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원)

몽금십년전쟁(蒙金十年戰爭): 초원제국과 삼림제국의 결전

중은우시 2021. 4. 21. 15:31

글: 문재봉(文裁縫)

 

1209년, 몽골제국은 건립된지 이미 3년이 지났다. 징기스칸은 정예병을 양성해서 군사력이 강성해진다. 그는 초원의 백성들을 모조리 자신의 휘하로 거두어 들였다. 점점 세력이 커진 징기스칸은 다음 확장목표로 금나라를 겨냥한다. 이전까지 몽골은 금나라의 속국이었다. 다만 현재 몽골은 이미 옛날의 몽골이 아니다. 징기스칸은 이제 몽골은 그 어느 나라와도 일전을 벌일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징기스칸은 금나라가 이전에 목려(木驢)의 혹형으로 안바하이칸을 처형한 원한을 잊지 않았다.

 

이 해에 금장종(金章宗)이 붕어하고, 완안영제(完顔永濟)가 황위를 승계한다. 그는 문약한 서생이고, 징기스칸은 이전에 그를 만나본 적이 있는데, 그를 무시했다. 다음 해, 완안영제는 사신을 몽골로 파견해서,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알린다. 그리고 징기스칸에게 예절에 따라 무릎꿇고 절을 하며 조서를 받으라고 요구한다. 징기스칸은 금나라 사신에게 묻는다: "새 천자는 누구인가?" 사신은 이렇게 대답한다: "위소왕(衛紹王) 완안영제입니다." 징기스칸은 완안영제는 무능한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남쪽을 향해 침을 뱉은 다음 이렇게 말한다: "나는 황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완안영제같은 유약한 자에게 뭘 무릎꿇고 절을 한단 말인가." 말을 마치고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해 있는 금나라사신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버린다.

 

금나라사신은 돌아온 후, 금나라조정에 징기스칸의 무례한 언사를 보고한다. 완안영제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고, 변방의 방어를 강화한다. 오사보(烏沙堡)를 보수하여, 징기스칸이 변방으로 다가오면 일거에 붙잡아 죽이고자 한다. 징기스칸은 그 소식을 전해 들었고, 금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한다. 그리고 금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서하(西夏)를 쳐서 측면의 위협을 제거해야 했다. 그리하여, 징기스칸은 먼저 서하를 쳐서 굴복시킨다. 서하황제 이안전(李安全)은 자신의 딸을 징기스칸에게 보내어 강화한다. 그리고 몽골이 쳐들어왔을 때, 금나라가 전혀 도움을 주지 않은 것에 분노하여 그 보복을 위해 서하는 오히려 몽골이 금나라를 치는 것을 돕게 된다.

 

징기스칸은 금나라를 공격하는데 후고지우(後顧之憂)를 제거하면서, 동시에 금나라와 교역하는 상인들을 통해, 당시 금나라내부의 정치, 경제, 군사와 지리교통등 상황을 파악한다. 그렇게 금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충분히 마친다.

 

