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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과거

정릉(定陵): 차마 돌아볼 수 없는 고고발굴의 비애

by 중은우시 2009. 12. 24.

글: 악남(岳南)

 

정릉(定陵)의 발굴은 1956년부터 시작한다. 북경시부시장 오함(吳)은 주은래 총리에 보고를 해서, 명십삼릉을 발굴하겠다고 하였다. 오함은 유명한 명나라역사학자이다. 문혁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모두 이 인물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쓴 <<해서파관(海瑞罷官)>>은 문혁의 도화선이 된다. 그 자신도 문혁의 제물이 된다. 전해지는 바로는 해방이전에, 그는 그의 스승인 호적을 대륙에 남게 하려고 만류하러 갔다가 서로 기분이 언짢게 헤어진 적이 있다고 한다. 호적의 그에 대한 평가는 "아쉽다. 길을 잘못 들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의 배후에 담긴 뜻은 오함은 원래 일류 학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인데, 불행히도 정치의 길로 들어가서, 다른 사람에게 총잡이로 부림을 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오함은 학자의 열정이 있었다. 그가 북경대학에서 청년시대를 보낼 때, 명십삼릉을 발굴하고 싶어했다. 이것은 모든 고고학자의 꿈이다. 그러나, 당시의 고고학계의 태두인 하내(夏)는 당시에 명십삼릉을 발굴하는 것을 극력 반대했다. 왜 그랬는가? 왜냐하면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기술수준과 정치풍향으로 봐서, 명십삼릉과 같은 대형 황릉을 발굴하는 것은 부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파는 것은 쉬우나, 보호는 아주 어렵다. 그러나, 그로서도 이를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신중국은 각 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싶어했고, 고고발굴도 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요란한 정릉고고발굴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은 순조로왔다. 2년동안 많은 고고학자들은 그들의 총명함과 재주와 분투정신을 발휘하여, 지궁입구를 찾아냈고, 금강장을 열고, 현궁대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만력제의 관과 무수한 진기한 보물들을 만난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그 세상에 보기드문 보물들, 예를 들어 유일무이한 명나라 황실의 비단은 당시 탈수보존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목통도 초저온냉돌실 안에 넣어둘 조건이 되지 못했다. 더욱 큰 피해는 나중에 일어난 반우파운동이다. 이들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시골로 쫓겨간다. 이미 열어제친 황릉은 그 상태로 반년을 놔둔다. 대부분의 나무나 직물은 지궁안에서 수백년간 항온항습조건으로 인하여 처음처럼 화려하고 예뻤는데, 이제 자연조건하에 내팽겨치지게 되니 금방 마르고 부패했다. 모조리 못쓰게 되어 버렸다. 정릉박물관은 심지어 비전문가가 장악하게 되고, 만력황제의 금사남목의 관목조차도 야외에 버려진다. 그리고, 농민들이 이것을 주워가서 가구로 만들어 썼다(불쏘시개를 한 것보다는 낫다)

 

그리고, 다시 문혁이 발생한다. 혁명청년들이 정릉을 소탕하며, 만력과 두 황후의 유골을 끄집어내서 불에 말끔히 태워버린다.

 

이는 세계고고학사상 출현한 적이 없는 괴이한 일이다. 정릉은 고고발굴을 하고도, 지궁을 연 날로부터 30년이 지났지만, 발굴보고서 한 장 나오지 않았다. 한 홍콩의 학자는 이렇게 서신을 보내서 말한 바 있다: 너희는 불초한 후손이다. 오천년의 찬란한 중화문명과 조상이 남겨준 기업이 너희의 손에 망쳐졌다.

 

누구의 책임인가? 그들 고고학자를 책망할 수는 없다. 그들의 비참한 경력은 세계의 어느 국가의 고고학자들도 겪지 않은 것이다.

 

그저 권력자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그들은 모종의 허영과 업적을 위하여, 고고학 자체의 규율이나 현실조건을 무시하고, 아무런 조건도 구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억지로 발굴을 시켰다. 이리하여 만회할 수 없는 재난을 당한다. 그들은 치욕의 기둥에 못박혀야 한다.

 

예를 들어 오함이 있다. 원래 그는 중국지식인의 대들보라고 칭해졌었다. 그러나 많은 책을 읽은 후에 비로소 호적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확실히 길을 잘못들었다. 그가 학자의 열정과 정치의 열정을 결합시킨 후, 이상은 변색되었다. 비록 그 자신도 결국은 희생물이 되었지만, 확실히 정릉고고발굴이라는 일에서 그는 벗을 수 없는 책임이 있다. 부정확한 시간에, 그는 비극의 탄생을 재촉했다. 만일 그가 정치풍운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면 그는 정릉에 대하여 그저 과실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1965년, 그가 이미 정릉의 모든 겁난을 친히 목도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주은래 총리에게 다른 명릉을 발굴하겠다고 요구한 것은 뭐란 말인가? 이것은 명백한 고의범이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행운인 것은 주은래가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에게는 흥미가 없다. 주은래 총리의 안목은 오함보다 뛰어났다. 이 말의 속에서 나는 책망의 뜻을 느낄 수 있다. 정릉고고발굴이후, 각지에서는 속속 현지의 능묘를 발굴하겠다고 신청했따. 그러나 모두 하내와 주은래 총리에 의하여 거절당한다. 이것은 고고학계로서는 큰 행운이다.

 

그러나, 과거 수십년간 많은 불행들이 있었다. 중대한 고고학적 성과의 배후에는 모두 후인들이 이를 가는 아쉬운 일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수주의 증후을묘에서 출토된 편종과 청동기구는 모두 국보이다. 다만, 한가지 그냥 지나쳐버린 사실은 당시 수묘에서 출토된 것에는 청동기이외에 무수히 많은 두터운 전국시대의 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중에 노천에 쌓여 있다가, 썩어버렸다. 무슨 고고인가? 고고는 도굴이 아니다. 금은옥기서화만 중요하게 생각하니, 그 안의 묘장구조나 나머지 돈이 안되는 물건에는 관심도 없었다. 왕왕, 이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더욱 중요한 연구가치가 있다. 또한 마왕퇴 한묘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수십년 늦게 발굴했더라면, 우리가 오늘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삼십년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여추우는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고 있다. 그러나 그가 한 말중에 하나는 나도 찬성한다. 그는 돈황의 장경동은 스타인이 모조리 긁어갔든데,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확실히 나쁜 일이 아니다. 최소한 우리는 현재 대영박물관의 항온시설이 된 창고에서 그 진품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가져가지 않은 것들은 오늘날 어디에 있는가?

 

송경령이 정릉을 참관할 때, 박물관의 사람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것은 중국인민의 유산이라고. 그러자 송여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은 중국인민의 문화유산만이 아니다. 전인류의 것이다.

 

그렇게 함부로 우리의 문화유산을 대하지 말라. 조건이 안되면, 그저 일을 벌이지 말아서, 후손들의 웃음거리는 되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