 수 없었다. 처벌을 받을 것을 우려한 그는 도광제에게 '첩보'를 보낸다: "역이는 공격을 받아 익사한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총병 장청운(張靑雲)등은 다시 서포대의 병사를 독려하여 대포를 쏘아 역이가 강변에 상륙하는대로 모조리 사살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억지로 전투에 나선 혁산은 패전의 맛을 보았다. 5월 27일, 혁산은 광주지부(廣州知府) 여보순(余保純)을 자신의 대표로 삼아 성아래로 내려보낸 다음 영국측이 요구하는대로 <광주정전협정>을 체결한다.

청군과 영국군이 격전을 벌이는 동안, 광주와 주변의 백성들은 모두 이 '소란'의 방관자였다. 그러나 금방 그들은 영국군과의 충돌에 휘말린다. 정전이후, 일부 할 일없는 영국군병사들이 성북쪽의 쌍산사(雙山寺)로 들어간다. 그때 현지습속을 모르는 외국인들은 호기심에서 절안에 모셔진 관을 열어보았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군이 이렇게 한 행위에 대하여 "개관육시(開棺戮屍)", "발굴분묘(發掘墳墓)"라고 알려지게 된다. 그외에 영국군이 약탈했다거나 부녀를 강간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이어 영국군은 삼원리에서 만명이 넘는 백성들에게 포위당하게 된다. 국 광주지부 여보순이 나서서 조정하여 충돌사태는 해결된다.

충돌과정에서, 화총을 장비하고 있던 영국군은 비가 내리는 바람에 사격을 할 수가 없었다. 몽둥이와 농기구를 들고 온 농민들과의 충돌에서 정규전투에서와 비슷한 사상자를 낸다: 사망 5명, 부상 23명(영국측 기록)

그러나, "삼원리항영투쟁"이라고 불리는 이 사태도 쌍방간에 이미 달성한 평화를 깨트리지는 못했다.

4

혁산과 찰스 엘리엇간에 달성된 평화합의는 광동에만 국한된 것이었다.

이 해(1841년)에 청나라조정과 영국은 모두 자신의 대표가 '광주담판'에서 상대방에게 너무 많이 양보했다고 생각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선의 인사를 조정하게 된다. 정역장군 혁산은 기선을 대체한지 4개월후에, 찰스 엘리엇도 8월초에 더욱 급진적이고 파머스턴에 충성하는 헨리 포팅거경(Sir Henry Pottinger, 1st Baronet, 1789-1856, 중국명 璞鼎査)으로 교체된다.

8월하순, 포팅거경은 파머스턴의 지시에 따라, 병력을 집결하여 제2차북상을 준비한다. 목적은 도광제로 하여금 실력이 부족한 현실을 인정하고 파머스턴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포팅거경이 북상하면서 처음 만난 상대는 하문을 방어하던 당시 민절총독 안백도(顔伯燾)였다.

전임 민절총독 등정정은 '금연불력(禁煙不力)'으로 변방의 충돌을 불러왔다는 이유로 1840년 9월 임칙서와 함께 면직당한다. 당시 운남순무로 있던 안백도가 민절총독으로 온다. 영국군의 제1차천진북상때의 첫전투가 하문에서 발생하였고, 광동쪽에서 영국인이 하문을 통상항구로 열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안백도는 영국군이 북상하면 반드시 하문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백도는 1841년 3월 2일 하문에 도착한다. 이 시기는 아주 미묘하다. 당시 영국군은 주강구에서 청군과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협상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고, 포팅거경은 영국에서 오는 도중이었다. 즉, 이후 몇달동안은 하문에 아무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안백도에 있어서 해상방어를 준비할 절호의 기회이다. 그는 확실히 그렇게 했다.

안백도는 대외적으로 강경한 태도였다. 일찌기 영국인에 대해 우호적인 이리포(伊里布)를 탄핵하기도 했다. 하문에서 해상방어를 준비할 때, 그는 영이에 통렬한 일격을 가하고 싶었고, 그리하여 하문에서 대대적으로 해상방어공사를 진행한다.