1121년, 징기스칸은 극로륜산(克魯倫山)에 올라, 하늘에 기도한다. 그리고 안바하이칸의 복수를 명목으로 금나라 토벌에 나선다. 당시, 쌍방의 실력은 여전히 차이가 컸다. 금나라는 백년이상 발전을 거쳐, 인구가 4천만을 넘고, 병력은 백만을 넘었다. 수퍼대국이었다. 그러나 몽골은 인구가 겨우 백만이고, 병력도 겨우 십만가량이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의 이번 전투목적은 즉시 금나라를 멸망시키는데 있지 않았고, 자원을 약탈하여, 금나라를 약화시키고 자신을 키우는데 있었다. 오사보는 무주(撫州)의 서북쪽에 위치해 있고, 금나라가 몽골을 방어하는 중요한 보루였다. 주변에 있는 오흑사석(烏黑沙石)으로 쌓아서, 오사보라고 불렸다. 오사보는 몽골이 남하하는 길목을 막고 있었고, 특수한 군사적 가치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오사보는 서경(西京, 지금의 산서성 대동)의 병풍이었다. 몽골군대가 오사보만 돌파한다면, 남으로 장성을 넘을 수 있었고, 금나라의 서경을 압박할 수 있었다. 몽골과 금나라의 제1차 대규모전쟁은 여기에서 폭발한다. 징기스칸은 부하인 제베(哲別)에게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도록 명령한다. 칠월에 이르러, 제베는 오사보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오사보는 아주 견고했다. 그리고 암도(暗道)로 후방의 오월영(烏月營)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몽골군은 오사보를 강공하고, 오월영의 금군은 암도를 통해 계속 증원왔다. 그리하여 몽골군이 오랫동안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한다. 나중에 제베는 이 비밀을 알아차린다. 그는 병력을 이끌고 오사보를 우회하여 오월영을 기습한다. 이렇게 오월영의 원군을 차단한다. 오사보는 후방지원을 잃었고, 결국 금방 붕괴된다. 몽골군이 쉽게 함락시키고, 남은 금나라병사들은 속속 도망친다. 이번 전투에서 징기스칸은 금나라의 실력이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더욱 안심하고 대담하게 그들을 공격한다.

 

오사보전투이후, 금군의 총사령관 완안승유(完顔承裕)는 변방의 중요한 보루를 잃었으므로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는 몽골군의 기세가 흉맹한 것을 보고 징기스칸이 금군의 주력을 우회하여 직접 중도(中都)로 쳐들어가는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스스로 성을 포기하고, 삼십만의 병력을 야호령(野狐嶺)에 배치하여 방어한다. 완안승유는 십만대군을 이끌고 후방에서 지원했다. 그는 병사를 나누어 험준한 요새를 나누어 방어하게 하여, 철통같이 몽골군의 진격로를 막았다.

 

완안승유가 삼주(三州)를 포기하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견벽청야(堅壁淸野)조차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양식과 인구를 그냥 몽골인들에게 넘겨준 셈이 된다. 몽골군은 삼주를 가볍게 소탕하고 그후에 야호령 일대로 진입한다.

 

완안승유가 생각지 못했던 것은 산세와 지형은 군대의 방어능력을 강화시켜주었지만, 자신의 병력을 분산하면서, 장수의 지휘전달속도, 군대간의 상호지원속도가 크게 느려진다. 적군은 한 곳에 많은 병력을 투입하여 돌파하려하면 나머지 험준한 요새의 병력들은 그저 놀고 있는 셈이 된다. 그래서 야호령은 대병력이 결전을 벌이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다. 군사재능이 뛰어난 징기스칸은 완안승유의 작전에서의 헛점을 바로 발견한다. 그는 즉시 병력을 집중시켜 한 곳만 돌파하는 전략을 취한다. 중로와 좌로 양군의 십만병력을 이끌고, 집중적으로 획아취(獲兒嘴)를 공격했다. 몽골의 대장 무카리(木華黎)는 적은 수가 많고 아군은 수가 적은 상황하에서 반드시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워야만 결전을 별일 수 있고 승리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직접 결사대를 이끌고, 창을 들도 말을 몰아, 금나라군대의 적진으로 뛰어든다. 지형이 험준하여, 몽골군대는 모두 말에서 내려 전투를 벌여야 했다. 투지와 사기로 금군을 대패시킨다. 무카리는 계속 돌진하여 완안승유의 중군까지 쳐들어간다. 징기스칸은 중군을 지휘하여 뒤따랐다. 이때 완안승유는 이미 군대에 대한 지휘능력을 상실한다. 대부분의 군대를 야호령의 각 요새에 분산배치시켜 놓았기 때문에 군대에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더더구나 지원은 생각할 수도 없다. 몽골인은 기세가 흉맹했고, 벼락이 내려치는 것같았다. 금나라군대는 파죽지세로 무너졌고, 그는 일찌감치 간담이 서늘해진다. 그는 주변의 군대를 이끌고 선덕(宣德) 방향으로 도망친다. 총사령관의 행방이 불명해지니, 금군의 병력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군심이 흔들릴 수밖에 없어, 속속 흩어져 도망치게 된다. 몽골군은 산과 들판에서 금군을 추격해 죽엿따. 사망자가 산과 내에 가득했다. 금군의 정예는 이 전투에서 거의 절반을 잃는다. 몽골군은 승기를 틈타 계속 추격했고, 금군의 시신은 백리에 걸쳐 펼쳐져 있게 된다.

