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과 역사사건1389

유태인들은 왜 중국 만주로 몰려들어왔을까? 글: 나일소(那日蘇) 유태인들의 상업적 두뇌는 사람들이 즐겨 얘기하는 주제이다. 과거 중국의 만주는 황량한 땅이라고 여겨졌었다. 유태인의 고향인 중동에서 만주까지는 거리가 수천킬로미터나 된다. 그러나 풍운이 휘몰아치던 근대에 머나먼 공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유태인과 만주는 서로 얽히게 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실제로는 연원이 깊다. 19세기말부터 유태인들은 대량으로 중국의 만주지역으로 몰려든다. 그들은 자신의 장사수완을 가지고 만주지역에서 경제기적을 일궈낸다. 하르빈의 길거리에서 유태인들은 한때 상업의 80%를 차지한 바 있다. 그러나 그들은 점점 이 땅에서 사라졌고, 지금은 유태인스타일의 건축과 묘지만이 옛 시절을 기억나게 해주고 있다. 만주의 근대역사는 기본적으로 종횡의 두 철도.. 2021. 4. 16.
이릉지전(夷陵之戰)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을까?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이릉지전은 동한말기 3대전투중 하나이고, 또한 최후의 대형전투이다. 이 전투이전에 촉한과 동오의 합작관계는 육손이 관우를 기습함으로써 끝났다. 쌍방은 전우에서 적이 된 것이다. 조위는 그래서 잠시 숨돌릴 기회를 갖느다. 촉한은 이 전투에서 일패도지했고, 명장과 정예병사들의 손실이 참혹했다. 이릉지전을 시작하기 전에, 동오는 위에서 아래까지 촉한에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어쨌든 육손이 한 행위는 군자의 행동은 아니었다. 동맹국이 적국과 싸우는 틈을 타서, 힘을 보태지 않는 것 정도라면 몰라도, 오히려 등뒤에서 칼질을 했다. 그리하여 관우, 관흥 부자는 피살되고, 유비, 유봉부자는 멀어졌으며, 맹달이 촉한에 투항하고, 더더욱 간접적으로 장비의 죽음을 가져온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2021. 2. 27.
점간처(粘杆處): 옹정제가 만들고, 가경제가 없앤 신비의 특무조직 글: 양우모초(样雨慕初) 이전에 의 자매편 시리즈를 볼 때, 옹정이 가장 의지하던 기구의 명칭이 '점간처'라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왜냐하면, 이름을 너무 성의없이 지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그건 작가가 무신경해서라고 생각했다. 인식 속에서 고대의 각 부문의 명칭은 장엄하였다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역사에 관심을 가지다보니 원래 '점간처'가 역사상 진짜 존재했던 것이고, 옹정제때 영향력이 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점간처"라는 명칭은 겉으로 보기에 별 것이 없어 보이지만, 아주 실질적인 지하특무기관이었다. 명나라때의 동창, 서창과 금의위에 해당한다. 주요작용은 정보를 수집하고, 백관을 감찰하는 것이다. 이는 황제에게 적지 않은 편의와 정보를 제공하게 되고, 황제가 전면적으로 조정을 장악.. 2021. 2. 9.
아편전쟁때 청군과 영국군의 진실한 사상자 숫자는...? 글: 문방장거(文房掌柜) 제1차 하문지전(厦門之戰): 1840년 7월 3일 청군 전사 9명, 부상 16명. 영국군 사상자 없음. 제1차 정해지전(定海之戰): 1840년 7월 5일 청군 전사 13명, 부상 13명, 영국군 사상자 없음 (청군참전병력 1540명, 정해총병 장조발(張朝發)은 부상을 입은 후 사망했고, 정해지현 요회상(姚懷祥)은 자결함. 대각사각지전(大角沙角之戰): 1841년 1월 7일, 영국군은 정면포격을 선택하고, 육군은 측면에서 포위공격하는 전술을 쓴다. 청군은 277명이 전사하고, 중상을 입고 사망한 자가 5명, 부상 462명이다. 영국군은 부상 38명이다. 청군의 부장(副將) 진련승(陳連昇), 좌령(佐領) 유륭(裕隆, 만주족)이 전사하다. 호문지전(虎門之戰): 청군총병력 11,000명,.. 2021. 1. 30.
유통훈(劉統勛): 청나라의 보기 드문 청백리 글: 청림지청(靑林知靑) 그의 아들 유라과(劉羅鍋, 劉鏞)과 비교하면 유통훈의 명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건륭제 시절을 묘사하려면, 소설이건 드라마이건 그를 빠트릴 수는 없다. 필자가 보기에 그의 일생의 공적은 아들 유라과보다 훨씬 크다. 청왕조때 12명의 황제가 있었는데, 모두 8명의 문신들만이 최고영예의 시호인 "문정(文正)"을 받았다. 거기에 유통훈이 들어 있다. 당연히 이 8명 중에서는 대부분 자격미달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탕빈(湯斌)과 두수전(杜受田)같은 사람을 몇 사람이나 알고 있는가? 가장 명실상부한 사람은 유통훈 외에 오직 증국번(曾國藩)이 있을 뿐이다. 심지어 종묘에 배향된 장정옥(張廷玉)이나 '표호장(裱糊匠)' 이홍장(李鴻章)조차도 '문정'의 영예는 받지 못했다. 유통훈.. 2021. 1. 18.
30만 태평군(太平軍)이 1만 상군(湘軍)에게 패배한 원인은...? 글: 기점문사(起點文史) 태평천국의 마지막 대결전인 천경보위전(天京保衛戰)때 왜 30만의 태평군은 1만의 상군을 막아내지 못했을까? 그건 도대체 무슨 이유때문일까? 태평천국에 30만의 군대가 있었을까? 그건 확실치 않다. 다만 최소한 20여만은 된다. 상군은 처음에 확실히 1만여명이다. 그러나 계속 외부의 증원군을 받으면서 외곽포위를 추가해 나갔다. 이때의 청군은 아마도 10만가량일 것이다. 즉, 전쟁에 총투입된 태평천국은 20여만이고, 청나라군대는 10만가량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태평천국이 숫적으로 우세를 점하고 있다. 즉 이런 상황하에서 태평천국은 실패했다. 그 이유가 무엇일지를 하나하나 분석해보기로 하자. 1. 태평군의 전투력이 하강했다. 태평천국을 얘기하자면, 처음 금전의거(金田起義)때, 겨우.. 2021. 1.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