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맹검홍(孟儉紅)
항전초기 홍군(紅軍)을 팔로군(八路軍)으로 개편하는 과정에 대하여는 여러 글과 책에서 상세히 소개한 바 있다. 다만, 여전히 약간의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예를 들어, 팔로군 번호의 유래라든지, 산하의 3개사(師)의 번호는 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지등등. 그리고 개편된지 1달도 되지 않아 왜 팔로군은 다시 제십팔집단군(第十八集團軍)으로 명칭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중공은 왜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고집했는지. 국민당과 공산당간에 팔로군 번호를 둘러싸고 어떤 다툼과 알력이 있었는지. 중공은 또 어떤 상황하에서는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는지. 이런 문제를 이해하는 것은 이 시기의 역사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팔로군"은 원래 '월군(粤軍)'의 번호였다. 건제가 취소된 후, 홍군(紅軍)에게 부여되었다; 제115사, 제120사, 제129사는 원래 동북군(東北軍)에 예속되어 있었던 부대인데, 개편후 건제가 소실되었다가, 번호를 팔로군의 3개사에 부여하게 된 것이다.
1937년, 대일항전이 전면적으로 발발한 후, 국공양당간의 합의에 따라, 중앙군사위는 1937년 8월 25일 명령을 내려, 홍군주력을 국민혁명군제팔로군(國民革命軍第八路軍), 간칭 '팔로군'으로 개편한다. 그렇다면, '로군(路軍)'은 무엇일까? 팔로군 번호는 어떻게 나온 것일까?
"로군"은 "로(路)"라고도 부른다. 원래 전쟁중에 임시로 편제되는 전투,전술지휘단계이고, 일반적으로 전쟁후에는 취소된다. 다만, 국민당군은 10년내전때 '로군'을 1급전투지휘단계로 계속 사용되었고, 급별은 군(軍)에 상당하거나, 군(軍)보다 약간 크며, 군(軍)을 대체하여 지휘기능을 가졌다. 국민당군은 파벌이 아주 많아서, 동시에 군대의 편제임무를 완성할 수 없었다. 게다가 편제방안이 아주 복잡하고 혼란스러워서, 사용과정에서 '로군'으로 군을 대체하는 것은 여러가지 불편한 점이 있었다. 그리하여 대다수의 군은 번호를 여전히 보류하고 있었다. 1930년 중원대전(中原大戰)때 다시 조정되어 일부 군의 번호가 회복되거나 증편되고, "로군"과 "군"이 동시에 병존했다. 그리하여, 원래 아주 혼란스러웠던 국민당군의 편제가 더욱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된다.
제팔로군은 북벌전쟁(北伐戰爭)과정에서 광동(廣東)을 지키는 월군부대로 편성되었다. 이제심(李濟深), 진제당(陳濟棠)이 전후로 총지휘관을 맡는다. 신군벌혼전기간동안, 제팔로군의 번호는 계속하여 월군이 사용했다. 1936년 6월, 장개석의 중앙군세력이 양광(광동, 광서)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진제당은 계계(桂係)의 이종인(李宗仁), 백숭희(白崇禧)와 연합하여 반장개석의 '양광사변'을 일으킨다. 7월, '양광사변'이 해결된 후, 국민당군사위원회는 제팔로군을 취소한다. 홍군을 개편할 때, 국민정부군의 군정부부장(軍政部部長) 하응흠(何應欽)은 이 번호를 공산당에 주어버린다.
그렇다면, 팔로군 산하의 3개사의 번호는 또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리고 3개사의 번호는 왜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일반적으로 하나의 작전단위라면 로군이건, 군이건, 아니면 사이건, 여(旅)이건, 그 산하부대의 번호이건 연결되어 있게 된다. 그래야 식별이나 관리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팔로군 산하의 115, 120, 129사는 원래 동북군의 번호이다. "9.18사변"후 동북이 함락되면서 동북군은 예악환(豫鄂皖, 하남, 호북, 안휘)3성으로 옮겨간다. 이 3개사는 다른 동북군부대와 함께 장개석의 명을 받아, 악예환소비에트구 홍군에 대한 포위소탕작전에 투입되어, 악예환소비에트구홍군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소탕한다. 그리고 악예환소비에트구에서 나와 장정을 떠난 25군을 추격하고 차단한다. 서북으로 옮겨간 후에는 다시 섬감(陝甘, 섬서, 감숙)소비에트쿠와 홍15군단에 대한 제3차포위소탕전투, 직라진(直羅鎭)전투, 3대홍군회합저지전투 및 산성보(山城堡)전투, 닝샤농동(寧夏隴東)전투(즉 홍1방면군의 서정)등에 참가한다. 이 3개사는 홍군의 대적(大敵)이었다.