 

완안승유의 곁에는 수천명이 있었다. 도망하는 길에 적지 않은 도망병들이 그와 회합한다. 회하보(澮河堡)까지 도망친 후 그는 다시 수만명을 모은다. 그러나, 그가 아직 숨도 돌리기 전에 징기스칸의 추격병이 도달한다. 몽골군이 이 곳을 포위하고, 쌍방은 삼일간 격전을 벌인다. 금군은 최후의 저항능력도 상실한다. 징기스칸은 직접 3천 정예병을 이끌고 적진으로 뛰어든다. 이어 수만의 몽골군이 금군에 전면적인 총공격을 시작하여, 선혈이 회하천을 붉게 물들인다. 완안승유는 다시 선덕으로 도망쳐서 다행히 목숨은 건진다. 이때부터 금나라는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게 되고, 더 이상 몽골과 맞서서 제대로 싸우지 못하게 된다.

 

구월, 몽골군대가 거용관(居庸關)에 도착한다. 금나라의 수비장수 독길사충(獨吉思忠)은 거용관을 버리고 도망친다. 제베는 몽골군을 이끌고 순조롭게 거용관으로 진입하여 금나라의 중도(북경)으로 다가간다. 완안영제는 중도의 계엄을 선언하고, 각지의 군대를 불러오은다. 제베는 비록 중도를 포위하였지만, 중도의 성은 높고 견고했다. 단기간내에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여기에 금나라 장수 완안천기(完顔天驥)가 대군을 이끌고 도착한다. 성내에 복병을 두어 몽골군이 성으로 진입했을 때 손실이 엄청났다. 그후, 금군은 다시 기회를 틈타 몽골군영을 기습한다. 제베는 할 수 없이 퇴각명령을 내린다.

 

이와 동시에, 징기스칸은 그의 세 아들 주치, 차카타이, 오고타이에게 각자 군대를 이끌고, 3로로 나누어 서남에서 금나라경내로 진입하게 한다. 운내, 동승, 무주, 삭주와 풍주등지로 진격한다. 대군은 파죽지세였고, 금군은 소식만 들으면 도망쳤다. 서경의 수비장수 호사호(胡沙虎)는 성을 버리고 도망쳤으며, 도중에 몽골군을 만나자, 다시 삼백리를 달려서 도망친다. 결국은 중도로 도망쳐 들어간다. 십이월, 제베는 금나라의 동경(東京, 지금의 요녕성 요양)을 공격하나, 함락시키지는 못한다. 그는 오백리를 후퇴하는 것처럼 가장한다. 그후 수비군이 방어에 느슨한 틈을 타서 경기병으로 밤낮을 달려 일거에 동경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1달간 약탈을 진행한 후 돌아간다. 몽골과 금나라가 전쟁을 벌일 때, 거란인 야율유가(耶律留哥)는 거병하여 금나라에 반란을 일으킨다. 몇달 후에는 반란군의 규모가 십만으로 늘어난다. 금나라는 대군을 보내 토벌하려했고, 야율유가는 징기스칸에게 사신을 보내어, 몽골의 지원을 얻는다. 그리하여 여러번 금나라군대를 격패시킨다.

 

가정5년(1212년) 칠월, 징기스칸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금나라를 친다. 첫번째 목표는 금나라의 서경 대동부였다. 몽골군은 먼저 선덕을 격파하고, 덕흥을 격파했다. 이어서 서경을 포위공격한다. 징기스칸은 위성타원(圍城打援) 즉 성을 포위하고 지원군이 오는 것을 격파한다는 전략을 쓴다. 서경의 동북쪽 밀곡구(密谷口)에 매복을 해서 금나라군의 총사령관 오둔양(奧屯襄)의 지원군을 섬멸한다. 서경을 공격할 때, 징기스칸은 날아온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는다. 그리하여 할 수 없이 음산(陰山)으로 철수명령을 내린다.

