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共和): 중국역사의 이정표이다.
글: 소가노대(蕭家老大) 주(周)왕조의 통치는 주목왕(周穆王)이후, 전성기에 이른다. 그러나 주려왕(周厲王)의 재위기간에 민생은 도탄에 빠지나, 귀속들은 여전히 주색에 빠져 있었다. 기원전844년, 더 많은 재물을 긁어모아서 마음대로 쓰기 위해, 주려왕은 괵공장보(虢公長父)와 영이공(榮夷公)을 기용하여, '국가독점정책'을 시행한다. 강제로,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왕의 소유로 선포하고, 평민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나무를 하거나, 채집을 하거나 낚시를 하거나 사냥을 할 수 없도록 했다. 이는 사회 각계층의 이익을 건들였고, 원성이 사방에서 일어난다. 주려왕은 예량보(芮良父)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이공을 경사(卿士)로 발탁하여, 계속 국가독점정책을 시행한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원성이 일어나고, 길거리..
2020. 11. 9.
"사인방"의 상해잔당에 대한 재판: 마천수(馬天水), 서경현(徐景賢), 왕수진(王秀珍)
글: 왕문정(王文正), 심국범(沈國凡) 마천수 강청반혁명집단의 상해잔당중 핵심분자로 당시에 이름이 열거된 사람은 모두 사십여명이다. 그중 제1차로 재판을 받게 된 사람은 모두 9명이다. 그들은 전중공상해시위서기, 시혁명위원회부주임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여), 그리고 진아대(陳阿大), 섭창명(葉昌明), 황금해(黃金海), 대립청(戴立淸), 마진룡(馬振龍), 주영가(朱永嘉)이다. 이들은 '문화대혁명'때 상해에서 앞장선 인물들이다. 마천수가 원래 상해시위에서 지도자의 직위에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조반파로 관직에 올랐다. 그런데, 당시 재판후의 판결문에는 오직 8명밖에 없고, 이들 잔당중 우두머리인 마천수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왜그럴까? 마천수에 대하여 왜 재판이 진행되지 않았는지를 말하기..
2020.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