등정정의 재위기간, 일찌기 모래포대로 임시포대를 건설하여 영국군을 방어하려 했었다. 안백도는 이런 간루(簡陋)한 공사는 근본적으로 무시했고, 모조리 밀어내고 다시 건설한다. 민남(閩南, 복건남부)지구에는 화강암이 많다는 점을 고려하여, 그는 하문도의 남안에 길이 1.6킬로미터에 달하는 방어공사로 석벽을 쌓는다. 그리고 16미터마다 포문을 하나씩 만든다. 의각지세(犄角之勢)를 구축하기 위하여, 그는 동시에 고랑서(鼓浪嶼)와 서자미(嶼仔尾)에 여러 개의 포대를 증설했다. 세 곳의 화포는 모두 279문으로 밀집된 교차화력망을 구성했다.

하문에서 대량의 자금과 인력을 들여 해상방어공사를 업그레이드시키고 난 후, 안백도는 자신을 가진다. 일단 영국군이 자신의 '해상장성'과 대신하면 반드시 큰 손실을 입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1841년 8월 25일, 영국군이 하문의 외해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남쪽 수로를 따라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영국군의 견선리포(堅船利砲)는 전투에서 우세가 명확했다. 반시간도 되지 않아, 영국군은 고랑서와 서자미등 도서의 청군포대를 모조리 파괴시킨다. 안백도가 위안을 가진 점이라면, 그가 정교하게 만든 석벽방어선은 영국함대의 지속적인 포격도 견뎌냈다는 것이다. 한때는 영국군의 공격을 좌절시키기도 했다. 직접 전투를 경험한 한 영국인이 나중에 회고한 바에 따르면, "비록 대포 74문을 탑재한 전함 두 척이 그 포대에 2시간동안 포탄을 쏟아부었으니, 아무런 성과도 없었다. 상대방의 화포 1대도 파괴하지 못했다. 우리 사병이 포대로 진입한 후, 포대내에 안에 포탄에 맞아죽은 병사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영국육군부대는 상륙후 포위공격을 선택했고, 화강암으로 구축한 '해상장성'은 결국 적의 손에 들어간다. 안백도는 그 광경을 목도하고 전투전의 자신감은 완전히 사라져 황급히 배를 타고 하문도에서 도망친다.

하문도를 점령당한 것에 대하여 안백도는 사후에 '책임미루기모델'을 시전한다. 그는 황제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자신이 직접 독전하며 힘껏 적에게 맞서서, 화륜선 1척, 병선 5척을 격침시켰다. 그 오랑캐는 한편으로 대포로 대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벌떼처럼 진격해왔다. 그날은 남풍이 크게 불어, 적선이 우세를 점했다. 우리 군은 포화에 제대로 앞이 보이지 않았고, 결국 하문을 잃었습니다." 그 뜻은 하늘이 나를 도우지 않은 것인데, 어떻게 하란 말이냐는 것이다. 책임을 미루는 동시에 무중생유(無中生有)의 전공도 추가해 놓았다. 자신이 이 패전의 책임에서 깨끗이 회피하려는 의도였다.

하문의 패전은 도광제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얻은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도광제는 안백도의 상소에서 한 가지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었다: 원래 영국군도 육전에 능하다는 것을. 그리하여 도광제는 각지의 독무(督撫, 총독, 순무)에게 지시를 내려 깨우쳐준다: "이번 오랑캐는 아주 흉맹하고, 행적이 괴이하다. 이전에 말한 사람들은 모두 이번 오랑캐가 수전에 강하니, 상륙하도록 유인하면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해안방어에만 신경썼고, 육상으로 상륙하여 교전하는 것은 계획하지 않았다. 이번 복건 하문전투에서 영국인은 상륙하여 포대를 빼앗았고, 우리 병사를 다치게 했다...각 해안에서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오랑캐가 상륙하면 어떻게 사방에서 포위공격하여 섬멸할 것인지에 대하여 모두 세심하게 처리하여 유비무환하라."