제115사, 이 번호는 원래 동북군 제67군(산하에 107, 108, 115, 117사가 있었음)에 소속되어 있었다. 서안사변(西安事變)후, 장개석은 동북군이 다시 홍군, 양호성(楊虎城)의 17로군과 하나로 뭉쳐, 남경정부에 대항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1937년 3월 115사를 안휘(安徽) 과양(渦陽)일대로 옮긴다. 6월, 유치(劉峙)의 주재로 하남 개봉에서 예환소(豫皖蘇, 하남, 안휘, 강소) 3군정군회의(整軍會議)를 개최하여, 동북군에 대한 재편을 실시하여, 매군 4개사의 갑종군편제에서 매군 2개사, 매사 2개여의 을종군편제로 축소시킨다(기병군만 3개사를 유지하도록 한다). 총병력은 1/3을 감축했다. 67군의 편제에서 107사, 108사 두 개만 남고, 1개사의 아래에는 2개여, 4개단(團)만 남는다. 115사, 117사의 번호는 취소시킨다. 국공담판으로 홍군을 개편할 때, 하응흠은 115사의 번호를 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에 준다.
제120사, 이 번호는 원래 동북군 제57군(산하에 109, 111, 112, 120사가 있었음)에 속해 있었다. 1937년 6월, 동북군 제57군이 축소개편되면서 111사, 112사 두 개 사를 남기고, 1개사의 아래에는 2개여 4개단을 남긴다. 그리고 109사, 120사의 번호는 취소시켜버린다. 국공담판으로 홍군을 개편할 때, 120사의 번호는 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에 부여한다.
제129사. 이 번호는 원래 동북군 제53군(산하에 116, 119, 129, 130사가 있었음)에 속해 있었다. 1937년 6월, 동북군 제53군이 하북 보정에서 축소개편되어 116사, 130사 두 개사만 남기고, 1개사는 2개여, 4개단을 보유한다. 제119사, 129사의 번호는 취소된다. 국공담판때 129사의 번호가 공산당이 이끄는 팔로군에 부여된다.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항일전쟁의 필요에 따라, 전국의 육해공군 전투서열에 따라, 팔로군을 제18집단군으로 개칭한다.
홍군의 주력을 팔로군으로 재편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1937년 9월 11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명령을 하달한다: "팔로군을 제18집단군으로 개칭한다." 팔로군총부는 제18집단군총사령부가 되고, 주덕(朱德)이 제18로군 총사령관, 팽덕회(彭德懷)가 부총사령관이 된다. 9월 14일, 주덕, 팽덕회는 팔로군을 제18집단군으로 개칭하는 통령(通令)을 내린다.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여기에는 우선 '집단군'의 연혁과 편성을 이해해야 한다. 북벌전쟁 후기, 국민당군은 모두 4개의 집단군으로 편성된다. 각각 제1집단군(중앙군), 제2집단군(서북군), 제3집단군(진군(晋軍)), 제4집단군(계계(桂係))이다. 이때의 집단군은 편제상 통일된 규정이 없었다. 1개의 집단군은 바로 1개의 큰 파벌 및 그 파벌을 지지하는 소규모파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수십개의 군 혹은 사를 거느렸다. 그러나, 항일전쟁시기의 집단군은 달랐다. 그것은 전구(戰區)와 군(軍) 사이의 전투병단지휘기구이다. 작전수요에 따라 설치된 것이며 일반적으로 2개 내지 3개 군 심지어 4개이상의 군을 관할했고, 또 어떤 경우는 1개군만 관할했다. 그외에, 몇개의 사로 구성된 특수한 편제(예를 들어 제18집단군)도 있었다. 이는 전투작전의 기본단위였다.
즉,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항일전쟁의 수요에 맞추어, 전국의 육해공군전투서열을 각 "로군"에서 통일적으로 "집단군"으로 개칭한 것이다. 국민혁명군 제8로군은 이로 인하여 제18집단군으로 개칭된 것이다.
