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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화국봉)

모택동은 왜 화국봉을 후계자로 선택했는가?

by 중은우시 2009. 11. 14.

글: 축을(丑乙)

 

모택동의 첫번째 후계자는 유소기(劉少奇)였는데, 모택동에게 타도당하고, 옥중에서 죽었다. 두번째 후계자는 임표(林彪)였는데, 역시 모택동에게 타도당하여, 놀라서 도망치다가,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었다. 이것이 "임표반혁명사건"이다.

 

임표사건은 모택동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더더구나 강청, 강생, 장춘교, 왕홍문등 문혁파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실제로 모택동, 임표를 영수로 한 문혁파 내부가 권력과 이익을 위하여 너죽고 나살기식으로 대분열을 일으킴에 따라,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주은래, 등소평, 섭검영(葉劍英)등 "우파" "주자파"였다.

 

1972년이후의 모택동은 병마에 시달린다. 자신에게 남은 날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이 중국의 스탈린이 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중국의 스탈린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중국현대사상의 폭군으로 기록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중국현대사상의 폭군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이 이미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직면할 용기가 없었고, 실패를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일지기 간절한 심정으로 유언을 하듯이 "복장(福將)" 섭검영 원수에게 말한 바 있다(섭검영은 황푸군관학교의 초기교관이고 나중에 공산혁명에 투신한다. 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복장'으로 부른다. 그는 1985년 북경에서 병사하니, 선종을 맞이한 것이다.): 나는 평생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국민당과 28년동안 싸운 것이며, 장개석 위원장을 작은 섬으로 쫓아버렸다. 다른 하나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서 수정주의가 나타나고 자본주의가 부활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당의 모든 동지들은 이 두 가지 큰 일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이는 모택동의 마음 깊이 자리잡은 공포였다. 그리하여 그는 말년에 정신이 흐릿했다. 때로는 계급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때로는 자신의 실패를 보완하고자 했다. 그는 모든 정치적 적수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얻은 것은 결국 자신의 최종적인 실패였다.

 

그는 이미 풍운을 질타할 힘이 없었고, 다시 운동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치균형수단을 쓰게 된다. 그는 때로는 좌파를 비판하고, 때로는 우파에 반대한다. 때로는 자신의 사후의 '천하대란'을 비판하고, 때로는 좌파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여 다른 파에 당할까봐 걱정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고향에서 온 성위서기 화국봉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다. 그는 화국봉이 좌파와 우파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화국봉을 선정하기 전에, 그는 일찌기 당의 부주석인 왕홍문을 고려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73년에서 1974년의 상반기까지, 한때 왕홍문이 당중앙, 중앙군위의 일상업무를 처리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일찌기 이런 '최고지시'를 내린 바도 있었다: 왕홍문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노동일도 하고, 농사도 지었으며, 군대에도 갔다. 상해노동자계급에서 가장 먼저 일어선 혁명좌파이고 후계자의 요건에 부합한다.

 

한때, 사회에는 이런 소문까지 돌았다: 왕홍문은 모택동이 대혁명시기에 잃어버린 아들 모안룡(毛岸龍)이다. 그는 적출(嫡出)의 용종(龍種)인 것이다. 그러나, 용종이든, 사종(蛇種)이든, 충종(蟲種)이든, 왕홍문은 학식도 기술도 없고,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그저 반년동앙 중공중앙, 중앙군위의 업무를 주재하였지만, 그가 지시한 문건은 자주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업무에 복귀한 노간부 예를 들어 등소평등의 견제를 받았고, 더더구나 홍군출신의 중공군대 고위장군들의 소극적인 저항도 있었다. 모택동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잠시 물러나게 한다. 그리고 권력을 등소평에게 넘겨준다. 이것은 문혁파의 '임표사건'이후의 또 한번의 좌절이었다.

 

모택동의 전략배치에서 등소평은 그저 과도기의 인물이었다. 등소평은 일찌기 3번이나 모택동에게 서신을 보내어, '절대로 뒤집지 않겠다'고 보증한다. 그래도 모택동은 키작은 등소평에 대한 의심을 시종 풀지 않는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회해전투'에 참가하여 지휘한 바 있는 등소평은 일단 대권을 장악하기만 하면, 어떤 나쁜 일이든 다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유소기에 대하여도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약속을 어기고 문혁을 부정해버리면 어떡할 것인가? 왕홍문의 다음으로 모택동이 고려해본 후계자들에는 기등규, 위국청, 오덕, 심지어 자신의 친손자인 모원신등이 있었다.