 

1213년 가을, 징기스칸은 세번째로 남하하여 금나라를 공격한다. 그들은 회래(懷來)에서 금나라의 총사령관 완안강(完顔綱), 술호고기(術虎高琪)가 이끄는 십만 금병을 격패시킨다. 그후 승기를 타고 거용관의 북쪽까지 진격한다. 그후 병력을 3로로 나누어 많은 금나라의 성을 격파한 후, 중도 부근에서 회합하여 중도를 포위한다. 가정6년(1213년) 팔월, 금나라의 내부에 대란이 발생한다. 당초 호사호는 자형관으로 도망갔을 때, 관청의 금은을 약탈하고, 내수현령을 죽였다. 완안영제는 그를 처벌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를 다시 부총사령관으로 기용하여, 병력을 이끌고 중도의 성북쪽에 주둔하도록 한다. 그후 호사호는 더욱 발호했다. 완안영제는 사람을 보내 그를 질책한다. 호사호는 이로 인해 원한을 품게 되고, 그후 정변을 일으켜, 완안영제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완안찬(完顔纂)을 새로운 황제로 세운다. 그가 바로 금선종(金宣宗)이다. 

 

금선종은 몽골군대를 아주 무서워했다. 게다가 궁정이 혼란에 빠져 몽골과 더 이상 싸울 여력이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을 보내 몽골에 화의를 청한다. 징기스칸은 금나라를 일시에 멸망시키기는 어렵다는 것을 알아서, 상대방의 화의요청을 받아들인다. 가정7년(1214년) 삼월, 금나라는 오백 동남, 오백 동녀와 대량의 금은주보를 바친다. 그리고 기국공주(岐國公主)도 징기스칸에게 바친다. 그후 쌍방은 정식으로 의화하며, 징기스칸은 군대를 이끌고 거용관으로 물러난다. 금나라는 기뻐서 날뛰었지만, 이는 그저 그들 멸망의 시작일 뿐이었다.

 

몽골대군은 초원으로 돌아간 후, 징기스칸이 사신을 남송에 보낸다. 몽골과 남송이 연합하여 금나라를 일거에 멸망시키자고 제안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사신이 금나라에 붙잡혀 중도에 억류된다. 금선종은 징기스칸의 의도를 파악했고, 아주 당황한다. 몽골이 다시 쳐들어올 것을 우려했다. 그리하여 중도를 버리기로 결정하고, 변경(汴京, 지금의 하남성 개봉)으로 천도한다. 여러 대신들이 말렸지만, 금선종은 듣지 않고 천도를 고집한다.

 

가정7년 오월, 금선종이 황급히 남하하고, 태자를 중도에 남겨 지키게 한다. 대신 완안승휘(完顔承暉)가 총사령관이 되고, 말념진충(抹捻盡忠)이 부총사령관이 되어 그를 보좌한다. 이때 남천은 비록 겁을 먹은 행위이고, 금나라의 위엄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여기에서 금나라의 국운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육월, 징기스칸은 금나라가 남천했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견책한다: "의화하고서 남천을 한다는 것은 몽골이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의화는 그저 헛된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후 징기스칸은 다시 병력을 일으켜 금나라를 치기로 결심한다.