도광제는 나중에서야 각지에 이런 경고를 보낸다. 다만 제국의 강역이 넓은 바람에 이 문건의 전달은 느렸다. 설사 새로 발견한 것을 나중에 전투를 해보지 않은 전선의 관리들이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대응하는 전술조정을 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5

하문에서 안백도를 격패시킨 후, 포팅거경은 계속 북상한다. 그의 새로운 적수는 안백도와 성격이 비슷한 양강총독 유겸(裕謙)이다.

정해는 1840년 7월 영국군의 제1차북상때 이미 점령한 바 있다.다만 광동의화때 찰스 엘리엇의 단독결정으로 다음 해 2월 청나라에 돌려준다. 이 양보에 영국의 외무대신 파머스턴은 매우 화를 냈다. 포팅거경이 받은 명령은 다시 이곳을 점령하라는 것이었다.

정해의 방어업무에 유겸은 비교적 신경을 썼다. 안백도와 마찬가지로, 유겸은 부임하자마자 해상방어건설을 시작한다. 다른 점이라면, 정해에는 화강암이 나지 않는다. 유겸은 그리하여 진흙과 석회를 섞는 방법을 써서, 정해의 남해안에 길이 약 4.8킬로미터의 토성을 쌓고, 80문의 화포를 설치한다. 그외에 그는 사람을 보내 정해성벽을 수리하고 화포 40문을 설치한다. 그리고 다시 동악산(東岳山)에 화포 15문의 진원포대(鎭遠砲臺)를 구축한다. 또한 정해수비군은 이전의 3천명에서 5,600명으로 늘어난다. 유겸은 자신의 방어공사에 아주 자신이 있었다: "이 역도들이 감히 해안으로 다가오거나 위험을 무릅쓰고 상륙하려 한다면 소탕하기 쉬울 것이고, 적의 배는 한척도 돌아가지 못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군의 전투력을 견식한 바 있는 임칙서는 그에게 찬물을 끼얹는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그는 유겸에게 이렇게 건의한다: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정해는 고도이다. 선조(先朝)가 버린 땅이다. 여기에 많은 병력과 좋은 장수를 배치하여 절해고도를 지키는 것은 좋은 책략이 아니다. 삼진을 내지로 이동시켜, 문호를 단단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

임칙서는 광동을 떠나 절강으로 간 것은 유겸의 건의에 따른 것이다. 양강총독을 맡은 후, 유겸은 도광제에게 이미 면직된 임칙서를 자신에게 보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리하여 두 사람이 정해의 방어업무를 순시하게 된 것이다.

임칙서의 우려는 결국 입증된다.

1841년 9월 26일, 영국함대가 차례로 도착하고, 연속 5일간 정해를 정찰한다. 정찰활동이지만, 영국군의 함선이 빈번하게 오가는 것은 이미 청군의 심리를 긴장되게 만들었고, 피로를 더하게 만든다. 비록 정식으로 개전하지 않았지만, 분식된 첩보는 이미 북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동안 발생한 소규모충돌은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는 "이비(夷匪)를 무수히 격살했습니다."라고 하였다.

정식으로 개전하는 10월 1일, 거짓말은 부메랑이 되어 그들에게 닥친다. 그들이 말한 '영이대패전'의 주인공이 자신으로 바뀐 것이다. 영국육군은 해군의 포화엄호 속에 청군에 쇄도하여 대파하고, 신속히 정해를 점령한다.

정해를 빼앗기자, 유겸의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는 여전히 피중취경(避重取輕)식이었다: "이 오랑캐는 3로로 나누어 공격했습니다. 우리 군대는 앞의 부대가 전사하면, 뒤의 무대가 계속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이동용대포는 붉어져서 포탄을 장전하여 쏠 수 없었지만, 죽어라 포격했습니다. 총병등이 육일밤낮을 고전하면서 연이어 승전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역풍이 불고 파도가 크게 일고, 적의 함선이 막고 있어서, 지원병력이 건너갈 수 없었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적을 결국 막아내지 못하고....정해는 잃었습니다." 결국 자신은 정해에서 전력을 다했지만, 하늘이 돕지 않았다는 것이다.

