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중공의 6.25참전 의사결정경위

중은우시 2011. 6. 6. 14:03

 

: 사마량(司馬亮)

 

병력을 움직이는 일은 국가의 대사이다.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곳이며, 살아남고 망하는 것이 갈라지는 길이다. 잘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兵者, 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

 

예상치도 못하게 발생한 한국전쟁은 새로 건국하여 할 일이 많던 신중국에 있어서, 생사존망의 시험이었다. 병력을 파견하여 조선을 도와주느냐 마느냐는 모택동의 일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의사결정중 하나였다. 그리하여 그는 꼬박 1주일간 수염도 깍지 않았다. 호요방이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말도 하지 않고, 일주일간 수염을 깍지 않았다. 길게 자라도록 내버려 두었다. 생각을 마친 후에 회의를 열어서,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되고 난 후에야 모주석은 수염을 깍았다.”

 

60년후, 우리가 다시 한국전쟁참전의사결정을 되돌아보면 시간은 단지 1주일만이 아니다. 1950 6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9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고, 다시 10 19일 지원군이 압록강을 건널 때까지, 전투상황은 수시로 변했고, 각자의 생각은 서로 달랐고, 위기는 사방에 잠복해 있었으며, 흉험하여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전체 의사결정과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사실상, 지원군은 여러 번 출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동맹 내부의 서로간의 시기로 여러 번 기회를 놓쳤다. 결국 전투상황이 불리하여 어쩔 수 없이 출병하게 되었을 때, 임표(林彪)출병은 하되 싸우지 않는(出而不戰)”의 방안을 내놓는다. 원래 이는 최소의 대가로 위기국면을 타개하는 것이었는데, 전투상황의 급변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누가 조선출병의 좋은 기회를 놓쳤는가?

 

1950 9 15일부터 15일까지, 맥아더는 조선인민군의 주력이 낙동강에서 교착상태에 빠져있고, 후방이 비어있다는 점을 이용하여, 미군을 지휘하여 인천에 상륙한다. 조선의 전투상황은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인민군이 낙동강 일선에서 저지당하고 있을 때, 조선의 전투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중공지도자들은, 각각 7월중순, 7월하순과 9월상순에 3차례에 걸쳐 조선의 동지들에게 주의를 준다. 적군이 해상으로 인천, 서울을 향하여 전진하여 인민군의 후로를 차단하는 것을 주의하라고, 중공지도자들은 이때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승리를 거두려면, 반드시 중공군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9월초, 모택동의 재촉하에, 동북변방군의 병력은 70만명으로 증원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20만명의 보충병력도 두고자 한다. 동시에 무기, 장비도 강화하여 조선을 원조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8 26, 김일성은 중국이 지적해주자, 미군이 인천과 수원지역에서 상륙하려한다는 정보를 소련에 통지하고, 이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자 한다. 그리고, “중국동지들에게 군대를 파병하여 조선을 원조하는 아이디어를 제출한다. 인민군이 전선에서 아주 곤란을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국제적인 지원요구를 거절한다. 그러나, 그는 김일성에게 만일 필요하면, 우리는 조선공군에 전투기를 제공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스탈인의 의사를 확인한 후에, 김일성은 더 이상 중국에 원조제공을 요청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희망을 모스크바에 건다. 중국에 출병을 요청할 좋은 시기를 놓쳐버린 것이다.

 

인천상륙작전후, 조선의 전세는 역전된다. 장기간, 대규모의 전쟁을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방국가는 소련과 중국이 참전하여 조선에서 군사충돌이 발생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이런 두려운 심리를 이용하여, 우리의 의도를 알리는 조치를 취하여야 했다. 남방의 부대를 북방으로 이동만 시켜도 영국미국은 불안해했을 것이다.”

 

모스크바에 조선원조문제를 요청할 때, 주은래도 조선에 의견을 묻는다. 9 19, 주은래는 조선주중대사 이주연(李周淵)에게 조선정부는 인천상륙이후에, 중국정부에 어떤 요구를 할 것인지를 묻는다.