 

금선종은 남천하는 도중에 금나라에 투항한 거란인들에게 나눠준 장비와 마필을 금나라(여진인)에 돌려달라고 명령한다. 거란인들을 그 말을 듣고 차별을 받는다고 여긴다. 그리하여 그들은 양향(良鄕)에서 반란을 일으켜, 금나라의 총사령관을 죽이고, 거란인 작답(斫答)을 총사령관으로 옹립한다. 그리고는 오히려 중도를 공격하며, 사신을 몽골로 보내어 몽골에 투항한다. 징기스칸은 이때 금나라가 천도하면서 인심이 흔들리고 있으므로, 공격하기에 좋은 기회라고 판단한다. 그는 사무카 바투르(三木合拔都), 금나라에서 항복해온 장수 석말명안(石抹明安)등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고북구(古北口)를 통해 금나라 경내로 진입한다. 그리고 거란인과 회합하여 중도를 포위공격한다. 징기스칸은 또한 무카리에게 병력을 이끌고 요서와 요동을 공격하게 한다. 징기스칸은 그리고 부장의 의견을 들어, 중원의 기술을 이용하여 몽골포병을 만든다.

 

몽골대군이 남하하고, 중도가 곧 포위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금선종은 중도에 남겨둔 태자의 신변에 불측의 사태가 있을까 우려하여, 급히 태자에게 변경으로 도망치라고 명한다. 태자가 떠난 후, 중도의 군심은 더욱 불안정해진다. 완안승휘는 급히 변경으로 위급함을 알렸고, 금선종은 오고론경수(烏古論慶壽), 영석(永錫)에게 병력을 이끌게 하고, 이영(李英)으로 하여금 군량을 조달하게 하여 중도로 지원을 보낸다. 사무카 바투르는 위성타원의 전법을 써서 패주에서 이영을 격패시키고, 이영을 죽인다. 경수와 영석은 그 소식을 듣자 모두 도망친다. 중도를 구원하기 위한 군량이 단절되고, 모조리 몽골군에 노획된다. 중도는 양식이 단절되고, 내외가 불통하게 된다. 총사령관 완안승휘는 대세가 이미 기운 것을 보고 음독자결한다. 부총사령관 말념진충등은 성을 빠져나와 남으로 도망친다. 금나라의 대신 야율초재(耶律楚材)는 조정이 이렇게 부패무능한 것을 보고 징기스칸을 보좌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하면 대업을 이룰 수 있고, 또한 몽골인들에게 무고한 백성을 마구잡이로 죽이지 말도록 설득하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중도의 성안에는 총사령관이 없어, 금군은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석말명안은 징기스칸에게 승전보를 알리고, 중도성내로 진입한다. 징기스칸은 사람을 중도로 보내, 획득한 전리품을 점검한다. 동시에 그는 사신을 보내 금선종에게 투항을 권유한다. 금선종에게 황제칭호를 포기하고, 하북과 산동등의 땅을 내놓으며, 하남왕으로 고쳐 봉하겠다는 것이다. 금선종은 금나라를 진흥시킬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고, 당연히 망국지군이 되고 싶지 않았다. 더더구나 이처럼 굴욕적인 내용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옛날 금나라가 송나라를 핍박할 때는 상대방이 얼마나 굴욕적으로 느낄지는 생각지 않았는데, 이제는 세월이 바뀌어 자신이 옛날 송나라와 같은 처지에 이르고 만 것이다.

 

금나라의 생사존망의 순간에 금나라의 대장 포선만노(浦鮮萬奴)는 동경으로 도망친다. 그후 금나라를 배반하고 스스로 왕이 되며, 국호를 대진(大眞)이라 하고, 연호를 천태(天泰)로 한다. 가정9년(1216년), 그는 몽골에 투항한다. 얼마 후에는 몽골을 배반하도 독립하며 자칭 동하국(東夏國)이라 하며 요동일대에 할거한다. 징기스칸이 중도를 점령한 후, 몽골군대는 사기가 오르고, 목표를 더욱 크게 세운다. 이때의 몽골은 이미 인구와 재물을 약탈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징기스칸의 이후 계획은 중원을 점령하여 토지를 차지하는 것이다.

