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전)

주은래의 총리지위를 위협했던 두 인물

중은우시 2011. 3. 21. 15:51

 

: 김산(金汕)

 

주은래는 신중국의 제1대 총리로서, 27년간 그 자리를 지켰다. 이는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27년간 편안하고 안정적으로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현재 일반적으로 문화대혁명시기에 그의 자리는 가장 큰 위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왕홍문(王洪文)으로 38살에 모택동, 주은래의 바로 다음가는 3인자가 된 인물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 생각한 것이다. 모택동은 확실히 한동안 왕홍문을 배양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국무원 총리는 실력이 있어야 하는 자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아무런 경력, 위신, 수준이 없는 사람이 맡았다가는 국가를 제대로 운영할 수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모택동도 문혁을 계속해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왕홍문은 총리후보는 아니었다. 또 다른 한명은 장춘교(張春橋)이다. 그는 총리자리에 가장 눈독들였다. 그는 이론도 있고, 문화도 있다. 상해에서 지도자의 지위에서 실제로 업무를 해본 경험도 있다. 그러나 그는 평판이 너무 나빴다. 죽어라 강청의 뒷다리를 붙들고, 개가 주인의 힘을 빌어 위세를 떨치는 것 같은 자세를 보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는 원로혁명가들이 보기에 제일 먼저 청산해야할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장춘교가 총리가 되고 싶다는 것은 그저 그 혼자만의 생각이었다.

 

모택동이 승인하는 상황하에서만이 국무원총리를 교체할 수 있다. 주은래의 총리자리를 진정으로 위협한 사람은 경력도 있고, 한때 모택동의 총애를 받던 원로혁명가이다.

 

그중 한 명은 가경시(柯慶施)이다. 가경시는 1922년에 중국공산당에 입당하고, 중국공산당내에서 그리 많지 않은 레닌을 만나본 고위간부이다. 1930년대에 중공중앙 비서장의 요직을 지낸 바도 있다. 그는 상당한 경력이 있다. 그러나 조직에서 그에게 위험한 시기에 동요하고 조직을 속인 착오를 범했다는 지적을 받은 바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한 때 승진이 어려웠다. 1950년대에 그는 돌연 급속히 승진한다. 강소성위 서기에서 상해시위 서기와 화동국 제1서기를 거쳐 국무원 부총리까지 직선으로 올라간다. 그는 이런 명언을 남긴 바 있다: “모택동을 따르는 것이 맹종의 지경에 이르고, 모택동을 믿는 것이 미신의 지경에 이르렀다고증에 따르면, 그가 임표보다 훨씬 먼저 했다. 사인방 중에서 장춘교, 요문원은 모두 그가 배양한 인재이다. 나중에 모택동은 자신보다 9살이나 어린 가경시를 가로(柯老)’라고 부를 정도였다. 1950년대중반 중국경제는 급진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이는 실제로 이후의 대약진의 사전연습인 셈이었다. 주은래와 경제를 주관하던 부총리인 진운(陳雲)은 급진적인 점을 시정하고 모험주의에 빠지지 말 것을 제안한다. 1958년 남녕회의에서 모택동은 주은래와 진운의 반모험주의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가 글에서 풍자한 전족여인은 바로 주은래이다. 그는 가경시의 <<바람을 타고 파도를 일으켜야 한다. 사회주의의 신사회건설을 가속화하자>>라는 보고서를 꺼내들고 여러 사람앞에서 주은래를 면박준다: “당신은 이런 글을 쓸 수 있느냐?” 회의에 참가했던 모택동의 비서인 이예(李銳)의 회고에 따르면, 가경시는 남녕회의의 최고의 모범이 되었다.

 

모택동은 확실히 가경시로 하여금 주은래를 대체하여 총리를 맡게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주은래가 중앙서기처에 제출한 반성문에서 확실히 총리직무를 맡는 것이 적합한지여부의 문제를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중앙의 대다수 지도자들은 주은래의 총리직무를 바꿀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게다가 모택동도 국제적인 명망이나 당내의 명망으로 보면 가경시는 차이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 교체를 하지 못한다. 가경시는 문혁 1년전에 사망한다. 문혁때 중천에 떠오른 해와 같았던 강청은 그에 대한 은혜를 잊지 못하면서 계속하여 가로의 당시 지지를 언급하곤 했다. 만일 그가 문혁때까지 살았더라면, 그에게 복이 되었을지 화가 되었을지는 알 수가 없다.