십일후인 10월 10일, 방어전술에 아무런 혁신도 없는 진해(鎭海)는 정해의 비극이 그대로 재현된다. 이때 연이어 두 개의 성을 잃은 유겸은 자신이 전쟁전에 말했던 호언장담을 떠올리며 수치를 크게 느끼고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총사령관이 죽자, 절강제독(浙江提督) 여보운(余步雲)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영파성(寧波城)을 버리고 도망친다. 절강동부의 3개 성이 모조리 함락된 것이다.

유겸이 죽자, 영국군의 전력에 도광제는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억지로 진정하고, 자신의 조카인 혁경(奕經)을 양위장군(揚威將軍)으로 임명하여, 각성의 1.2만명 지원군을 지휘통솔하여 절강으로 가서 역이를 토벌하고 실지를 수복하도록 한다.

도광제의 지시를 받았지만, 혁경도 승리를 거둘 자신은 별로 없었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혁경은 "싸우기도 하고, 협상도 하고, 둘을 오갔다." 소주(蘇州)에 도착한 후, 거기에서 꼬박 2달을 머무른다. 당시 절강순무(浙江巡撫) 유운가(劉韵珂)는 영국군이 계속하여 내륙깊이 쳐들어가는 것을 우려하고, 영파의 재난이 자신이 지키고 있는 항주(杭州)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그는 재삼 대장군이 하루빨리 병력을 이끌고 와줄 것을 요청한다.

혁경의 대응방법도 다른 것이 없었다. 그저 일단 지연시키고 보자는 것이다. 이유는 황명을 받아 지원오는 사천, 섬서의 정예부대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연시킨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혁경은 승리의 희망을 신령(神靈)에 건다. 기록에 따르면, 1842년 2월 10일, 음력 정월초하루, 혁경은 항주 서호의 관제묘(關帝廟)로 가서 점괘를 본다: "불우호두인일환(不遇虎頭人一喚), 전가수보여평안(全家誰保汝平安)" 혁경은 이에 깨달음을 얻는다. 그리하여 "이호제양(以虎制羊)"하기로 결정한다. 서양인은 "양(羊)"이다. 양이 호랑이를 만나면 반드시 잡아먹힌다. 이 생각이 떠오르자 이 청군총사령관은 자신감이 배가 된다.

혁경은 특별히 길시(吉時)를 선택한다: 도광22년 정월 이십구일 사경((1842년 3월 10일 3시-5시). 이 시간을 고른 이유는 음력으로 볼 때 이 시간은 마침 "사인지시(四寅之時)"라는 것이다. 임인년(壬寅年) 임인월(壬寅月) 무인일(戊寅日) 갑인시(甲寅時). 천간지지에 대한 설명에서 인(寅)은 바로 호랑이(虎)인 것이다.

우연하게도 당시에 머리에 호랑이가죽모자를 쓴 사천의 지원군이 도착한다. 이는 혁경에게 망외의 기쁨이었다. 그는 흥분하여 소리친다: "이제 공을 이룰 수 있겠다."

3월 6일, 혁경이 "사인가기(四寅佳期) 오호제적(五虎制敵)"의 작전계획을 보고한 후, 도광제는 기대에 차서 이렇게 주비(朱批)를 남긴다: "경등의 주도면밀한 배치를 칭찬한다. 천우신조를 받아 반드시 큰 공을 이루어라."

4일후, 이 대반격이 혁경이 정한 "길일"(3월 10일)에 시작된다. 혁경은 자신의 부대를 3로로 나누어, 각각 영파, 진해와 정해의 3곳을 공격한다. 승리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특별히 호랑이띠인 귀주사람 단영복(段永福)을 영파를 공격하는 주장(主將)으로 내세운다.