 

징기스칸은 사무카 바투르를 보내 계속 남정하게 한다. 서하를 거쳐 동관으로 진입하여 하남을 경략하며 계속 변경성으로 직진한다. 금나라가 중병을 배치하여 지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얼마후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돌아간다. 징기스칸은 간기간내에 철저히 금나라를 소멸시키기는 어렵다고 여기고, 주력군을 이끌고 극로룬하로 되돌아간다. 일부 병력을 남겨 게속 금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 시기에, 몽골기병은 금나라 경내를 휩쓸고 다녔고, 계속하여 금나라의 정예병마를 소모시켰고, 대량의 인구와 재물을 약탈한다. 이제 몽골의 금에 대한 1단계작전은 끝이 났다. 2단계로 진입하게 된다.

 

가정10년(1217년) 팔월, 징기스칸은 대장 무카리를 태사(太師)에 임명한다. 그는 무카리에게 말한다: "태행산이북은 내가 가서 치겠다. 태행산 남쪽은 네가 가서 정복해라." 그는 무카리에게 금나라를 치는 전권을 부여한다. 그후 징기스칸은 몽골의 주력을 서쪽으로 향하게 한다.

 

이때 무카리의 수하에는 석말야선(石抹也先), 야율독화(耶律禿花), 그리고 한인으로 투항한 장수인 유백림(劉伯林)과 사천예(史天倪)등이 있었다. 병력은 십여만명이었다. 무카리는 몽골군이 이전에 사용했던 살인방화약탈, 공성후에 성을 지키지 않았던 전통적인 방식을 버리고, 금나라의 제도를 채택한다. 중도와 운중에 각각 행성(行省)을 설치하고, 관리를 두어 다스리게 한다.

 

무카리는 자신의 병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수십만의 병력을 아직 지니고 있는 금나라와 정면으로 싸울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는 금나라의 하북, 산동등지의 통제력이 아주 허약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현지의 지주무장세력을 이용한다. 금나라의 관직을 내리고 그들을 이용해서 성을 지키고 성을 공격한다. 이렇게 하니, 자주 발생하는 것은 금나라에 의탁한 지주무장세력과 몽골에 의탁한 지주무장세력이 서로 싸우는 광경이었다. 몽골은 충분한 준비를 마쳤고, 금나라고 결사항전을 결정한다. 이어진 것은 몽골과 금나라간의 혼전이 끊이지 않는 제2단계 전쟁이다.

 

1217년, 무카리는 대군을 이끌고 중도이남의 지구를 공격한다. 십월, 무카리는 중산부, 신락, 조주 ,형주등지로 진격한다. 금나라의 각지 관리들이 속속 투항한다. 무카리의 부하인 유흥가(攸興哥)는 선봉을 이끌고 대명부를 함락시킨다. 십일월, 무카리의 대군은 산동으로 들어가서, 빈주(濱州), 박주(博州), 치주(淄州), 기주(沂州)등의 주를 함락시킨다. 십이월, 익도(益都)와 밀주(密州)를 함락시킨다. 금나라 절도사 완안우(完顔寓)는 전사한다. 무카리는 다른 군대를 이끌도 동시에 하동으로 진격한다. 십일월, 그들은 태원성을 공격하며, 성의 양식보급을 차단시킨다. 태원부사 오고륜덕승(烏古倫德升)은 병력을 이끌고 저항했고, 몽골군은 퇴각한다. 양식보급은 다시 재개된다. 가정11년(1218년) 여름, 몽골군이 응주(應州)에 집결한다. 팔월, 무카리는 보병, 기병 수만명을 이끌고, 태화령에서 하동으로 진입한다. 대주(代州)등지를 공격한다. 구월, 몽골군은 다시 태원성을 포위한다. 그리고 호성하와 담장을 함락시킨다. 오고륜덕승은 다시 책란을 세워 성을 방어한다. 그는 집안의 재물과 마필을 사병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부하들에게 끝까지 저항할 것을 격려했다.

 

몽골군은 성의 서북쪽을 격파하고, 이곳을 통해 성안으로 쳐들어간다. 오고륜덕승은 전차를 연결시켜 도로를 막는다. 여러번 몽골군의 진입을 막아냈다. 다만 몽골군의 공성 화살과 돌덩이가 비처럼 쏟아져서 수비병사들은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게 된다. 결국 성은 함락된다. 이대 오고륜덕승은 저택으로 돌아가, 고모와 처에게 말한다: "나는 이곳을 몇년간 지켰으나 불행히도 힘이 다했다." 그후 자결한다. 그의 고모와 처도 따라서 자결한다.

