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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손중산)

손중산 후손과 대만의 은원관계

by 중은우시 2011. 2. 19.

글: 환구인물

 

1949년 12월 10일, 장개석이 청두(成都)에서 비행기를 타고 대만으로 떠난 후, '국민정부'는 대륙에서 철저히 멸망한다.

 

손과(孫科)는 비록 '국민정부' 행정원장의 직위를 사직했지만, 그는 계속하여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1949년 7월에 '중앙비상위원회'로 개칭한다)의 상무위원이었다. 장기석은 홍콩에 있던 손과에게 대만으로 가도록 통지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가 대만으로 가는 것을 계속하여 막았다. 1950년 3월 1일, 장개석은 타이페이에서 '총통'에 복직한다. 그후, 사회에서는 손과가 대만으로 가서 '부총통' 직을 맡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금방 대만의 신문에는 손과를 공격하는 대량의 보도가 쏟아져 나온다. 일부에서는 그가 대만으로 오는 것에 방어하는데 힘썼다. 손과는 미국으로 가겠다고 신청한다. 그러나, 대만당국은 각종 이유를 들어 그에게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는다. 그리하여 그는 어쩔 수 없이 홍콩에 남아있는다. 이해 가을이 되어서야 손과는 비로소 부인 진숙영(陳淑英)을 데리고 인도, 그리스를 거쳐 프랑스에 거주한다. 2년후 손과부부는 미국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자녀들과 만난다. 손과 일가의 표류생활은 1965년에 대만으로 갈 때까지 계속되었다.

 

손중산과 대만의 연원

 

손과는 비록 십여년동안 대만에 갈 수 없었지만, 손씨집안은 대만과 깊은 연원이 있다. 이는 손중산부터 시작된다.

 

혁명을 시작할 때, 손중산은 일본의 수중에서 대만을 수복할 결심과 의지가 있었다. 1894년 흥중회를 성립할 때, 손중산은 성립선언등 중요문건에서 '전쟁패배후에 배상금을 지급하는 것과 영토를 떼어주고 화평을 구한 것은 치욕이다"라는 생각을 드러낸다. 그리고, '중화를 회복하고, 실지를 수복하겠다'고 결심한다.

 

손중산은 가장 먼저 '대만수복'을 실제행동으로 옮긴 사람이다. 1899년 겨울, 그는 일본 동경에서 혁명활동에 종사하면서, 중국 형세지도를 몇 개 손으로 그린 바 있다. 청나라정부가 일본에 할양한 대만영토에 색칠을 하고,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영원히 잊지 않겠다."

 

그후 손중산은 3번이나 대만으로 가서 혁명활동에 종사한다.

 

1900년 9월 25일, 손중산은 혼자서 일본에서 대만으로 간다. 타이페이에 지휘소를 설립하고 혜주의거를 지휘한다. 두번째로 대만에 간 것은 1913년 8월이다. 손중산은 대만의 '매옥부(梅屋敷)'라는 여관(지금은 타이페이시 국부사적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지금까지 손중산의 대만에서의 역사유적지로 유일한 곳이다)에서 거처한다. 그는 이 곳에서 대만의 동맹회 회원들을 접견하고, 그들에게 상황을 알아보고, 의견을 듣는다. 당시, 손중산은 '매옥부' 여관의 주인에게 '박애(博愛)'라는 두 글자를 써서 준다. 손중산의 세번째 대만방문은 '제1차호법운동'이 실패한 1918년 6월이었다. 그러나 대만의 일본식만당국이 극력 막는 바람에, 그는 타이페이에서 단지 1박만 하고 다음날 대만을 떠나야 했다.

 

손중산의 세번에 걸친 대만방문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족적을 남겼다. 대만의 문헌에서는 이렇게 지적한다. 손중산은 죽을 때까지, 일본이 중국과 체결한 불평등조약을 모조리 없애서 대만에 자치를 실행할 권력을 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 했다.

 

바로 이런 것으로 인하여, '국부' 손중산은 대만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져 있고, 존경을 받는 것이다.

 

지금도 '손중산'은 대만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다. 대만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100원짜리 대만지폐에 그려진 것은 손중산의 초상이다. 대만의 많은 곳에서 '손중산'은 돈의 대명사이다. 선거때 자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 "선거에 스승은 없다. '손중산'만 있으면 이긴다" 사람들은 자주 이렇게도 말한다. '주머니에 '손중산'이 많으냐?" 그외에 대만의 모든 정부기구, 학교, 공공장소에는 손중산의 화상이나 동상이 있다; 모든 정부공무원 민의대표가 선서를 할 때면 반드시 국부상의 앞에서 선서한다. 정부기구가 중요한 회의를 개최할 때면 '국부유언'을 읽는다. 손중산은 대만에서 이미 정신적인 신앙과 토템이 되었다.