팔로군은 항일전쟁에서 용맹하게 싸웠고, "팔로군"이라는 명칭은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은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기 위하여 끝까지 투쟁했다.
비록 팔로군이 정식명칭은 제18집단군으로 개칭되었지만,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중국공산당에서는 외교왕래나 전시명령을 발표하는 경우에 스스로를 제18집단군이라고 칭하는 외에, 절대다수의 경우에는 여전히 팔로군이라고 스스로를 불렀다. 내부문건이나 간부연설도 마찬가지였다. 전국민중, 심지어 일본군도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경우는 드물었고, 여전히 화북의 중공무장을 팔로군이라고 불렀다. 이건 또 무슨 이유에서일까?
첫째, 팔로군은 중공무장이 남경국민정부로부터 정식승인을 받은 최초의 명칭이다. 이전에 중공무장은 국민당당국에 의해 '적비(赤匪)'등의 명칭으로 불렸고 정식 이름은 없었다. 홍군장병들로 하여금 국민당정부의 개편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초기의 사상정치교육을 착실하게 진행하였기 때문에, '팔로군'이라는 명칭은 산서항일전선으로 향하기 전에 이미 중국공산당내에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져 있었다. 그후 몇번의 승리를 거두면서 팔로군의 장병들은 이 칭호를 영광스럽게 여기게 되었다.
둘째, 팔로군의 각 사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면서 평형관(平型關)전투, 양명보(陽明堡)공항야간기습전투, 안문관(雁門關)전투등에서의 승리로 일본군을 이길 수 없다는 신화를 깨트리게 된다. 이는 국민당군의 연전연패와 선명하게 대비되었고, 중국인들의 자신감을 크게 불러일으킨다. 팔로군이라는 명칭이 이들 전투의 승리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게 되고, 백성들에게도 익숙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습관이 된다. 이는 인민군중들도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좋아한 이유일 것이다. 그것은 승리를 대표하고, 희망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일본군은 진정한 적수를 만났고, 마찬가지로 '팔로군'에 대해 인상이 깊었다. 일본군의 눈에 '팔로'는 거의 공산당의 대명사가 되어버렸다.
셋째, 중국공산당은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고, 그리하여 국민당과 견결한 투쟁을 하게 된다.
항전전날, 장개석은 여산훈련반(廬山訓練班)에서 "항일전쟁과정에서 공산당의 역량을 5분의 2 삭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항전이 발발한 후, 국민당은 공산당 및 공산당이 지도하는 무장역량 특히 팔로군에 대하여 여러가지 제한조치를 취한다. 팔로군의 전투배치에서, "오대산 동북변방의 작은 지역(예를 들어 래원(淶源), 울현(蔚縣))만을 방어지구로 했으며, 그 산골짜기에서 일본군에게 포위섬멸당하도록 기도했다." 팔로군을 제한하기 위하여, 국민당은 <공당문제처치방법>에서 이렇게 말한다: "제18집단군이 국군으로 개편된 후, 군령, 군정은 중앙에 통일되어야 한다."; "지휘기구의 명칭을 통일하기 위하여, 모든 이전의 각 '로'의 명칭이 전투서열에 속하지 않는 경우는 모두 취소한다. 제8로군의 명칭도 동시에 취소하고 더 이상 계속 쓸 수 없다." 그리고 이런 말들을 퍼트린다. "팔로군은 유이불격(遊而不擊, 돌아가니기만 하고 공격하지 않는다)", 팔로군은 명령을 듣지 않는다." "팔로군은 실력을 키우고 있다." 심지어 공개적으로 "우리의 적은 일본이 아니라, 팔로군이다"라고까지 말하면서 팔로군명칭을 취소하기 위한 여론을 조성했다.
