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살사(薩沙)
대여행가 마르코 폴로는 도대체 중국에 왔던 것일까? 1298년 9월 7일 마르코폴로는 감옥에 갇히고, 루스티첼로와 합작으로 <마르코폴로여행기>를 쓴다.
마르코폴로는 중국에 온 적이 있을까? 쿠빌라이를 만난 적이 있을까?
지금 보면, 마르코폴로가 중국에 와서 쿠빌라이를 만났다는 것을 증명할 증거는 없다.
원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나라때의 모든 역사기록에서 마르코폴로를 찾아볼 수 없다.
몽골인들이 원나라를 건립한 후에는 더 이상 유목민족이 아니고, 계통적으로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마르코폴로여행기에는 그가 여러번 원나라의 대칸 쿠빌라이를 배알했다고 적었다.
1275년 여름, 23살의 마르코폴로는 처음 쿠빌라이를 만났고, 동행한 사람은 그의 부친과 숙부였다.
마르코폴로의 기술에 따르면, 대칸은 젊고 총명한 마르코폴로를 높이 평가했고, 특별히 그들에게 입궁하여 도중에 보고 들은 것들을 얘기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을 데리고 함께 대도(大都)로 돌아갔고, 나중에 그들을 원나라에 남아있게 하여 관직을 주었다.
그후 마르코폴로는 원나라에서 17년간 머물렀고, 그 동안 쿠빌라이를 여러번 만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마르코폴로는 공헌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양양(襄陽)전투에서의 화포는 그가 쿠빌라이에게 바친 것이다.
이를 보면, 마르코폴로는 원나라에서 중요한 인물이고, 최소한 무명소졸은 아니다.
그러나, 여러 해동안 국내외의 학자들이 원나라때의 모든 기록을 뒤져보았고, 심지어 야사까지 훑어보았지만 마르코폴로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마르코폴로는 명확하게 자신이 몇 곳에서 지방관을 지냈다고 했다. 거기에는 양주(揚州)에서 3년간 관리로 지냈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역사기록 특히 양주의 비교적 완비된 역사자료에서 그런 사실을 기재되어 있지 않다.
알아야 할 것은 원나라때 색목인(色目人)이 관리를 지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탈리아에서 온 사람은 없었다. 만일 있었다면 분명히 기록으로 남겨두었을 것이다.
둘째, 마르코폴로의 이야기에는 상식적인 착오가 너무 많다.
마르코폴로여행기에는 중국의 것들을 몇 가지 묘사하는데, 중대한 흠결과 잘못이 있다.
그는 한번도 중국인이 차를 마시는 것이나, 여인들이 전족을 하는 것이나, 식사할 때 젓가락을 쓰는 것이나, 중국의 침구에 대한 것이나, 만리장성등등 중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을 언급하지 않았다.
4대발명에 대하여 마르코폴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의 일부 묘사는 지금보면 엉터리이다.
마르코폴로는 스스로 몽골인이 2차례에 걸쳐 일본을 공격하는 것을 목도했다고 했다. 함대가 태풍을 만났다는 묘사는 역사와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그는 제2차공격의 실패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원정군은 자동(刺桐)과 경사(京師) 두 항구에서 출발한다. 바다를 가로질러, 안정하게 일본섬에 도착한다. 다만, 두 총사령관이 서로 시기하고 상대방의 군사전략을 무시하며, 자신의 방안을 집행하자고 고집했다. 그리하여, 1개의 도시를 함락시킨 외에 나머지 지방은 일본병사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얼마 후, 이곳에 맹렬한 북풍이 불기 시작한다. 섬해안에 정박해 있던 타타르의 전함은 바람에 서로 부딛쳐 버린다. 그리하여 장교들은 배 위에서 상의한 후, 섬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군대가 배에 오른 후, 함대는 즉시 바다로 출발했다. 그러나 북풍이 갈수록 강해져서 많은 선박이 전복되었다."
약간의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제2차 원정함대는 거의 전멸했다는 것을. 당시 함대가 일본근해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대규모전투를 벌여보기도 전에 태풍을 만난다.
그렇지만 제2차원정에 대한 묘사는 역사에 부합하는 부분도 약간은 있다. 그러나 제1차원정에 대한 묘사는 완전히 헛소리이다.
이탈리아 나폴리대학의 다니엘 페트렐라는 이렇게 본다: "마르코폴로는 두차례 일본원정의 세부내용을 혼동하고 있다. 1274년의 제1차원정에 대한 기술에서 그는 원나라군대가 조선을 떠나 일본해안에 도착하기 전에 태풍을 만났다고 적었는데, 그것은 1281년의 제2차원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만일 그가 정말 목격자라면, 시간간격이 7년이나 있는 두차례의 전쟁을 혼동할 수 있을까?"
확실히 이 이야기는 마르코폴로가 누군가에게 들은 것을 적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양양전투에서 투석기로 몽골인이 양양을 함락시키게 도왔다고 말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것이 황당무계하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회회포는 마르코폴로와 아무런 관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코폴로가 원나라에 도착한 것은 1275년이고, 양양전투는 1273년에 종결되었기 때문이다.
