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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1356

2차대전시기 진실한 중국: 저항파가 많았을까, 협력파가 많았을까?(2) 글: 허검홍(許劍虹)​항전역사를 되돌아보면, 국군의 저항은 확실히 용맹했고, 중국군민의 희생은 확실히 참중했다. 다만 진정한 저항자는 엄격히 말해서 소수중의 소수이다. 국군사망총수는 320만이다. 당시 전국인구 4억을 놓고 보면, 실제 희생자는 1/100도 되지 않는다. 만일 다시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일본침략에 희생된 민중의 수량을 더해보면, 1,500만 내지 3,500만이다. 역시 1/10이 되지 않는다.​대후방은 제외하고 계산한다면, 즉 중경국민정부통치지구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협력자였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필자가 인터뷰한 항일공군전의 영웅이자 중앙항공학교 제5기졸업생인 장광명(張光明)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그들의 공항주변에는 자주 일반백성이 쏘는 신호탄이 일본폭격기에 목표를 알려주곤 했다는 .. 2024. 10. 1.
2차대전시기 진실한 중국: 저항파가 많았을까, 협력파가 많았을까?(1) 글: 허검홍(許劍虹)​ 올해 필자는 Hoover Institution 근대중국대만컬렉션의 큐레이터인 린샤오팅(林孝庭, Hsiao-ting Lin)의 초청을 받아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중국대만컬렉션에서 활동했다.​후버연구소는 중국국민당의 "해외당사관(海外黨史館)"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찌기 장개석, 장경국의 일기를 보관하고 있었으며, 작년에 장씨집안과 차이잉원정부(蔡英文政府)간에 합의를 체결해서, 장개석과 장경국의 일기를 대만으로 돌려받은 바 있다. 당연히 선결조건은 후버연구소에 장개석 및 장경국일기의 영인본을 남겨두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양안정권이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수정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장개석, 장경국은 중화민국의 국가원수로, 그들의 일기가 대만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 2024. 10. 1.
후금(後金)과 피의 원한이 있는 요인(遼人)은 왜 후금의 편에 서게 되었을까? 글: 자귤(紫橘)​일반적인 논리대로라면, 외적이 쳐들어와 너의 친척과 동네사람들을 죽였다면, 너는 마땅히 그들과 불공대천의 원수가 될 것이고, 가장 강경하게 대항할 것이며,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최소한 그들의 편에 서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말기 이런 기이한 현상이 발생해버린다. 후금은 요동(遼東)에서 피비린내나는 도살을 감행했고, 요인(遼人)을 붙잡아 노예로 삼는다. 원래 후금과는 피의 원한이 있는 요인들은 나중에 후금의 중요한 맹우가 된다. 이건 또 어떻게 된 일일까?​"요민수요토(遼民守遼土)의 시작​천계(天啓)시기, 요동의 국면은 혼란에 빠지고, 명나라는 약세에 처하게 된다. 당시의 요동독사(遼洞督師) 손승종(孫承宗)은 참모 모원의(茅元儀)의 건의를 받아 조정에 를 올려, 정식으로 "요동.. 2024. 9. 22.
사안지란(奢安之亂): 명말 서남지역에서 17년간 지속된 반란 글: 자귤(紫橘)​천계(天啓)원년에 발발한 사안지란은 명말청초 서남지역에서 널리 알려진 대동란이다. 이 반란은 17년이나 끌었으며, 그동안 중경(重慶)이 함락되고, 성도(成都)가 102일간 포위당하며, 준의(遵義)도 두 차례 함락되었다. 반란의 여파는 사천, 운남, 귀주등지에 미쳤으며, 명나라조정은 운귀총독(雲貴總督) 주섭원(朱燮原)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5개성의 관군을 끌어모아 9년간 전투를 벌이고, 그후에도 다시 8년간 여파를 겪으면서, 17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비로소 평정할 수 있었다. 사안지란이 평정된 후, 명나라조정은 영녕(永寧)에 개토귀류(改土歸流)의 정책을 실시하여, 영녕사씨(永寧奢氏)라는 천년토사(千年土司)를 철저히 뿌리뽑는다.​영녕사씨​서남지역은 자고이래로 "철타토사(鐵打土司), 유수황제.. 2024. 9. 19.
황소양(黃蕭養)의 난: 명나라때 남쪽지방 최대규모반란 글: 미남덕(米南德)​1449년은 대명왕조에 다사다난했던 한 해이다. 먼저 명영종(明英宗)이 토목보(土木堡)에서 패배한 후 오이라트몽골에 포로로 잡히고, 다시 오이라트몽골은 북경을 몇달간 포위공격한 바 있다. 재정지출이 커서 재정부족에 시달리게 되었을 뿐아니라, 사람의 이동조차 난국으로 제한되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국은 인심이 흉흉하고, 여러가지 감춰왔던 문제들이 수면위로 드러나게 된다.​예를 들어, 영남(嶺南)의 주강(珠江)델타지역은 황소양집단을 우두머리로 하는 대규모반란이 일어난다. 이들 반란군의 출현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배후에는 상당히 복잡한 사회적 경제적 요소가 숨어 있다. 나중에 실패로 끝나면서 역시 광범위학 영향을 끼쳐, 이 지역의 역사발전에 수백년간 그 여파가 미치게 된다.​고대 통일.. 2024. 9. 17.
이성량(李成梁)의 군현조선론(郡縣朝鮮論) 글: 자귤(紫橘)​명나라말기에 이성량은 동북아의 관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반적으로 그가 요동(遼東)에 있는 동안 여진(女眞)의 굴기를 효과적으로 억제하고, 명나라에 충성한 장수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608년의 한 사건은 이성량의 허약과 야심을 보여준다. 이성량이 조선을 군현으로 삼으려한 거동은 이미 명말군벌할거의 싹이 드러난 것이다. ​광해군의 계위를 둘러싼 갈등​광해군(光海君) 이혼(李琿)은 조선 선조(宣祖)의 차남(次男)이다. 명나라의 책봉을 받지도 않은 상황하에 1608년에 왕으로 등극한다. 급히 등극하게 되고, 게다가 명나라에서 그를 세자(世子)로 책봉하는 것을 거절당하자, 광해군의 통치는 불안정하게 된다. 자신의 정통지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광해군은 즉위ㅜ 즉시 사람을 북경으로 보내어.. 2024. 9.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