 

사실 이 전에, 주은래의 총리직위는 실질적인 위협을 받은 바 있다. 1950년대초, 모택동은 주은래가 서기를 맡고 있는 정무원당조간사회를 취소하고 정부 각부서의 당조직이 직접 중공중앙의 지휘를 받고, 정부업무의 일체의 중요한 방침, 정책, 계획과 중요사항은 모두 반드시 사전에 중공중앙에 보고하여, 중공중앙이 결정, 비준한 후 비로소 실시할 수 있도록 건의한 바 있다. 동시에 중앙은 정무원에 대하여 구조조정에 들어간다. 정무원의 8개부를 국가계획위원회 주임 고강(高崗)의 지휘를 받게 한다. 정무원의 업무를 다시 분장하여, 주은래는 외교업무만 책임지도록 했다. , 유소기가 당무를 관장하고, 경제와 외교를 주관하던 주은래는 외사와 통전만을 맡도록 하며, 경제대권은 고강에게 넘겼다. 이를 위하여 모택동은 이미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인 고강에게 계획위원회 주임을 맡긴다. 모택동은 유소기, 주은래의 권력을 나누어, 그의 휘하에 3족정립의 국면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고강의 계획위원회는 나중의 계획위원회와는 다르다. 그 당시는 국무원에 대항하는 계획위원회였다. 그 구성원을 보면 진용이 얼마나 막강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진운, 동필무, 팽덕회, 등소평, 임표, 요수석, 팽진, 박일파, 등자회, 이부춘, 습중훈, 이선념. , 유소기, 주은래를 제외하고 연부역강한 국가지도자들은 모조리 고강이 이끄는 계획위원회에 속해 있었다.

 

모택동은 또 하나의 중요한 조치를 취한다. 1952년 가을의 오마진경(五馬進京) 일마당선(一馬當先)”이다. 서남국 제1서기인 등소평이 먼저 북경으로 들어와서 정무원 부총리를 맡는다; 화동국 제1서기인 요수석은 중앙조직부 부장을 맡는다; 중남국 제2서기인 등자회는 국가계획위원회 부주석, 정무원 재경위원회 부주임을 맡는다; 서북국 제2서기인 습중훈은 중앙선전부 부장,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임을 맡는다. 소위 일마당선은 동북국의 고강이 오마중 직위가 가장 높았다는 것이다. 북경으로 오기 전에, 그는 이미 중앙인민정부 부주석, 동북인민정부 주석을 맡았다. 당시 중앙은 그에게 다시 계획위원회 주임직까지 맡게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고강은 경력으로 보아 당내에서 10위내에 들지 못한다. 그러나 졸지에 유소기, 주은래와 대등한 자리에 올랐고, 오히려 추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고강의 개인자질과 정치모략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스스로를 모택동의 후계자로 생각했고, 여러 번 유소기를 공격했다. 고강은 요수석에게 이렇게 말한다: “중국공산당은 실제로 두개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근거지의 당, 즉 군대의 당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백구(白區)의 당이다; 무슨 유소기를 백구의 당의 정확한 노선의 대표라고 한다면, 만일 우리같이 총을 든 당이 없었다면 어디에 백구의 당이 있을 수 있는가?”

 

고강은 모택동의 이런 조치가 그를 후계자로 삼고, 유소기와 주은래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모택동과의 대화에서 그의 의도를 알아내고,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대로 집행했다. 그의 활동은 확실히 정상적인 범위를 많이 벗어났다. 그의 행위는 적지 않은 지도자들의 분노를 자아낸다. 모택동은 유소기로 하여금 중앙회의를 주재하게 하고, 고강을 비판하도록 한다. 고강을 얼마후 자살한다. 모택동은 약간은 후회했다: “만일 고강이 죽지 않았다면, 그의 중앙위원 지위는 유지시켜주었을 것이다.”

 

주은래는 총리직위에 27년간 있었고, 그 기간은 결코 평온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그가 서거하기 전 1년여는 비림비공비주공(批林批孔批周公)’의 시기였고, 그의 지위는 위험한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