결과는 일찌감치 나온다. 그날 새벽, 영파성에 진입한 청군은 시가전에서 참혹한 손실을 입고 대패하고 돌아온다. 진해에서, 청군의 선봉부대는 주력부대가 심야에 길을 잃어 지원을 받지 못해 참패한다. 그리고 정해로 진격한 청군은 행적이 드러나면서, 일찌감치 순찰하던 영국함대의 포격을 맞아 궤멸한다.

청군이 몰랐던 것은 전장의 형세가 처음에는 자신에게 유리했다는 것이다. 영국군의 3명의 지휘관은 이때 모두 전선에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총사령관 포팅거경은 이때 홍콩에 있었고, 해군과 육군의 주요지휘관은 정해에 있었다. 그렇지만, 청군은 그 의외의 기회를 잡아 국면을 뒤집지 못했고, 오히려 상대방의 위기상황에서도 차분하게 대응하여 반격에 성공하게 만들었다. 이를 보면 청군과 영국군의 자질에서의 차이를 한눈에 엿볼 수 있다고 할 것이다.

4시간도 되지 않아 청군은 영파, 진해, 정해 세 곳에서 모두 실패로 끝나고, 궤멸하여 도주하다가 영국군의 추격을 받는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반격작전을 평가할 때 이렇게 말한다: "전국손실(全局損失), 군위대좌(軍威大挫), 망국지유(亡國之由), 기어차역(基於此役)"(전체 국면이 손실을 입고, 군대의 위세가 크게 꺾였다. 나라가 망한 이유가 이 전투에 있다.)

6

절동 3곳에서 청군의 공세를 물리친 후, 영국군은 기쁘면서도 우려가 있었다.

전체 전투를 되돌아보고나서 영국인들은 돌연 심각한 문제를 인식했다: 자신들은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병력이 유한하다. 병력보충이 청나라군대처럼 쉽지 않다. 하물며 지금 병력으로 3곳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는 방어에 불리하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공격하는데도 불리하다.

그리하여, 해군지휘관 바커(1781-1869, 중문 巴加)와 육군지휘관 휴 고(Hugh Gough, 1779-1869, 중문명 郭富 혹은 臥烏古)는 적시에 부대배치를 조정한다: 영파를 포기하고, 소수의 병력을 진해성밖의 초보산(招寶山)에 주둔시키고, 강남의 내지로 진군하여, "중화제국의 주요내륙교통선의 거점을 차단"하고자 한다. 웃기는 점이라면, 영국군이 스스로 성을 떠난 것을 가지고 혁경은 적이 "계궁지갈(計窮智竭)"한 것이라 여기고 이를 첩보로 황제에게 보고한 것이다.

1842년 5월, 북상한 영국함대는 사포(乍浦)를 공격한다. 호문, 하문, 정해등 해군방어요새와 비교하면, 사포성의 방어준비는 언급할 가치도 없을 정도였다. 영국군은 원래 가볍게 이길 수 있는 전투라고 생각했는데, 댓가는 1840년개전이래 가장 컸다. 전사 9명, 부상 55명. 육군장교 1명도 전사한다. 이들 인원손실은 주로 현지를 방어하던 팔기관병이 결사적으로 저항하여 일어난 것이다. 대대로 사포에 거주하던 팔기병은 '영이'가 내습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가족과 조상묘를 지키는 용기를 보여주었고, 이는 영국군에게 적지 않은 골치였다.

그러나, 용기와 결심만으로 사포가 함락되는 운명을 피하지는 못했다.

전후, 중국과 영국 쌍방은 사포의 참상에 대한 묘사가 같지는 않았다. 영국측의 기록에 따르면, 성이 함락된 후, 사포주민들이 대규모로 자살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부녀들이 그녀들의 자녀를 죽였다. 먼저 그들을 우물에 던져 익사시키고, 자신도 뛰어들었다. 남편들은 그들의 처자식을 목졸라 죽이거나 독살했고, 그후에 담담하게 자결했다." 그러난 사포사람 심균(沈筠)이 쓴 <임인사포순난록(壬寅乍浦殉難錄)>에 따르면, 영국군은 성을 함락시킨 후 기율이 무너져 대거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했다고 되어 있다.