 

무카리는 유흥가를 태원에 남겨 지키게 하고, 몽골군대는 계속 분주(汾州)로 진격한다. 분양절도사 겸 경략사 올안와출호(兀顔訛出虎)가 전사한다. 십월, 몽골군은 노주(潞州)등지를 공격하여 함락시킨다. 그리고 평양(平陽)을 향해 진격한다. 이혁(李革)과 권원수좌감군 완안종탄(完顔從坦)은 평양을 지킨다. 태원을 함락당한 후, 완안종탄은 태원을 잃었으며 곧 위기가 평양으로 닥칠 것이라고 보고한다. 하동을 잃은 것은 주둔군이 비교적 적고 원병이 적시에 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평양은 하동의 근본이고, 하남의 장벽이다. 회주 등지의 병력과 합쳐서 노주의 병력을 추가해줄 것을 청하고, 택주등의 병력을 합쳐서 후원으로 삼게 해달라고 한다.

 

다만, 몽골군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리고 신속히 평양성 아래에 도착한다. 평양성이 포위당하고, 성안이 주둔병력은 육천에 이르지 않는다. 금군은 여러번 성을 나서서 적을 막는다. 며칠이내에 손실이 과반을 넘는다. 원병은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 몽골군은 성북으로 접근하고, 제공 곽용(郭用)은 분전하다 생포된다. 그러나 몽골에 끝까지 투항하지 않아 피살된다. 부장 이회덕(李懷德)은 몽골에 투항한다. 평양성은 이렇게 함락된다. 부하들은 이혁에 도망갈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말한다: "나는 이 성을 지켜내지 못했다. 무슨 면목으로 황제를 뵌단 말인가. 너희는 가라." 말을 마치고, 이혁과 완안종탄은 자살순국한다. 태원과 평양이 연이어 함락되고, 하남의 장벽은 이렇게 사라지게 된다.

 

무카리는 이러서 계속 하북, 하동과 산동등지를 공략한다. 1218년 가을, 무카리는 명력을 이끌고 자형구로 간다. 거기서 금군과 낭아령(狼牙嶺)전투를 벌인다. 금나라 장수 장유(張柔)는 전마가 쓰러져 땅에 떨어진 후 생포당한다. 할 수 없이 부하를 이끌고 투항한다. 장유는 원래 역주(易州)의 토호였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했고, 협의를 행하며 호협으로 자칭했다.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한 후, 하북에 대란이 일어났고, 그는 기회를 틈타 친척과 고향사람 수천을 모아 스스로의 마을을 지켰다. 금나라는 그를 회유하며 중도유수 겸 지대흥부사의 직위를 내린다. 몽골에 투항한 후, 무카리는 장유를 중용하여 그에게 관직을 내리고 다른 지주무장세력들을 와해시키게 한다.

 