 

그는 강청, 장춘교, 왕동흥, 요문원등은 고려하지 않았던가? 그는 문혁초기에 자신의 부인 강청을 이용했다. 그러나, 그는 강청의 경박하고 비천한 것과 히스테릭한 것에 질색을 했다; 학술재능이나 이론적 소양으로 따지자면 장춘교가 이상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날카로움을 빨리 드러내서, 사방에 적을 만들고, 인간관계가 좋지 못했다. 당시에 섭검영, 서향전, 섭영진, 허세우, 양득지, 왕진등의 노장들과 빙탄불상용으로 원한이 깊었다.; 왕동흥은 충성심은 강하고, 오랫동안 보위업무를 해왔고, 중남해의 경위부대를 지휘했다. 그가 발탁된다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요문원은 그저 글쟁이였다. 기껏해야 선전부장, 서기처 서기를 맡길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최후에 몸집이 크고, 일처리에 무게가 있으며, 재주와 학식은 평범한 화국봉을 골랐다. 모택동의 화국봉에 대한 평가는 4글자로 요약된다고 말한다: "노실(老實), 부준(不蠢)"(성실하고, 멍청하지 않다)

 

모택동은 평생동안 '중용의 도'를 따르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는 '중용의 도'를 선택했다. 모택동은 화국봉이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기치를 계속하여 높이 들고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회피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사후에 스탈린처럼 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능욕을 당하는 것이었다.

 

모택동의 최후 선택은 '문혁파' '주자파'로 하여금 모두 크게 실망하게 하였지만, 또한 크게 위안하게 하였다. 모택동의 최고권력을 상대방에게만 넘겨주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화국봉은 어쨌든 쉽게 장악되고 쉽게 좌우되는 인물이었다.

 

화국봉은 산서성 노성현 사람이다. 항일전쟁시기에 그는 지방유격지대의 정치위원이었다. 1949년에 호남으로 남하해서 악양현위서기를 맡는다. 1956년후에 모택동의 고향인 상담지위 부서기가 된다. 1959년 6월 모택동이 소산으로 돌아갔을 때, 화국봉은 모택동이 거주하는 집 바깥에서 밤새도록 지켰다. 모택동은 주소주로부터 보고를 받고는 화국봉에 호감을 느낀다. 오래지 않아, 화국봉은 호남성위 서기처 서기, 부성장으로 발탁되어 농업을 주관한다. 1964년 소산관구 수리공사를 추진할 때, 화국봉은 공사총지휘관을 맡고 전성의 상업, 문화교륙, 정법을 담당한다. 그는 전형적인 '만금유(萬金油)간부"이다.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지만, 어떤 일이든 그저 시키는대로 지킬 뿐이다. 당에서 무엇을 하라고 하면 그는 그 일을 한다. 전전긍긍하며, 제대로 이행하며 업무에서 뛰어난 실적을 보이지는 않지만, 절대로 어떤 헛점이 나타나지는 않는다.

 

1966년 여름, 위대한 모택동이 돌연 문화대혁명을 시작한다. 사전에 각 성시자치구의 부하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그저 하룻밤만에, 아래에서 위에서, 홍위병의 조반, 노동자농민의 조반, 기관간부의 조반이 일어나고, 군중조직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난다. 투쟁의 창끝을 각급 당정기관의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로 향했다. 화국봉과 호남성위의 다른 지도자들 장평화, 왕연춘, 이서산등은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천하가 곧 대란에 휩싸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총과 탄약을 챙겨서 '혁명근거지' 평강현 연운산구로 간다. 거기서 다시 전투를 하고, 다시 강산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나중에 모택동이 직접 북경에서 지시를 내리고 그들에게 명령한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군중을 믿고 당을 믿어라.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시험을 받고 단련을 하라. 화국봉과 다른 동료들은 안심해서 장사로 되돌아간다.

 

화국봉은 성위 서기중 랭킹 5위였다. 그리하여 문혁초기에 홍위병 조반파로부터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1969년, 성혁명위원회가 성립될 때, 그는 '혁명지도자'의 대표로 부주임을 맡는다. 얼마 안되어 주임으로 승진한다. 1969년 봄, 화국봉은 북경으로 이동한다. 중남해판사조 조장이 된다. 호남을 떠나기 전에, 장사공항에서 '혁명좌파를 견결히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1975년부터 공안부 부부장을 겸임한다. 전 부장 사부치가 사망한 후, 공안부장, 국무원 부총리로 승진하여, 중공의 안전보위 대권을 장악한다.

 

1976년 1월 7일 주은래가 사망하고, 등소평은 모택동을 위시한 사인방에게 타도당한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누구에게나 두들겨맞는 '비맞은 개'꼴이 된다. 화국봉은 승진을 거듭하여, 모택동에 의하여 중공중앙 제1부주석, 국무원총리, 중앙군위 제1부주석이 되어 모택동의 정식후계자가 된다.

 

그 때 모택동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말도 어눌했고, 두뇌도 맑지 못했다. 그는 손을 떨면서 화국봉에게 연필로 6자를 써준다: "니판사 아방심(辦事 我放心, 네가 일을 하면 내가 안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