 

다음 날, 김일성은 소련대사 스티코프에게 주은래와의 대화내용을 보고한다. 그리고 해명하다. 중국과 조선간에는 하나의 약정이 있다. 만일 적군이 후방에서 상륙하면, 중국은 자신의 군대를 보내어 조선을 도울 것이다. 외무상 박헌영도 명확히 표명했다. “중국을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해달라고 모스크바로부터의 지시가 없었기 때문에 스티코프는 이 문제에 대하여 계속 회피하고 회답을 주지 않았다.

 

이때, 모택동은 즉시 조선에 출병하여 지원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9 17, 중앙군사위원회는 즉시 5명의 인원이 주북한무관 시성문(柴成文)과 함께 북한으로 가서 상황을 익히고, 지형을 관찰하며, 전투준비를 하도록 했다. 심양을 지날 때, 시성문은 모택동의 서신을 고강(高崗)에게 건넨다. 서신에는 보기에 출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반드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어라.”는 내용이 있었다.

 

다만, 평양의 태도는 중국이 적극적이고 명확하게 참전을 요구할 수 없게 만들었다. 9 21, 조선노동당정치국은 회의를 개최하여, 중국에 출병을 요구할 것인지 여부를 토론했다. 회의에서는 두 가지 의견이 나온다. 박헌영, 최고인민회의의장 김두봉과 내무상 박일우는 모두 전황이 시급하니, 자체역량만으로는 미군과 대항하기 어렵다. 당연히 중국정부에 군대원조요청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김일성은 명확히 반대의사를 표명한다. 그는 중국이 참전하면 제3차세계대전으로 비화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물며, 중국이 출병해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새로 인민군부대를 창건하는데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강조한다. 소련군사고문단과 무기원조를 받는 상황하에서 중국인들의 도움을 요청하면, 모스크바에서 모욕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정부에 대한 원병요청은 잠시 미루는 것이 좋겠고, 먼저 모스크바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것이다.

 

회의는 아무런 결의도 통과시키지 못하고 끝났다. 김일성은 스탈린의 안색을 보고 움직였다. 이리하여 다시 기회를 잃는다. 최후의 순간이 아니면, 즉 미군에 의하여 삼팔선이 뚫리는 경우가 아니라면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며칠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자, 전투상황은 급전직하한다. 9 30일 서울이 함락되고, 인민군주력부대는 북으로 철수하는 길이 끊긴다. 연락도 끊어진다. 김일성은 미군이 삼팔선을 넘어올 것을 우려했다. 그렇게 되면 조선에서 새로 부대를 조직하여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낸다. 스탈린에게 직접군사원조를 요청한 것이다. 만일 안되겠다면 우리가 중국과 기타 인민민주국가에서 국제지원부대를 건립하도록 도와달라고 한다.

 

10 1,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전보를 보내어, 중국군대가 지원군의 방식으로 조선에 참전해달라고 요청하다. 삼팔선이북지역에서 효과적으로 방어해달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진영의 맹주로서, 스탈린은 중국의 참전시기를 선택함에 있어서, 양대진영의 대항이라는 각도에서 출발했다. 그리하여 소련의 조선에서의 이익, 지위 및 영향을 곳곳에서 고려한다. 그러다보니 계속 기회를 놓쳤다. 이제, 전쟁형세가 급박해지자, 모스크바는 결국 중국군대의 출병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국면은 이미 지원군에게 아주 불리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맥아더는 심지어, 중국이 이번에 출병하면, “그들에 있어서, 이번은 최대의 도살이 될 것이다라고 호언장담하고 있었다.

 

중국출병이 시기에 관하여, 역사학자 심지화는 여러해 후에 명확한 분석을 내놓는다: “만일 인천상륙전에 중국군대가 후방을 방어할 수 있었다면, 전선의 인민군주력부대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만일 인천상륙후에 중국군대가 삼팔선에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면, 이를 통하여 유엔군의 북진을 막았더라면, 10월초 인민주력부대를 모조리 잃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삼팔선이 이미 돌파된 후에는 중국군대가 조선에 진입하여 전투할 좋은 기회는 모조리 놓쳐버린 것이다.”

