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세월유흔(歲月有痕)
중국고대역서의 커다란 흐름 속에서, 진(晋)나라는 중요한 제후국이었다. 일찌기 춘추시기에 초(楚)나라와 쟁패해서 패주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진나라는 '삼가분진'이라는 역사사건을 거치면서 한(韓), 위(魏), 조(趙)의 삼가열경(三家列卿)이 나누어갖고, 진나라는 역사의 무대에서 물러난다.
그렇다면, "삼가분진"후 진나라의 국군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그들의 최후는 어떠했을까?
- 진(晋)의 휘황과 쇠락
진나라는 주(周)의 제후국중 하나이고, 최초의 국군인 당숙우(唐叔虞)는 주무왕(周武王) 희발(姬發)의 아들이고, 주성왕(周成王) 희송(姬誦)의 동생으로, "희성진씨(姬姓晋氏)"이다. 춘추시기 진은 초와 천하를 두고 쟁패했고, 당시 역사의 메인스트림이 된다.
진은 강대한 군사력과 심후한 문화실력으로 좌구명의 <좌전.양공27년>, <국어.정어>와 사마천의 <사기.십이제후연표>에서 공동으로 춘추사강국(春秋四强國)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진나라의 휘황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못했다. 진나라내부에서 "육경(六卿)"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진나라국군의 권력은 점점 약화된다.
육경에는 한(韓), 조(趙), 위(魏), 지(智), 범(范), 중행씨(中行氏)등이 포함된다. 그들은 진나라의 군정대권을 장악하고, 계속되는 투쟁과 병합을 통해 점차 진나라 공실(公室)의 실력을 약화시켰다.
빨간색은 "정경(正卿)"을 맡은 사람이고, 앞의 숫자는 순서임.
2. "삼가분진"의 배경과 경과
"삼가분진"은 춘추말기 진나라가 한, 조, 위 삼가열경에 의해 분할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춘추의 종결, 전국의 시작을 알리는 분수령으로 취급된다. 사마광은 편년체사서 <자치통감>에서 "삼가분진"으로 첫부분을 장식했다.
기원전633년 진문공(晋文公)이 삼군(三軍)을 두고 육경(六卿)을 설치한 이래 육경은 진나라의 군정대권을 장악해왔다.
진평공(晋平公)시기에 이르러, 육경간의 투쟁이 날로 치열해지고 진나라 공실(公室, 황실, 왕실처럼 진나라국군의 작위가 '공(公)'이므로 국군의 일가친척들을 가리킨다)의 실력은 더욱 약화된다. 기원전453년, 한, 조, 위 삼가가 연합하여 지씨(智氏)를 축출한다. 진나라는 이미 실제로 이 삼가에 의해 통치되었다.
기원전403년, 주위열왕(周威烈王)이 정식으로 한, 조, 위를 제후로 책봉한다. 이는 "삼가분진"이 정식으로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위, 조, 한의 세 나라는 정식으로 제후국이 되고, 초(楚), 연(燕), 제(齊), 진(秦)과 나란히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불린다.
3. 진나라 국군의 운명과 최후
"삼가분지"후에 진나라와 그 국군은 바로 멸망하지 않고, 상당한 시간동안 이어졌으며 비참하게 존속하게 된다.
진열공(晋烈公)과 진효공(晋孝公)
기원전403년, 진열공의 재위때 삼가분진이 일어난다. 그때부터 진나라는 실질적으로 위, 한, 조에 의해 통제되었다. 진열공의 재위기간동안 진나라국군의 대우는 계속 나빠진다. 영토를 삼가에 빼앗겼을 뿐아니라, 전패유리(顚沛流離)하게 된다.
진열공의 사망후, 그의 아들 진효공이 즉위한다. 진효공 재위기간, 조성후(趙成侯), 한의후(韓懿侯)는 진효공을 둔류(屯留, 지금의 산서성 장치시 둔류현 일대)로 옮기게 한다. 진효공의 재위기간 진나라 국군의 지위는 계속 하락하여 거의 3가의 허수아비가 된다.
진환공(晋桓公)과 진정공(晋靜公)
진효공이후 아들 진환공이 즉위한다. 진환공의 재위기간동안 조성후와 한소후(韓昭侯)가 다시 한번 진의 남은 영토를 나눠가지고, 진의 국군을 단지(端氏, 지금의 산서성 진성시 심수현 일대)로 보내버린다. 이때의 진나라 국군은 이미 철저히 예전의 휘황과 존엄을 상실한다.
진환공이 죽은 후, 아들 진정공이 즉위하다. 진정공 원년은 제위왕(齊威王)이 측위한 때이다. 진정공의 재위기간동안 진나라국군의 처지는 더욱 어려워진다.
기원전376년, 한, 위, 조 삼가는 진정공을 폐위시키고, 진나라 공실의 나머지 영토를 모두 나눠가진다. 이렇게 하여 진나라는 철저히 멸망하게 된다.
진정공은 진나라라는 제후국의 마지막 군주이다. 그의 최후는 비극적이다. 폐위되어 서민으로 된 후, 그는 행방불명이 된다. 그러나 그가 권력과 지위를 잃은 후, 매우 힘들게 살았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다.
4. "삼가분진"의 영향과 평가
"삼가분진"은 중국역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지닌 중대사건이다. 이는 춘추시대의 종결과 전국시대의 개시를 알림과 동시에 중국역사의 발전궤적을 바꾸어버렸다.
"삼가분진"후 위, 한, 조는 정식으로 제후국이 된다. 그들은 계속되는 병합과 확장을 통해 점차 전국칠웅의 국면을 형성한다. 이 국면이 형성되면서 나중에 진나라가 육국을 통일하는 기반이 형성된 것이다.
동시에, "삼가분진"은 당시 사회변혁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춘추전국시대, 생산력의 제고와 사회갈등의 격화로, 옛날의 귀족제도가 점차 붕괴되고, 새로운 봉건제도가 점차 흥기하기 시작한다.
이 변혁은 당시의 사회구조를 바꾸었을 뿐아니라, 후세의 역사진전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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