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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은래113

주은래 사망당일의 중국고위층동향 글: 여위(余偉) 1976년 1월 8일 9시경, 주은래가 입원해있는 병실 바깥의 벨이 돌연 울렸다. 이는 긴급상황을 대비하여 만들어놓은 벨이다.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이다. 모두 빠른 걸음으로 병실로 달려갔다. 거의 동시에 계기상의 심박수가 나타났다: 70여회. 계속하여 100여회를 .. 2012. 1. 8.
중공의 6.25참전 의사결정경위 글: 사마량(司馬亮) “병력을 움직이는 일은 국가의 대사이다.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곳이며, 살아남고 망하는 것이 갈라지는 길이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 예상치도 못하게 발생한 한국전쟁은 새로 건국하여 할 일이 많던 신중국에 있어서,.. 2011. 6. 6.
주은래의 총리지위를 위협했던 두 인물 글: 김산(金汕) 주은래는 신중국의 제1대 총리로서, 27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이는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27년간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일반적으로 문화대혁명시기에 그의 자리는 가장 큰 위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왕홍문(王洪文.. 2011. 3. 21.
손중산 후손과 대만의 은원관계 글: 환구인물 1949년 12월 10일, 장개석이 청두(成都)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떠난 후, '국민정부'는 대륙에서 철저히 멸망한다. 손과(孫科)는 비록 '국민정부' 행정원장의 직위를 사직했지만, 그는 계속하여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1949년 7월에 '중앙비상위원회'로 개칭한다)의 상무위.. 2011. 2. 19.
정릉(定陵): 차마 돌아볼 수 없는 고고발굴의 비애 글: 악남(岳南) 정릉(定陵)의 발굴은 1956년부터 시작한다. 북경시부시장 오함(吳晗)은 주은래 총리에 보고를 해서, 명십삼릉을 발굴하겠다고 하였다. 오함은 유명한 명나라역사학자이다. 문혁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이 인물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쓴 <<해서파관(海瑞罷.. 2009. 12. 24.
모택동은 왜 화국봉을 후계자로 선택했는가? 글: 축을(丑乙) 모택동의 첫번째 후계자는 유소기(劉少奇)였는데, 모택동에게 타도당하고, 옥중에서 죽었다. 두번째 후계자는 임표(林彪)였는데, 역시 모택동에게 타도당하여, 놀라서 도망치다가,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었다. 이것이 "임표반혁명사건"이다. 임표사건은 모택동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 2009. 1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