 

임표의 신중의견이 우위를 점하다.

 

10 1, 모택동은 스탈린으로부터 중국이 출병하라는 전보를 받을 때, 중국대사관도 같은 날 김일성으로부터 구원요청서신을 받는다. 중국이 파병하여 도와달라는 것이다. 다음 날, 모택동은 중공중앙서기처확대회의를 개최한다. 여기서 출병문제를 논의했다. 회의에는 서로 다른 의견이 나왔고, 여러 지도자들은 출병문제를 신중하게 고려해야한다고 주장한다. 회의에서는 10 4, 5일 다시 정치국확대회의를 개최하여 토론하도록 결정하다.

 

10 4, 중앙정치국은 중남해 이년당에서 확대회의를 개최하여, 조선출병문제를 논의한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모택동, 주덕, 유소기, 주은래, 임필시, 진운, 고강, 팽진, 동필무, 임백거, 장문천이었고. 이부춘, 나영환, 임표, 등소평, 요수석, 박일파, 섭영진, 등자회, 양상곤, 호교목은 열석한다.

 

팽덕회는 회의가 열리는 당일오후 은회색의 이()-2형 전용기를 타고 서안에서 북경으로 왔다. 오후 4시에 북경서교공항에 내리고, 즉시 승용차로 갈아타고 중남해로 가서, 풍택원의 앞에 멈춘다. 팽덕회는 빠른 걸음으로 이년당으로 가고, 주은래가 나와서 그를 맞이하고 악수한다. 그리고 설명한다: “팽총(彭總), 회의는 오후 3시에 시작되었다. 당신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회의실에 걸어들어가니, 모택동이 일어나 그와 악수한다. 그리고, “팽노총(彭老總), 고생많았다. 마침 잘 왔다. 미제국주의의 군대가 이미 삼팔선을 넘어 북진했다. 현재 정치국은 우리나라의 출병원조문제를 논의하고 있는 중이다. 모두 의견을 발표하는 중이니, 너도 네 생각을 얘기해보아라.”

 

팽덕회가 자리에 앉자, 회의장은 잠시 침묵이 흐른다. 모택동은 여러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발언하려 하지 않는 것을 보자, 그들은 출병하지 말자는 의견을 견지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말한다: “출병원조문제에 대하여 여러분은 유리하고 불리한 조건을 내놓고 각자 의견을 털어놓고 말하자.”

 

임표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발언한다.

 

주석께서 우리에게 출병의 불리한 조건을 얘기하라니, 저는 찬성입니다. 제 생각에, 우리나라는 이미 20년간 전쟁을 겪었습니다. 국내전쟁의 상처가 아직 치료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일부지역은 아직 해방되지도 않았습니다. 신해방구는 아직 토지개혁도 진행하지 못했습니다. 원기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건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국력은 아주 약하고, 다시 큰 전투를 치를 힘이 없습니다. 특히 우리는 아직 미군과 싸워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출병하여 참전하면, 싸우는데도 제한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군을 막아낼 수 있을지 없을지 자신도 없습니다. 오히려 전화가 우리의 동북지방으로 번져온다면 아주 골치아픕니다. 제가 보기에는 역시 동북의 방어를 강화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임표는 이어서 말한다. “우리군이 장개석군대를 치는데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방대한 육해공군을 가지고 있습니다. 공군이 우세합니다. 원자탄도 있고, 공업기초도 탄탄합니다. 그들을 몰아부치게 되면, 그들의 원자탄 2개 혹은 비행기로 우리에게 대규모폭격을 가하면, 우리가 골치아픕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조선은 겨우 수백만인구입니다. 중국은 근 5억에 가깝습니다. 수백만인구의 조선을 구하기 위하여, 5억인구의 중국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습니다.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싸우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표의 발언은 적지 않은 참여자의 공감을 얻는다. 섭영진이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어떤 동지는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전투를 해왔으므로, 이제는 쉬면서 힘을 길러야 할 때라고 하였다. 건국한지 겨우 1년이고, 어려운 일도 겹겹이 쌓여있으므로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 전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박일파도 나중에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이번 전쟁에 출병하여 싸우기로 결정할 때, 새로 생긴 인민공화국에 있어서는 리스크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해야할 일이 많았고, 어려움도 컸다. 회의에서 어떤 동지는 소련홍군이 직접참전하거나 우리와 공동으로 출병하는 것이 우리가 단독으로 출병하는 것보다 낫다고 했다.”