 

손과의 대만에서의 곤궁한 처지

 

손중산은 대만에서 존경받고 있지만, 그의 광환(光環)은 그의 후손에게까지는 비추지 못했다.

 

손과가 미국에 망명해 있는 동안, 대만의 장개석은 그에 대하여 물어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국민당의 주미대사관도 손과와 아무런 왕래가 없었다. 우연히 그를 방문하는 사람도 대륙에서의 손과의 옛친구들이었다. 1961년, 진성(陳誠)은 '부총통'의 신분으로 방미하지만, 손과를 만나러 가지 않고, 그저 그에게 전화를 했을 뿐이다.

 

재미기간동안, 손과와 가족의 생활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들 부부는 차남인 손치강(孫治强)과 계속 같이 살았다. 고정수입이 없었으므로, 자녀들이 주는 돈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생활은 갈수록 간소해졌다. 나중에 비용을 줄이기 위하여 손과의 집안에서는 먹는 것까지도 아꼈다. 모든 것은 스스로 해결했고, 스스로 채소를 심었다. 당시에 어떤 사람은 그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했따. 온 가족이 업무분담하여 청소와 다른 일을 했다. 손과는 각 실내의 청소를 책임졌다. 화장실을 포함해서. 매일 청소기를 가지고 청소를 했다. 부인 진숙영은 요리와 주방의 청결을 책임졌다. 아들 손치강은 무거운 물건을 드는 것을 책임지고, 실외청소를 책임졌따. 며느리는 아이를 돌보고 자잘한 집안일을 처리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해석했다. 손과는 스스로 힘들게 생활하면서도, 장개석의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 당시의 한 중문매체에서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누추한 1층짜리 집, 카페트도 없고, 일하는 사람도 없다. 모든 것을 스스로 움직여 해결한다. 일찌기 풍운을 질타하던 인물이, 지금은 이렇게 담백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정신생활은 아주 풍족하다. 그의 집안에는 곳곳에 서적이 있다."

 

사실 진정으로 손과를 이해하는 사람은 알고 있다. 그의 내심은 아주 처연했었다는 것을. 생활이 힘들 뿐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떠돌아다닌다'는 느낌이 날로 강해졌다.

 

대륙에서는 계속하여 손과에 관심을 가졌다. 손과가 홍콩에 있을 때, 중국공산당에서는 관련인사를 통해서 그와 연락했다. 그가 대륙으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손과는 중국공산당과 그 지도자의 혁명에 대하여 뿌리깊은 편견과 반항심리가 있었다. 그리하여 그 요청을 거절한다. 1956년 3월, 주은래 총리가 북경에서 손과와 수십년의 교분이 있는 영국인 맥퀸을 만났을 때, 그에게 손과에 인사를 전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주은래는 우리는 손중산 선생의 아들을 장기간 해외에서 유랑하게 할 수 없다. 중국정부는 손과 선생이 귀국하는 것을 환영한다. 이번에도 손과는 여전히 '정치에 싫증이 났다'는 태도를 나타내고, 주은래의 구두요청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1960년대에 이르러, 손과를 잘 아는 옛친구들이 그의 대만행을 위하여 여러 측면에서 활동하기 시작한다. 1962년 10월, 대만당국의 입법위원 유숭령은 '행정원'에 질문하는 때 당국에서 적극적으로 손과의 대만행을 추진하라고 요구한다. '행정원'은 장개석에게 보고를 하여 답변을 얻은 후에 이렇게 답변한다: "정부는 철생선생(손과)가 귀국하는 것을 아주 환영한다."

 

1964년, 대만이 자금출자를 하여, 미국에서 "중화문화교육기금회"가 성립된다. 손과를 동사장으로 선임한다. 그후, 손과는 대만당국과 다시 연락하기 시작한다. 1965년 10월 29일, 손과는 비행기를 타고 미국에서 대만으로 간다. 타이페이의 송산공항에서는 장경국과 2000여명이 환영을 나왔다. 성대한 환영에 손과는 눈물을 흘린다.

 

행정원장등의 고위직을 맡았던 손과라면 당연히 장개석에게 중용되거나 보상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귀국후에 그는 먼저 총통부의 고급자문이라는 허직(虛職)받는다. 나중에 임기가 길지 않은 고시원 원장 직을 맡는다. 1967년, 손과는 동오대학 동사장이 되어, 1973년 9월 13일 타이페이에서 서거할 때까지 그 직에 있었다.

 

손중산 3대의 '고별'

 

손과 부부와 함께 대만으로 간 것은 두 아들 손치평과 손치강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대만에서의 처지는 부친보다도 못했다.

