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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명)

오교병변(吳橋兵變): 닭 한 마리가 불러온 참사, 대명과 후금의 운명을 바꾸다.

by 중은우시 2024. 12. 23.

글: 약진역사(躍進歷史)

역사는 이렇게 황당할 때가 있다. 정말 사소한 일이 천군만마의 국면을 가볍게 뒤흔들 수도 있는 것이다. 숭정4년(1631년), 산동(山東)의 오교(吳橋)에서 닭 한마리로 인해 일어난 충돌이, 전체 정예 화포부대의 반란을 불러온다. 대명이 거액을 들여 만든 "정예화기영"이 단시간내에 등주성(登州城)을 함락시키고, 후금에 투항하여, 후금이 대명을 공격하는 핵심부대가 된다. 오늘날의 이야기에 비유하자면, 수십년의 시간을 들여 연구개발한 첨단무기가 적군에 고스란이 넘어간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명나라말기 요동에서는 전투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누르하치의 후금이 굴기한 후, 대명의 전통기병과 보병은 이미 계속 패퇴하는 추세였다. 특히 살이후전투(1619년)이후, 명군의 열세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후금의 기병은 기동력이 좋았는데, 명군은 효과적인 원거리화력이 없어서, 전혀 반격할 수가 없었다.

전기는 천계6년(1626년)에 나타난다. 영원(寧遠)전투에서 명나라장수 원숭환(袁崇煥)이 "홍이대포(紅夷大砲)"를 이용하여 후금을 물리치고, 심지어 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결국 사망한다. 이번 승리로 명나라조정은 깨닫게 된다: 화기가 유일하게 국면을 뒤집을 수 있는 무기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규모로 홍이대포를 구매하고, 모방하여 제조한다. 그리고 포르투갈인등 외국인기술자들을 통해 전문적인 화기부대를 건립했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산동 등주에 주둔하고 있던 "등주화기영(登州火器營)"이었다. 이 부대는 명나라가 전력을 기울여 만든 정예부대이다. 23문의 홍이대포, 200문이상의 중소형화포, 그리고 수천자루의 화총(火銃)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뿐 아니라, 이 부대는 대량의 유럽에서 모셔온 화포전문가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심지어 탄도계산, 대포주조공법까지도 모두 당시 세계최고수준까지 끌어올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명나라조정의 이 부대는 후금에 대항하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아쉽게도, 역사의 흐름은 항상 어떻게 될지 모른다. 숭정4년, 재난이 일어난다.

숭정4년 칠월, 후금군이 요서의 요새 대릉하(大凌河)를 포위공격했다. 수비장수 조대수(祖大壽)를 지원하기 위해 명나라조정은 등주의 화기영 주력을 보내도록 지시했고, 유격장군(遊擊將軍) 공유덕(孔有德)이 지휘하여 요동으로 간다. 공유덕의 계획은 여러번 좌절된다: 먼저 해로로 가고자 했으나, 풍랑을 맞아 할 수 없이 육로로 바꾸어야 했다. 이어서 산동 오교현에 주둔하고 있을 때, 보급이 부족하여 현지 백성들과 충돌이 일어난다.

충돌의 도화선은 바로 한 마리 닭이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현지의 동림당(東林黨)의 거물 왕상춘(王象春) 집안의 노비가 닭을 한 마리 사서 돌아가는데, 마침 화기영의 병사를 만난다. 병사는 군량부족으로 기분이 좋지 않은 때여서, 그 닭을 빼앗아간다. 왕상춘이 그 소식을 듣고 대노하여, 사람을 데리고 가서 그 병사를 붙잡아 길거리를 끌고 다녔다. 이 거동은 화기영의 장병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를 군대의 존엄을 모욕하는 것이라 여긴다. 그리하여 화기영의 사병들이 왕상춘을 죽여버고, 변란이 폭발하게 된다.

공유덕은 부하들을 다독이려 하였으니, 사태는 이미 통제상실상태가 되어버렸다. 병사들은 이 변란은 사형에 처해질 죄라는 것을 잘 알았다. 속수무책으로 죽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파부침주하고자 한다. 그들은 공유덕을 압박하여 함께 반란에 참가하여, 산동 등주성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일찌기 명나라의 희망이었던 화기영이 순식간에 명나라조정의 심복대환이 되어버린 것이다.

공유덕의 행동은 신속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그는 반군을 지휘하여 공성약지했고, 화기영의 우세한 화력을 바탕으로 가볍게 임읍(臨邑), 능현(陵縣)등지를 함락시킨다. 결국 그들은 등주성 아래에까지 도착했고, 예전의 상사인 손원화(孫元化)를 공격하게 된다.

등주성 안에서 손원화는 사색이 된다. 이 화기영을 만든 사람으로서, 그는 누구보다 화기영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직접 만든 홍이대포가 지금은 정확한 탄도계산과 맹렬한 화력으로 자신이 지키는 성벽을 포격하고 있었다. 몇 차례의 포격이 지나간 후 등주성의 성벽은 깨져버리고, 수비군은 고개도 들 수 없게 된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등주참장(登州參將) 경중명(耿仲明)도 성내에서 반군에 호응했다. 그리하여 성벽방어는 철저히 무너지고 손원화는 포로로 잡힌다.

공유덕은 등주를 함락시킨 후, 부대를 이끌고 후금에 투항한다. 이 결정은 명나라조정에 치명적이었다. 공유덕은 1.2만명의 정예병사를 데리고 갔을 뿐아니라, 20문의 홍의대포, 300여문의 중소형화포 그리고 대량의 화포주조기술자와 훈련을 거친 포수를 데리고 가서 홍타이시에게 바친 것이다.

홍타이시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사서 기록에 따르면, 그는 직접 성의 십리밖으로까지 나가서 맞이했다고 한다. 거의 좋아서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후금은 이전에 비록 화포를 모방하여 제조해보았지만, 전문기술부족으로 진전이 매우 느렸었다. 그런데, 공유덕이 오면서 후금의 화기부대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후금은 "오진초합(烏眞超哈, 만주어로 중병기라는 의미임)"부대를 결성하고, 청나라에서 공성할 때 주력부대가 된다.

이후 후금의 공성 전략은 완전히 바뀐다. 그들은 더 이상 기병으로 성을 포위하지 않았고, 홍이대포로 맹렬히 성벽을 부순 후, 성벽이 무너진 곳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청군이 입관한 후, 홍이대포의 위력은 더더욱 분명해진다. 남명군과 농민군은 모두 홍이대포의 위력에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어떤 사람은 명나라의 가장 큰 실패는 기술이 아니라 관리였다고 말한다. 화기영의 단속이든 지방사신과의 갈등 조정이건, 명나라조정은 효과적인 수단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공유덕의 반란은 그저 일련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발발한 것일 뿐이다.

이 역사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과학기술과 자원이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이런 자원을 어떻게 운용하느냐가 성패를 결정하는 관건이 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