유사하게 황당한 사례는 아주 많다.
셋째, 마르코폴로의 기념품
마르코폴로가 사망한 후, 많은 기념품을 남겼다. 정상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중국에서 17년간 생활한 것이 사실이라면, 약간의 기념품은 있어야 한다. 최소한 젓가락 한쌍이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기념품 중에 중국의 것은 없다.
이건 상식에 맞지 않는다.
오늘날의 보통관광객이라 하더라도, 며칠간 주마간산식으로 여행한다면 약간의 현지물건을 기념으로 사가지고 돌아가는 법이다.
더더구나 마르코폴로가 중국에서 십여년간 머물렀다면 어찌 기념물이 하나도 없을 수 있겠는가?
재미있는 점이라면, 마르코폴로가 당시 중국의 화례, 식염생산과 세수체제등을 묘사한 것은 아주 상세하고 비교적 정확하다는 것이다. 그는 중국사회의 여러 풍토인정에 대하여 특히 상업무역상황에 대하여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사회에 대한 여러가지 기본적인 상식을 마르코폴로는 근본적으로 잘 모르고 있어, 잘못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렇게 추론한다. 마르코폴로는 중국에 온 적이 없다. 최소한 중국의 핵심지역에는 와본 적이 없다. 그는 단지 중국의 상인들에게서 여러가지 소개하는 말을 들었고, 그것을 여행기의 소재로 삼은 것이다. 이들 상인은 제도와 장사와 관련된 것에는 흥미가 있을 것이고, 마르코폴로는 그런 것들만 들은 것이다.
중국의 <산해경>이 민간전설의 지리지식, 산천, 지리, 민족, 물산, 약물,제사, 무의등을 기록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산해경>을 보면, 그중 일부의 자연지리특징이나 인문지리특징은 아주 정확하거나 혹은 대체로 정확하다.
이는 <산해경>의 내용이 완전히 상상으로 날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중 일부 내용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산해경>의 작자는 비록 직접 그런 것들을 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묘사하는 것을 듣고는 그대로 기술한 것이다. 비록 기술에서 많은 과장이나 편집한 내용이 있기는 하지만 <산해경>의 여전히 부분적인 내용은 상대적으로 정확하다.
재미있는 점은 마르코폴로여행기에서 대부분의 중국지명과 기타명칭은 모두 페르시아어로 되어 있고, 중국어의 음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몽골인들이 선박의 방수에 쓰는 것을 "chunam"이라고 적었는데, "chunam"은 기실 페르시아어의 "역청(瀝靑)"이다. 중국어나 몽골어에는 그런 단어가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마르코폴로가 페르시아까지는 왔지만, 중국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페르시아까지 오는 것은 기실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지중해항로는 비교적 발달되어 있었고, 이탈리아상인이 배를 타고 아랍인이 통제하는 항구까지 도착할 수 있다. 육지에 도착한 후, 그들은 육지로 아랍지역을 가로질러 페르시아까지 갈 수 있다.
거리는 크게 멀다고 할 수는 없다. 개략 8,9백킬로미터이다. 관건은 이 노선이 아주 잘 발달되어 있고, 아주 안전하다는 것이다. 아랍상인들은 이미 수백년간 다닌 길이다.
다만, 페르시아에 도착한 후, 중국으로 가려면, 난이도가 제법 높다. 청장고원이 가로막고 있다. 마르코폴로가 페르시아에서 출발하면, 육로로 중앙아시아를 한바퀴 돌아서 신강으로 들어가고 다시 중국내륙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이란에서 신강까지의 직선거리는 3000여킬로미터이다. 신강에서 원나라의 수도 북경까지는 다시 3000킬로미터이다.
둘을 합치면 6천킬로미터이다. 고대의 상인이 6천킬로미터를 가려면 최소한 1,2년의 시간은 걸렸다.
육로가 아니면 해로인데, 이란에서 출발하여 배를 타고 인도로 가고, 다시 동남아로 가고, 이어 북상하여 중국까지 가는 길이다.
이 해로는 거리가 더욱 멀다. 그리고 마르코폴로시대에는 통하지 않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상인들이 가장 멀리 간 것은 페르시아 혹은 인도였다. 동남아조차도 가지 못했다.
이렇게 보면 마르코폴로는 그저 페르시아까지 가봤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페르시아는 몽골인이 통치하던 일한국의 영토였다. 일한국은 중국의 원나라와 관계가 밀접했고, 쌍방간의 무역도 밀접했다.
마르코폴로부자는 분명히 페르시아에서 여러 해동안 장사를 했고, 현지상인들에게서 중국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것을 돌아와서 여행기로 남긴 것이다.
마르코폴로여행기는 소설에 가깝다. 중국에 대하여 그가 알고 있는 것을 대량으로 묘사한 것이다
마르코폴로여행기가 유럽인들에게 중국에 대한 흥미를 크게 일으킨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마르코폴로는 중국까지 와본 적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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