작은 성에 불과한 사포가 최종목표는 아니었다. 영국군은 계속 북상한다. 육,해 양군이 서로 협력하면서, 6월 16일 오송(吳淞)을 점령한다. 이 전투에서 강남제독 진화성(陳化成)이 전사하고, 신임 양강총독 우감(牛鑒)은 패전후 도주한다. 영국군은 이어서 상해(上海)를 점령한다.

오송을 점령하는 날, 영국원정군총사령관 포팅거경이 홍콩에서 돌아온다. 두 부하들과 병력을 장강구에 집결시킨 후, 직접 당시 청나라조정의 남방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 남경으로 진격한다. 그전에 그들은 먼저 남경의 문호를 해결해야 했다. 진강(鎭江).

진강에 주둔하는 장수는 해령(海齡)이었다. 그는 평가가 반반으로 갈리는 인물이다.

7월중순, 양강총독 우감은 영국군이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황급히 진강에서 남경으로 도주한다. 진강의 통제권은 해령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영국군의 공격에 대하여 자부심이 강한 해령은 성안의 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미 승리를 거둘 계책을 마련했다. 너희 주민들은 동요하여 떠나지 말라." 이런 포고로 많은 진강의 백성들은 피난갈 호기를 놓쳐버리게 된다.

더욱 불가사의한 점은 해령이 방어업무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주요 신경을 소위 '한간(漢奸, 매국노)'를 상대하는데 두었다. 사료에 따르면, 해령은 "단지 성의 4문에 총포를 추가하여 밖으로 향하게 하였을 뿐, 성안에서는 밤낮으로 길을 다니는 사람을 한간으로 보아 체포했다." 매번 부녀자나 아이들이 기병을 만나면 놀라서 달아났고, 기병은 추격하여 죽여버렸다." 그후 해령은 그것을 전공으로 상을 내려달라고 보고한다. 이처럼 아무런 구분도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체포하자, 백성들의 청군에 대한 공포는 영국군의 침범에 못지 않게 된다. 그외에 성밖으로 나가 영국군에 허장성세를 보이려 한 청군은 식사문제로 원망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의 반란을 일으킬 수준이 된다. 그때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총포를 쏘아 성을 함락시켜, 도통(해령)을 산채로 씹어먹고 싶다."

이런 상황하에서, 청나라조정이 진강의 외곽에 배치한 수비군은 전투가 시작되자 순식간에 흩어져버린다. 이는 해령에게 나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그가 위로받는 것은 진강성내에는 사포와 마찬가지로 '현지' 기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가족 대다수가 진강에서 근 200년간 생활해 왔기 때문에, 성안의 재산과 가족을 위해서라도 그들은 영국군과 교전할 때 죽기를 각오하고 용맹하게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결과는 같았다. 진강은 그저 사포 운명의 재판이었다. 그뿐이다. 7월 21일, 진강을 잃는다. 이제 남경도 위기일발의 상황에 처한다.

오송과 진강의 참패로 양강총독 우감은 저항할 자신을 잃었다. 그는 계속 상소를 올려 황제에게 의화(議和)를 청한다.

영국군이 장강(長江)과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가 만나는 진강을 점령한 후, 청나라의 경재명맥은 이미 단절되었다. 일련의 타격으로 '천조'는 붕괴되기 시작하고, 황제도 타협을 생각하게 된다.

<남경조약> 체결장면

1842년 8월 29일, 남경의 강위에서 영국함정 "콘월리스함(HMS Cornwallis, 중문 皋華麗號 혹은 康沃利斯號)" 함상에서 흠차대신 기영(耆英)은 <남경조약>에 서명하고, 아편전쟁은 정식으로 종결된다.

다음 해, 청나라조정과 영국은 치외법권등 문제에 대해 <호문조약(虎門條約)>을 보충적으로 체결한다. 천조(天朝)는 이미 붕괴되었다.

