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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중기)

구자탈적(九子奪嫡)에 대한 또 다른 시각: 상삼기(上三旗)와 하오기(下五旗)의 다툼

by 중은우시 2024. 12. 22.

글: 송안지(宋安之)

역사는 비록 불변이지만, 서로 다른 시각으로 역사를 돌아볼 수는 있고, 그렇게 하면 왕왕 다른 인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청나라때의 구자탈적(九子奪嫡)을 예로 들면, 중국역사상 저명한 탈적지쟁(황위계승전)의 배후에는 여러가지 다른 의미가 있고, 관련되는 범위가 너무 넓다. 그중 팔기(八旗) 내부의 투쟁을 보면, 이는 기실 상삼기와 하오기의 투쟁이었고, 결국은 양패구상(兩敗俱傷)하고, 옹정제가 '어부지리'을 얻은 것이다.

소위 상삼기는 상황기(鑲黃旗), 정황기(正黃旗), 정백기(正白旗)이고, 그 의미는 천자가 직접 지휘하는 기(旗)라는 것이다. 처음에 천자가 직접 지휘하는 기는 청태조 누르하치가 직접 지휘한 양황기(兩黃旗, 정황기와 상황기)이다. 청태종 홍타이시(皇太極)가 즉위한 후 자신이 직접 이끌던 정백기와 자신의 장남 하오거(豪格)가 이끌돈 상백기(鑲白旗)를 합쳐서 양백기(兩白旗, 정백기와 상백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는 전통을 잇기 위해 양백기와 양황기의 명칭을 바꾼다. 그렇게 하여 이전의 양백기가 양황기로 된다. 여기에 하오거가 직접 지휘하던 정남기(正藍旗)까지 합하여, 최초의 상삼기(上三旗)가 된다. 섭정왕 도르곤(多爾衮)시대에 자신이 직접 이끄는 정백기(正白旗)를 상삼기에 포함시킨다. 도르곤이 죽은 후, 순치제가 친정하면서, 팔기를 장악하기 위해 정백기를 상삼기의 하나로 명확히 한다. 이렇게 상삼기가 확정된다. 간단히 말해서 상삼기는 황권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하오기와 상삼기의 가장 큰 구별은 천자가 직접 지휘하는 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청태조 누르하치시대에 그는 팔가분권(八家分權)을 제창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직접 이끄는 양황기를 제외하고, 나머지 육기는 각각 기주(旗主)가 있었다. 당시 모든 자원과 전리품은 팔기가 균분하게 나눠가졌다. 심지어 누르하치는 정황기를 성년이 된 열두째아들 아지거(阿濟格)에게 나누어주고, 열네째아들 도르곤도 정황기에 소속시킨다. 자신은 막내적장자 도도(多鐸)과 함께 상황기에 남는다. 그리고 자신의 사후에 상황기를 도도에게 전한다. 이렇게 하여 상황기는 상삼기의 으뜸이 되고, 팔기중 제일기가 된다.

팔기의 특수한 연원으로 인하여, 오랜 시간동안 기인(旗人)들의 기주에 대한 충성도는 황제에 대한 충성도보다 훨씬 컸다. 이는 당연히 황제로서는 원치 않는 일이다. 그리하여 청태종 홍타이시부터, 섭정왕 도르곤, 다시 순치제와 강희제에 이르기까지 청나라의 역대 최고통치자들은 팔가분권을 극력 억누르고 일가로 집권하고자 노력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하오기를 장악하고 있는 종실제왕을 억누른 것이다.

강희제시대에 이르러, 하오기는 이미 황권에 신복한다. 가장 현저한 표지는 하오기에 더 이상 기주를 두지 않는 것이고, 세습기주라는 것이 없어진다. 그 대신 조정에서 파견한 관리가 관리한다. 황제는 진정 팔기의 주인이 된 것이다.

강희제가 적장자계승제도를 확정하면서, 황이자(皇二子)이며 적장자(嫡長子)인 윤잉(胤礽)을 황태자로 세운다. 그리고, 강희 37년(1698년) 삼월, 6명의 성년이 된 황자들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팔기를 이끌게 한다. 그리고 이들 성년이 된 황자들이 국가정무의 처리에 참여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어느 정도 윤잉의 권력을 약화시키기는 하지만, 이를 통해 팔기에 대한 통제을 강화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강희제가 한가지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전통역량의 존재였다.

윤잉이 황태자에 오른 것은 하오기에 있어서 그저 상삼기의 이익을 대표하는 계승자일 뿐이다. 그는 하오기의 이익을 대표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하오기는 황태자 윤잉을 별로 인정하지 않았다.

성년이 된 황자가 하오기에 들어오고, 팔기속민을 갖게 된 후에 하오기는 자연히 그를 기주로 보고, 이들 황자가 하오기의 이익을 대표한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이들 황자에 충성을 다한다. 그러므로, 강희제는 성년이 된 황자를 보내 팔기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지만, 결과는 오히려 이들 황자들이 새로운 '기주'가 된 것이었다.