중국공산당은 "팔로군" 명칭을 계속 사용하기 위하여, 국민당과 날카롭게 대결한다. 1939년 1월 2일, 모택동은 팔로군총정치부가 발간한 <팔로군군정잡지>의 발간사에서 이렇게 말한다: "팔로군은 1년반의 항전에서, '기본적으로 유격전술을 사용하나, 유리한 조건하에서는 운동전도 늦추지 않는다' 정확한 정치방침을 집행했고, 화북의 유격전쟁을 견지하고 발전시켰으며, 많은 적후방의 항일근거지를 건설했고, 적의 점령지를 축소시켰으며, 대량의 적군을 견제하고, 정면주력군의 항전에 협력했다." 그러면서, 또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팔로군은 조국을 보위하기 위하여 희생분투하는 충성을 다하고,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사실은 명백하게 전국과 세계에 보여주었다. 반동파, 친일파와 일부 완고분자를 제외하고는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사실로 국민당의 반공 반팔로군 언론을 반박한 것이다. 1939년 2월, <중앙의 화북등지마찰문제에 관한 지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팔로군명칭은 적이 두려워하는 것이고,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것이니, 절대로 쉽게 고칠 수 없다." 그후, 중공과 팔로군은 공개적으로 국민당과 장개석등에 전보를 보내어 국민당완고파가 팔로군을 모함하고 능멸하는 것에 반대하고 반박했다.
1941년 1월 환남사변(皖南事變)후, 모택동은 신화사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민당은 '환남의 신사군(新四軍)을 소멸시켰을 뿐아니라, 신사군이 '반변(叛變)했다고 말하면서 군의 번호를 취소시켰다." 그리고, "핑계를 잡아, 팔로군이 반변했다고 선언하며 팔로군의 군호를 취소시키고, 주덕, 팽덕회를 수배하려고 기도하고 있다." 중공7대에서, 주은래는 장개석의 음모를 정곡을 찔러 폭로한다: "팔로군이라고 부르지 못하게 하고, 단지 제18집단군이라고 부르게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팔로군은 평소의 군대편제이다. 즉 평상시에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18집단군은 항전시기의 군대편제이고, 전시편제이므로, 전후에는 취소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다만 화북의 백성들이 그것에 대답할 것이다: 그래도 팔로군이라는 명칭이 적절하다. 18집단군이라는 글자는 외어서 부르기도 어렵다. 장개석이 이렇게 한 것은 팔로군을 취소시키려는 첫단계이다." 그러므로, 중공은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을 계속 고집했다. 이것이 설명하는 것은 중국공산당이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하는데서 국민당과 맞서싸웠다는 것이다. 이건 번호문제만이 아니었다. 중국공산당이 지휘하는 인민군대와 중국혁명의 운명에 관한 원칙문제였다.
정식으로 특히 국민당과 소통할 때는 중국공산당이 '제18집단군'이라는 번호를 많이 사용했고, 신문매체에서도 '제18집단군'으로 팔로군을 지칭했다.
8년항전기간동안, 중국공산당은 대내,대외적인 문건에서, 특히 국민당과 소통하거나 작전문서명령등을 내릴 때는 많은 경우 '제18집단군'이라는 번호를 사용했다. 1938년 1월 25일, 주덕, 팽덕회는 <제18집단군총사령부의 전술원칙에 관한 훈령>을 내린다; 1938년 2월 1일, 주덕, 팽덕회와 임필시(任弼時), 부종(傅鐘)은 공동으로 <제18집단군총사령부와 야전정치부의 정군(整軍)에 관한 훈령>을 내린다. 1939년 2월 15일, 3월 2일에도 다시 "제18집단군정치부"의 명의로 <간부교육을 강화하는데 관한 훈령>과 <일본군공작과 청년공작에 관한 지시>를 발표한다. 어떤 때는 "제18집단군총부"라는 명의로 명령을 발포했다.1939년 3월 15일, <생산운동을 전개하는데 관한 훈령>을 발포한다; 1940년 3월 2일 <병력확대공작에 관한 지시>를 발포한다등등. 일본군과 관련해서는 1941년 9월 15일에 발포한 <제18집단군정치부의 일본군포로우대방법에 관한 규정>, 1942년 3월 29일의 <제18집단군의 적의 독화(毒化)정책을 고발하고 타격하는데 관한 지시>등이 있다.