 

모택동은 회의에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한다: “여러분이 하는 말은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국가위기에 처해있는데, 우리가 곁에 서서 구경만 한다는 것은 어찌되었건 마음이 불편한 일이다.”

 

순망치한(脣亡齒寒), 호파당위(戶破堂危)

 

팽덕회는 그날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는다. 다음날 오후 회의에서 계속하여 출병원조문제를 논의한다. 팽덕회는 이때 발언한다: “출병원조는 필요하다. 잘못되어도, 기껏해야 해방전쟁의 승리가 몇 년 늦어지는 것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미군이 전체 조선을 점령하게 우리의 문앞에 배치된다면, 그들이 침략을 하고 싶을 때면 언제든지 핑계를 대고 쳐들어올 수 있다. 나중에 싸우는 것보다는 미리 싸우는 것이 낫다. 전쟁을 먼저 마치고나서 건설은 나중에 해도 된다.”

 

팽덕회의 말이 막 떨어지자, 모택동이 뒤를 이어 발언한다: “요 며칠, 적지 않은 동지들이 출병할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따. 조선인민과 조선노동당의 동지는 우리의 항일전쟁, 해방전쟁에서 중국혁명사업을 위하여 피를 흘렸다. 현재 그들의 민족이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수백가지 이유, 수천가지 이유가 있더라도 한 가지 이유에 반박할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애국주의와 국제주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웃나라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떨쳐 일어나서 도와주어야 한다. 견의용위(見義勇爲, 의로운 일을 용감하게 행하는 것)는 중국민족의 전통미덕이다. 맞다. 미군은 대포도 우리보다 많다. 그러나 역사는 대포로 쓰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잡아 먹으면 된다. 그들은 그들의 원자탄을 쓰라고 해라, 우리는 우리의 수류탄을 쓰겠다. 결론적으로 한 마디이다. 당금세계에 누구든지 다른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유린하고 짓밟으려 한다면, 그것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그것은 돌맹이를 들어서 자신의 발을 내려찍는 일이 될 것이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모택동은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 계속 말한다. “맞다. 우리는 출병하지 않을 백가지, 천가지 이유가 있다. 그러나, 현재 매제의 창끝이 우리의 동북을 향하고 있다. 만일 정말 조선이 무너진다면, 압록강을 건너오지 않더라도, 우리의 동북은 미국의 위협속에 나날을 지내야 한다. 평화건설을 진행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그래서, 우리가 조선문제를 내버려두고 방치하면, 미제는 반드시 득촌진척(得寸進尺)할 것이다.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던 옛방식을 그대로 따를 것이다. 심지어 일본보다 더욱 흉맹할 것이다. 미국은 3개의 날카로운 칼날을 중국의 몸에 꽂고 있다. 조선으로부터의 칼은 우리의 머리를 향하고 있고, 대만으로부터의 칼은 우리의 배를 향하고 있고, 베트남으로부터의 칼은 우리의 발을 향하고 있다. 천하에 변고가 생기면, 그것은 세 방향에서 우리에게 진공해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피동적이 된다. 우리의 항미원조는 그들의 생각대로 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주먹을 한번 뻗어서, 주먹 백대가 날아오는 것을 막는 일이다. 우리의 항미원조는 집과 나라를 지키는 일이다.”