7

2년여에 걸친 전투과정에서, 청군의 모습은 거의 일촉궤멸이었다. 신속히 궤멸한 배후원인은 아주 복잡하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군사적으로 무능할수록, 도덕적으로 더욱 후안무치했다. 군사적 궤멸과 크게 대비되는 것은 '첩보'가 공공연히 각지의 전선에서 발송되어 자금성의 눈을 가리고, 전체제국의 눈을 가렸다는 것이다. 군사층면에서만 보면, 영국군과 싸우면서 청군이 직면한 것은 수준격차가 분명한 차원이 다른 타격이었다.

전체 전쟁에서, 청군의 궤멸은 극도로 웃기는 전술적 오판과 관련이 있다: 영국군은 육상전투를 잘하지 못한다.

후세인들이 "눈을 뜨고 세계를 바라본 최초의 중국인(開眼看世界第一人)"이라고 불리는 임칙서도 당시 마찬가지로 외부세계에 대한 인식은 천박한 수준이었다. 그리하여 영국군에 대하여 잘못된 판단을 내린다. 1839년, 임칙서가 도광제에게 올린 상소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오랑캐 병사들은 총포외에 칼로 찌르는 발걸음은 재빠르지 못하다. 그 다리와 발은 천으로 꽉 매어놓았기 때문에 굽히고 펴는 것이 불편하다."

이런 황당한 견해는 조정에서 널리 인정받았다. 이런 견해를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는 나중에 양강총독이 되는 유겸도 포함되어 있다.

정해에서 방어준비를 할 때, 유겸은 방어의 중점을 정해성 남부해안의 협소한 지역에 두었다. 원인은 이곳의 지세가 울퉁불퉁하여, "우리 보병이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여겼기때문이다. 유겸이 보기에, 해전에 뛰어난 영국군이 멍청하게 자신의 단점인 육상전투를 청군과 벌이려 하지 않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사실상, 영국군이 신속히 정해를 점령할 수 있었던 관건은 바로 유겸이 경시했던 영국의 육군부대때문이었다.

도광제는 처음에 이를 깊이 믿었다. 민절총독 안백도가 1841년 8월에 보낸 하문을 빼앗겼다는 보고를 받은 후에 비로소 그것이 잘못된 미신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영국군이 육전을 잘하지 못한다"고 잘못판단한 댓가는 참혹했다. 아편전쟁에서, 청군의 해상방어공사는 대부분 포화를 해상전함을 상대하는 것을 위주로 배치했다. 전술각도에서 보자면, 영국군은 청군에 대한 공격에서 그다지 새로운 전술이 없었다. 광주에서 진강까지, 영국군은 모두 함포가 정면공격하고, 다시 육군이 측면으로 상륙하여 포위공격했으며, 매번 성공을 거두었다.

무기방면의 수준차이도 청군이 상대되지 않은 중요요소였다.

명말청도이래, 청군의 화기혁신은 거의 정체상태였다. 청군의 주요장비는 병정조총(兵丁鳥槍, 즉, 前裝滑膛火繩槍)이다. 이는 1548년 포르투갈 화승총의 모방제품이다. 점화하는 도화선은 환경습도의 영향을 받는다. 그리하여 사용에도 영향을 끼친다. 그러나 영국군은 1800년대부터, 전장활당의 수발총(燧發槍, 부싯돌로 격발되는 )과 격발총(擊發槍)을 사용한다. 사격속도, 사정거리, 점화방식 모두 청군이 장비한 병정조총보다 훨씬 뛰어났다.

근현대전쟁에서는 하나의 철칙이 있다: 함포는 해안포대를 상대할 때 승산이 크지 않다. 다만 아편전쟁에서 청군의 해안방어포는 이런 전통적인 인식을 뒤집어 놓았다.

청군의 해안방어포는 적지 않은 것들이 수십년 내지 수백년전의 '구화(舊貨)'였다. 1849년 7월 정해전투에서, 청군은 심지어 240년 역사를 지닌 오래된 화포를 전투에 투입했다. 게다가 관리와 유지보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들 화푸의 성능은 많이 떨어졌다.