게다가 강희제이전의 황위계승은 안정적이지 못했다. 청태종 홍타이시는 사대패륵의 한명으로서, 나머지 삼대패륵과 사소패륵의 인정을 받아 후금의 칸에 올랐다. 순치제가 황위를 계승한 것은 도르곤과 황장자 하오거의 황위쟁탈전으로 대치국면이 이어지자, 양측이 타협한 결과이다. 강희제가 황위를 계승한 것은 주로 그가 천연두를 겪었기 떄문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강희제이전에는 적장자가 순조롭게 황위를 계승한 사례가 없었다. 황위의 전승은 우연성이 충만했고, 그리하여 하오기의 기인들은 황자는 모두 황위계승의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대거 자신들의 기에 속한 황자가 황위를 탈취할 있도록 지지했다.

그리하여, 구자탈적의 장면이 벌어지게 된 것이고, 결국은 양패구상한다. 황태자 윤잉은 두 차례에 걸쳐 황태자로 세워지고, 두차례에 걸쳐 폐위된다. 하오기가 지지한 황자도 강희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년에 이르러 아예 황태자를 두지 않는다. 사아거(四阿哥) 윤진(胤禛)이 도광양회를 통해 하오기의 지지를 구하지 않고, 구자탈적에 적극 가담하지도 않으면서, 중립적인 위치를 견지하면서 호인의 이미지를 보이고, 또한 강희제가 맡긴 각종 임무는 조용하면서도 적절하게 처리해서 강희제로부터 인정을 받고, 최종적으로 '어부지리'를 거두어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황위를 이어받는다.

당연히, 옹정제의 황위계승은 하자가 있다. 먼저, 강희제의 유조는 강희제가 직접 쓴 것이 아니다. 강희제가 붕어할 때 유일하게 자리를 지킨 룽커도(隆科多)가 구술을 받아적은 것이다. 옹정제의 언행도 권력이 안정되어가면서 앞뒤로 말이 모순된다. 처음에는 룽커도 혼자 그 자리에 있었다고 말하다가, 나중에 황위가 안정된 후에는 강희제가 임종할 때, 그와 다른 황자 및 신하중 유일하게 룽커도가 있을 때 강희제가 그에게 황위를 전하겠다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이런 주장은 근거가 없다. 그래서 나중에 건륭제도 옹정제가 어떻게 황위를 승계했는지를 얘기할 때, "성조(聖祖 , 즉 강희제)가 건강상황이 점점 나빠지면서, 황고(皇考, 황제의 부친 즉 옹정제)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다. 그때 내대신 룽커도가 명을 받아 선포했다."

당연히 그렇다고 하여 옹정제가 황위를 찬탈하였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의 황위계승은 논쟁이 남아 있다는 것뿐이다. 아마도 가장 가능성이 큰 것은 옹정제가 유조없이 황위를 차지한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강희제의 사망이 너무 돌연해서, 아마도 후계자에 대한 말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유일하게 임종을 지켜본 룽커도는 자신의 이익최대화를 위하여 옹정제가 구자탈적때 야망을 드러내지 않고, 팔가분권을 대표하는 하오기와 황권을 대표하는 상삼기간의 투쟁에도 참가하지 않고, 하오기의 지지도 얻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옹정제는 자신이 통제하기 편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황자들은 이미 자신들의 심복이 있어, 만일 도와주더라도 자신의 입지는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거짓으로 유조를 만들어 옹정제를 황위계승자로 서포한 것이다. 그 결과는 전혀 예상밖이었다. 옹정제는 보통인물이 아니었다. 즉위후에 강력한 모습을 보이면서 룽커도까지도 처리한 것이다.

옹정제가 즉위한 것은 청나라에 있어서 행운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청나라는 당시 이미 위험기에 접어들었다. 강희제가 말년에 과도하게 관용적으로 나라를 운영하면서, 관리들이 부패가 기승을 부렸다. 심지어 거의 집단적 부패로까지 발전했다. 관료사회의 부패는 관리들로 하여금 부정부패의 공동이익을 위하여 서로 힘을 합쳐서 황권에 대항할 뿐아니라, 더더욱 민생을 도탄에 빠트려 결국 농민반란이 일어나 천하가 대란에 빠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궤도로 계속 진행되었더라면 아마도 강희제의 다음 황제와 다다음 황제의 재위기간에 큰 문제가 발생했을 것이다. 수십년간 악성발전을 거쳤으면 절대로 큰 문제이다.만일 후임군주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그 다음 황제의 재위기간내에 청나라의 통치는 큰 문제가 터졌을 것이다. 다만 옹정제가 즉위하면서 신정과 관료사회를 혁신하는 조치를 취하면서, 관료계통의 부정부패문제가 상당히 개선된다. 이는 청나라의 통치기간을 연장시켜주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강희제이후, 청나라의 통치기간은 아마도 초읽기에 들어갔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