 

순망치한이고 호포당위이다. 우리는 참전해야 한다.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 참전하지 않으면 해가 아주 크다.” 모택동의 한마디로 출병원조는 정치국확대회의에서 결정되어버린다. 회의에서는 모택동의 제안을 통과시키는데, 팽덕회로 하여금 부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가게 하여, 인민군을 도와서 미군을 물리치는 것이다. 10 8,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주석 모택동은 명령을 내린다.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건걸하고, 팽덕회를 지원군사령관 겸 정치워윈에 임명한다.

 

출이부전이 최선의 방안이었다.

 

출병원조문제에서, 임표는 참전에 신중, 반대의 태도를 취했다. 이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또 다른 아주 고명한 출병전략을 제출했다. 그러나 학술계에서 그다지 주목은 받지 못하고 있다.

 

조선출병에 신중, 반대의견을 주장한 것은 임표의 심모원려의 결과이다. 한국전쟁발발후, 이표는 조선의 전투상황을 주목하고 있었다. 1950 9월에 조선출병에 반대하는 의견이 형성된다. 시성문의 회고에 따르면, 1950 9월초, 그가 평양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 암표가 그를 불러 조선의 상황을 묻는다. 시성문은 즉시 임표의 집으로 가서 보고한다. 임표는 시성문에 조선의 전투상황을 보고하자, 이렇게 묻는다. “그들(조선인민군)은 산에 들어가서 유격전을 할 준비를 하고 있는가?” 시성문이 대답한다. “제가 그런 일이 있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김일성과 함께 있으면서 알게 된 것은 만일 형세상 필요하면, 그는 산으로 올라가서 유격전을 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임표가 다시 물었다. “우리가 출병하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산으로 올라가서 유격전을 하게 하면 될까 안될까?”

 

그런, 군인으로서 임표는 계속하여 전투를 피하지만은 않았다. 일찍이 주은래의 군사비서를 담당했던 곽영부의 회고에 따르면, 임표는 군사위원회 상임위원회 거인당회의에서 출병에 찬성하지 않았고, 출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의견을 냈다. “만일 반드시 출병해야 한다면, 출이부전의 방침을 채택해야 하다. 조선의 북부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형세의 발전을 보아서, 싸우지 않을 수 있으면 싸우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싸우지 않고 적을 물리칠 수 있다면 최선의 병법이다. ‘출이부전은 확실히 지원군이 불리한 상황하에서, 출병원조의 최상책이다. 모택동은 비록 임표의 출병에 반대하는 의견은 묵살했지만, ‘출이부전에 대하여는 받아들였다. 지원군이 조선에 들어간 후의 병력배치는 모조리 임표의 의견대로 하게 된다.

 

10 14, 모택동은 소련에 있는 주은래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지원군이 조선에 들어간 후 먼저 수세를 취하고, 방어선을 구축하며, 6개월이후에 다시 공격문제를 논의하자는 의견을 제출한다. 전문은 이렇게 되어 있다:

 

평양, 원산철로선의 이북에서, 덕천, 영원공로선 이남지역에 2줄 혹은 3줄의 방어선을 구축한다. 적이 공격해 들어오면, 진지의 전면에서 나누어 섬멸한다. 만일 평양미군, 원산한국군의 양쪽에서 협공하면, 그중 약한 한쪽을 고립시킨다. 현재의 결심은 한국군을 공격하는 것이다. 물론 고립된 어느 미군을 공격할 수도 있다. 시간이 허용한다면, 공사를 계속 강화한다. 6개월내에 적이 평양을 고수하고, 원산을 나오지 않는다면, 아군은 평양, 원찬을 치지 않는다. 아군의 장비나 훈련이 완비된 후, 공중과 지상에서 모두 적군에 대하여 압도적인 우세조건을 갖춘 후에, 다시 평양, 원산등지를 공격한다. 6개월이후에 다시 공격문제를 논의할 때도, 우리가 이렇게 하는 것이 자신도 있고, 이로운 일이다.”