가정12년(1219년) 무카리는 몽골군과 귀순한 한족군대를 이끌고 하동을 공격한다. 이 기간동안, 장유는 세력을 확충하며 연이어 웅주, 역주, 보주, 안주등을 점령한다. 가리(賈蠫)는 공산대를 지키고 있었는데, 산아래에서 물을 긷는 길이 막히는 바람에 할 수 없이 투항한다. 장유는 원래 금나라 중도경략사 묘도윤(苗道潤)의 부하이고, 가리는 묘도윤의 부사였는데, 나중에 묘도윤이 가리에게 피살당했다. 이때는 원수간에 만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장유는 명을 내려 가리의 심장을 꺼내 묘도윤을 제사지낸다. 장유는 병력을 만성에 모아둔다. 금나라의 진정(眞定)장수 무선(武仙)이 병력 수만명을 모아서 공격한다. 장유는 기발한 전법으로 승리를 거두고 무선의 군대를 격패시킨다. 그후 장유는 승리를 타고 정주와 기양등의 성을 함락시킨다. 그리고 중산부를 공격한다. 무선의 장수 갈철창(葛鐵槍)과 신락(新樂)에서 전투를 벌인다. 그는 화살을 맞아 이빨 두 개가 빠졌는데, 그래도 화살을 뽑아낸 후 계속 전투를 지휘한다. 무선은 다시 만성을 공격한다. 장유는 친히 성벽에 올라 전투를 독려한다. 다시 한번 화살을 맞지만, 여전히 부하를 이끌고 수성한다. 팔월, 장유는 진정의 동쪽 30개 주현을 공격하여 차지한다. 가정 13년(1120년) 칠월, 무카리의 공략하에, 남송 산동제남치중 엄실이 속하의 8개주와 30만호를 이끌고 몽골에 투항한다. 무카리의 군사력이 크게 확충된다. 몽골군의 공세하에, 갈수록 많은 한족지주들이 무카리에게 투항한다. 몽골군은 싸우지 않고도 많은 토지를 얻을 수 있었다. 가정14년(1121년) 사월, 금나라는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한다. 이때 징기스칸은 서쪽을 정벌하러 떠났다. 금나라 사신은 징기스칸을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화의를 청한다. 그러나 거절당한다. 그후 무카리의 군대는 황하이북의 대부분지역을 점령한다. 그리고 병력을 이끌고 서쪽으로 황하를 건너 섬서로 들어간다. 십일월, 몽골군은 연안으로 진격한다. 금나라의 연안지부 완안합달(完顔合達)은 성을 나와 항정하나 몽골군의 매복에 걸려 손실이 참혹했다. 완안합달은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킨다.

 

이때, 태원, 평양, 진정등은 계속하여 몽골과 금나라간에 주인이 바뀌었다. 전쟁은 대치상태로 접어든다. 가정15년(1212년) 팔월, 무카리는 금나라에 수복된 태원부를 다시 공격한다. 태원은 다시 몽골인의 손에 들어간다. 십월, 몽골군은 하중부를 공격한다. 금나라의 후소숙(侯小叔)이 병력을 이끌고 성을 지킨다. 몽골장수 석천응(石天應)은 오래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포위를 풀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후, 석천응은 후소숙이 성을 나온 틈을 타서, 병력을 보내 하중부를 점령한다. 겨울, 무카리는 먼저 봉상(鳳翔)을 공격한다. 그리고는 다시 장안(長安)을 공격한다. 생각지 못하게, 금나라의 좌감군 적잔합희(赤盞合喜)가 성을 굳게 지켰고, 완안중원(完顔仲元)은 성을 나가 싸운다. 몽골군은 피해를 크게 입는다. 무카리는 상황이 좋지 않음을 보고 할 수 없이 철군한다. 가정16년(1123년) 삼월, 무카리는 문희현에서 병사한다. 그가 죽은 후, 아들 패로(孛魯)가 그의 봉호를 승계하여 계속 금나라를 공격한다. 같은 해 금선종이 병사한다. 금애종(金哀宗) 완안수서(完顔守緖)가 즉위한다. 보경2년(1126년), 몽골군이 산동을 모조리 점령한다. 하북과 산동, 산서는 모두 몽골군이 점령한 것이다. 금애종은 이전에 삼면으로 적을 상대하던 전략을 버리고, 남송을 공격하는 것을 멈춘다. 그리고 서하와도 다시 우호관계를 회복한다. 그리하여 역량을 집중하여 몽골에 저항한다. 수십만명의 병력으로 동관을 지킨다. 그리고 정예병 20만을 황햐 이천리의 연하로 보내 4단으로 나누어 지킨다. 그리하여 몽골과 금나라는 황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국면이 형성된다. 몽금십년혼전기간동안, 징기스칸은 서로 향해서 서요와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을 멸망시킨다. 그리고 북상하여 코카서스에서 러시아연합군을 대패시킨다. 징기스칸은 점령한 광대한 영토를 여러 아들들에게 나누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