 

형재 둘은 모두 손과가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 유학할 때 태어났다. 손치평은 1913년 11월 16일생이다. 당시 중화민국이 막 창건되어, 해야할 일이 많았다. 손중산은 나라를 잘 다스리고 백성이 평안하고, 천하가 태평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장손자에게 '치평(治平)'이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1915년 1월 27일, 손치강이 출생한다. 손중산은 다시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는 먼저 평안을 추구하고 다시 강성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차남의 이름은 '치강'으로 한다.

 

손치평과 손치강은 어려서부터 세상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 둘은 비록 부친처럼 힘든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지만, 부친과 마찬가지로 동서양의 문화를 모두 맛보고 학식도 풍부했다. 손중산이 서거한 후, 국민당 원로인 오치휘는 북경의 공부환경이 좋지 않다고 보고, 북경에서 '해외보습학교'를 창립한다. 그리고 혁명원훈의 자녀들로 하여금 그곳에서 공부한 후 해외에 유학가도록 했다. 손치평 형제 및 장경국 등이 모두 그 곳에서 공부한 바 있다. 처음에 형제 둘은 보통화를 못 알아 들었다. 그래서 공부하는데 힘이 많이 들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총명하고, 공부에 힘을 쏟아, 금방 언어장애를 극복하고, 학습환경에 적응한다. 항전전에, 손치평은 상해성요한대학에서 공부하고, 손치강은 남경금릉대학에서 공부한다. 나중에 형제 둘은 미국으로 건너간다. 모두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정치경제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국민당이 대륙에서 대만으로 도망간 후, 손치평 형제는 미국에 거주한다.

 

손치평은 대만으로 간 후에 국민당 중앙위원, 총통부 국책고문, 대만전시공사 부동사장, 연합발전기업공사 동사장 등의 직위를 맡는다. 손치강은 대만에서 재능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고, 중용되지 못했다. 그저 '중앙신탁국' 및 타이페이고궁박물원 고문 등의 직위를 맡았을 뿐이다.

 

만년이 되어, 손치평과 손치강 형제는 서로 다른 처지에 놓인다. 그리하여 매체의 주목을 받는다. 1990년대말, 대만의 <<자립만보>>의 보도에서 <<손중산의 손자가 기념관 앞에 노점을 차리다>>라는 제목으로, 손치강이 경제적 곤란으로 이등휘에게 대우를 개선해줄 것을 요청했다는 내용을 실었다. 마카오 <<신화오문>>에서는 손치평이 정치에서 앞날에 대한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마음을 바꾸어 돈을 벌기 시작하고, 이미 적지 않은 규모의 주식을 가지고, 생활이 비교적 풍족했다고 적었다. 1980년에 그는 홍콩으로 옮겨서 거주한다.

 

손치평과 손치강의 자녀들은 모두 해외에 정착했다. 마지막에는 손씨집안에서 손치강만이 대만에 홀로 남았다. 경제가 곤란하여, 병치료를 위해 손치강은 오랫동안 타이페이 영민총의원의 부근에 집을 빌려 거주했다.

 

손치강은 고희가 되어 1992년과 1993년에 두 번 대륙을 방문한다. 고향인 취형촌으로 가서 조부의 고거를 방문했을 뿐아니라, 북경, 상해, 무한, 광주 등지를 유람했다. 2001년 여름, 손치강은 나이들고 몸이 약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가서 아들 손국승(孫國升)의 졸업식에 참가한다. 불행히도 7월 4일에 심장병이 발작하여 이국에서 생을 마치니 향년 86세였다. 이제 대만에는 더 이상 손중산의 후손이 남아있지 않다.

 

2004년 4월, 손치평은 홍콩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천수이벤과 민진당의 '탈중국화'에 대하여 극도의 불만과 분개를 나타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1998년에 천수이벤은 타이페이시장경선에 나섰을 때, 그의 경선진영에서는 '국부도 천수이벤이 잘한다고 칭찬했다'고 선전한 적이 있었다. 그들은 공장의 외벽에 만화를 그렸는데, 내용은 손중산이 천수이벤의 경선을 칭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는 '신신인류의 유머'라고 했다. 손치평은 말했다. 이것은 손중산 선생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더럽히는 짓이다. 2000년 천수이벤이 대만 총통의 자리에 앉은 후, 더욱 '탈중국화'를 꾀하게 된다. 손치평은 '천수이벤은 대만독립을 주장하고, 중화민국을 인정하지 않고, 손중산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손중산을 이용해서 표를 편취했다. 이는 사기행위이다. 나는 그에 대하여 법률조치를 취하는 것도 배제하지 않겠다." 불행히도, 손치평이 천수이벤을 법정에 제소하기 전에, 2005년 4월 6일 홍콩에서 서거하고 만다. 향년 92세였다.

 

역사는 다시 제 자리를 찾았다. 손중산이 창립한 국민당이 다시 대만에서 집권한 후, 손중산을 더럽힌 바 있는 천수이벤은 감옥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