 

지원군이 비밀리에 조선에 들어간 후, 유엔군은 중국조선국경에서 신속히 후퇴한다. 지원군이 지나치게 일찌감치 적군과 교전했다. 그리하여 원래 만들었던 방어선의 계획은 모조리 변경된다. 황급히 제1차전투를 발동한다. 10 21, 22,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연속 2번의 전보를 보낸다. 1개의 군대로 적군을 견제하고, 3개군을 집중하여 한국군 2,3개사단을 섬멸하겠다는 것이다. 원산에서 평양에 이르는 이북지역을 확대하고 공고히 하여, 남조선에서의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임표가 생각지 않았던 공개출병이고 선제공격이다. ‘출이부전의 전략의도는 이미 물거품이 되었다.

 

싸우지 않고 물리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미군측의 동향을 보면, 지원군의 출이부전을 통하여 싸우지 않고 물리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았었다.

 

미국은 일찍이 1950 7 10, 제정한 제76호문건에서 만일 중국 혹은 소련의 대규모 조직적인 저항이 있으면 유엔군총사령관은 워싱턴에 보고하기 전에 계속 전진을 명령할 수밖에 없다고 되어 있다.

 

9 11일 비준한 제81호문건에서는 미국군대가 삼팔선을 넘는 군사행동에 대하여 두 가지 아주 중요한 전제조건을 달았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중국 혹은 소련군대가 한국전쟁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중국 혹은 소련군대가 개입하면, 미군은 삼팔선일대를 방어한다.

 

9 27일 제92801호명령에서는 북한무장부대를 분쇄하는 것을 군사목표로 확정하다. 맥아더에게 삼팔선이북의 조선경내에서 군사행동에 취할 것을 수권한다. 여기에는 수륙, 공수 혹은 지상작전을 포함한다. 그러나, 전제조건은 이런 행동을 취할 때 주로 소련과 중국공산당군대가 북한에 진입하지 않고, 진입을 준비한다는 성명이 없고, 북한이 우리의 행동에 대항하는 위협이 없을 것이다” “소련 혹은 중국공산당이 사전에 북한에 진입하여 점령하겠다고 성명을 발표하고, 그들의 군대가 공격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를 공개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발표한다면, 반드시 이 일을 워싱턴에 보고해야 한다

 

10 9, 국방부와 참모장 연석회의에서 다시 맥아더에 명령을 내린다. 이후 중국공사당이 사전에 성명을 발표하여 북한의 어느 지방에서 공개적으로 혹은 은미랗게 대량의 부대가 사용한다는 것을 발표하면 자신의 판단에 따라, 본인의 판단에 따라, 지휘받는 부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으면 계속 행동을 취하라. 여하한 상황하에서도, 중국경내의 목표물에 대하여 여하한 군사행동을 취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워싱턴의 승인을 받아야 하다.”

 

미국국가안전위원회가 삼팔선을 돌파하는 문제에 관하여 토론한 문건들을 보면, 미국의 의사결정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는 항상 소련 혹은 중국이 참전할 것이냐의 여부였다. 트루먼 본인이 맥아더가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으로 인천에 상륙할 때 심지어 일단 중국에 한반도에 출병하면 미군은 전투에서 철수하려고까지 생각했다. 당시 미국 합동참모본부의 의장을 맡고 있던 브래들리는 합동참모본부는 일단 중국이 간섭하면, 우리는 조선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임표의 출이부전은 미국의 이런 심리를 잘 꿰뚫어 본 것이다. 임표가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더라면, 공개적으로 동북에 부대를 주둔시키고, 한반도 북부에 군대를 배치해서, 진지를 구축했더라면, 먼저 불패의 기세를 지니고, 다시 주은래의 외교적 노력을 결합시켜 미국을 위협한다면 미군을 물러나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라는 효과도 거두면서, 중국국경의 안정적인 완충지대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현재 북한이라는 이 안전완충지대는 지원군이 3년간 피로 싸우고, 수십만명이 사망한 대가를 치르고 얻어낸 것이다.

 

두 가지를 비교해보면, ‘출이부전의 용병전략이 비록 시행되지는 못했지만, 전투국면의 발전의 각종 가능성을 놓고 군사학자들이 추가적으로 연구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