새로 제조한 화포도 결점이 아주 명확했다. 동시대보다 낙후한 야금기술과 주조기술을 사용했기 때문에, 화포완성품의 합격률이 그다지 높지 못했다. 1835년, 광동수사제독 관천배가 호문요새에 설치한 40문의 신식화포는 시험발사때 10문의 포신이 터져버린다. 그리하여 2명의 병사가 사망했다. 검사결과, 포신에 움푹 파인 곳도 있고, 표면이 울퉁불퉁하였으며, 쇠에 잡질이 너무 많이 섞여 있었다. 움푹 파인 곳중 큰 것은 4사발의 물이 들어갈 정도였다고 한다. 포신이 터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보완하는 방법은 통상적으로 포신의 두께를 늘이는 것이다. 동시에 장약을 줄이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보니 화포는 무겁지만 위력은 약해진다.

그외에 청군의 해안방어포는 방향조정과 높낮이각도를 바꾸는 포가(砲架)가 부족했다. 그리고 여전히 "초팔유일탄일(硝八硫一炭一)"의 전통적인 경험에 따라 화약을 만들었다. 그러다보니 품질이 많이 떨어졌다. 1841년 1월의 대각-사각전투에서, 영국군은 청군의 화약고에 대하여 "안에 수천파운드의 질낮은 화약이 나무통이나 진흙관에 보관되어 있었다. 우리는 모조리 바다에 버렸다. 중국화약의 성분은 거의 우리와 비슷했지만, 품질이 열악한 것이었다." 포가와 화약의 결함으로 청군은 1841년 9월의 정해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는다. 영국군은 그들의 적수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한 바 있다: "저열한 측현의 포로 쏘았다. 그들의 포대에서는 들어올려 쏠 수도 없었고, 각도를 내려서 쏘지도 못했다. 화약의 유형이 아주 엉망진창이어서, 우리군대에 아무런 피해도 입힐 수 없었다."

비록 청군은 80만가량의 대군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편전쟁때 인해전술의 장점을 발휘할 수 없었다. 청나라가 세워진지 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군대의 방어중점은 계속하여 각종 반청활동, 민변, 비적을 진압하는데 집중되어 있었고, 그 본질은 지방치안을 유지하는 경찰의 역할이었다. 80만의 상비군은 넓은 영토에 분산배치되어 있어서, 한 지방의 병력은 아주 박약했다. 게다가 원거리 이동에는 대량의 자금과 시간이 든다. 이는 스스로 근검절약을 표방한 도광제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방식이었다. 그러므로, 규모가 비교적 컸던 광주전투와 절강대반격에서도 지원온 병력은 실제로 겨우 만여명뿐이다.(광주에서 혁산은 1.7만명의 원군을 얻었고, 절강에서 혁경이 얻은 원군은 1.2만명이었다)

청군의 내부에 있는 결함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이고, 쇠퇴하는 형세가 확실했고, 온갖 난상이 드러났다. 복건 정장용도(汀漳龍道) 장집형(張集馨)은 '군무를 정돈'하는 문제에 대하여 임칙서에게 가르침을 구한 적이 있다. 임칙서는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대답한다: "제갈무후가 온다고 하더라도, 역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청나라의 군대가 그저 옛날에 머물러 있을 때, 쳥국군은 시대의 흐름을 타고 빠르게 달려나갔다. 양자가 부딛치면 승패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여러번에 걸쳐 타격을 받은 후에도 청나라조정은 조약을 이행하는 외에 그후 십여년간 내부적으로 군사개혁에 대한 반응이 거의 없었다. 비가 그치고 나니 번개를 잊은 것이다. 모든 것은 평정을 되찾은 것같이 보였다.

이 죽일놈의 평정은 우환과 치욕을 잊은 평정이고, 고인물과 같은 평정이다. 새로운 외환이 밀려왔을 때 천조는 계속하여 붕괴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