1939년말부터, 국민당완고파는 제1차반공붐을 일으킨다.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국면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1939년 12월 25일, 주덕, 팽덕회는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의 정,부총사령관의 명의로 제115사의 사장 임표(林彪), 제120사의 사장 하룡(賀龍), 제129사의 사장 유백승(劉伯承) 및 섬감녕변구(陝甘寧邊區)정부주석 임백거(任伯渠), 섬감녕변구 참의회 의장 고강(高崗), 제18집단군 후방유수처 주임 소경광(蕭勁光)과 연명으로 전국에 통전을 보내, 총구를 대내로 향하고, 변구로 진격하는 것에 반대했다. 1940년 1월 15일, 주덕, 팽덕회는 다시 한번 제18집단군의 정,부총사령관의 명의로 제18집단군산하의 정부(正副) 군정주관과 연명으로, 국민당의 임삼(林森), 장개석(蔣介石)에게 서신을 전보를 보내, '팔로군은 유이불격한다'는 주장을 반박하고, 팔로군, 신사군이 어려운 여건하에서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인욕부중하면서, 항일을 첫째로 하여 국가와 민족에 책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환남사변후, 중국공산당은 국민당에 대한 전면적인 정치적 반격을 가한다. 1941년 1월 18일 <중공중앙대변인의 환남사변 발표에 대한 담화>, 1941년 3월 2일 <공산당참정원 동필무(董必武), 등영초(鄧潁超)의 국민당참정회에 대한 공개서신>에서 모두 비교적 정식의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와서 봉사한 의사 가체화(柯棣華, Dwarkanath Kotnis)가 병사한 후, 주은래는 1943년 3월 22일 가체화의 가족들에게 보낸 위문서신에서도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친애하는 친구에게, 저는 제18집단군과 중국공산당을 대표하여, 가체화 의사의 서거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가장 깊고 진지한 애도를 표합니다." 1943년 국민당이 제3차 반공붐을 일으키자, 7월 6일, 주덕은 다시 한번 제18집단군의 총사령관의 명의로 장개석에 전보를 보내, 단결을 호소하고 내전을 피하자고 말한다.
1944년, 국공간에 국제원조물자의 분배, 적후항일근거지의 지위등의 문제를 놓고 여러번 담판을 벌인다. 쌍방간에 오고간 전보에서도 여러번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5월 15일, 모택동은 국민당이 제안한 20개조의 담판의견에 관하여 임백서에게 전보를 보내어 "정부는 물질적으로 충분히 제18집단군 및 신사군을 원조해야 한다"는요구를 하게 했다. 6월 3일, 모택동은 임백거등의 시국에 대한 평가와 담판의견에 대하여 전보로 회신하면서, "중경18집단군판사처 임백거동지"라고 시작한다. 6월 5일, 국민당은 임백서의 의견을 기초로 하여, 중공문제의 정치적해결에 대한 안건을 내놓는데, 군사문제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제18집단군 및 각지의 일체부대를 합하여 모두 4개군, 10개사로 편성하며 그 번호는 명령으로 정한다." 9월 15일, 임백거는 제3기 3차 국민참정회에서 국공담판에 대한 보고를 하며, 국민정부에 "특무인원의 공산당, 18집단군, 신4군 및 항일민주지구에 대한 파괴활도을 정지"하도록 요구했다고 했다.
신문매체의 보도에서도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된다. 1944년 7월 22일, <해방일보>의 한 뉴스의 시작부분은 이러하다: "신화사 연안 21일 전: 이번 달 십오일 일본 '중국파견군'당국은 중국에서 독가스를 사용했다는 것을 부인했다. 오늘, 18집단군 참모장 섭검영(葉劍英) 동지는 성명을 발표하여 반박했고, 전세계인사들에게 일본군이 수년동안 적후방근거지에 독가스를 사용하여 우리 항일군민을 해친 죄행을 고발한다고 말했다."
1944년 8월 12일, 주은래는 국공담판문제에 관해 신화사기자와 인터뷰하면서, "18집단군"으로 팔로군을 지칭했다. 예를 들면, "동맹국원조문제에 관하여, 정부에서는 동맹국이 중국에 원조한 무기, 탄약, 약품, 금전을 마땅히 정당한 이율로 18집단군과 신4군에도 분재해야 한다. 그외에 '간당(奸黨)', '간군(奸軍)', '간구(奸區)'등 중공, 18집단군, 신4군 및 각 항일근거지를 모욕, 능멸하는 칭호를 취소하고, 특무인원이 중공, 18집단군, 신사군과 각 항일근거지에서 벌이는 파괴활동을 중단하도록 지시하는 통령을 정부에 여전히 요구하고 있다." 국통구의 매체에서도 "18집단군"으로 팔로군을 지칭했다. 환남사변후, 국공관계가 긴장되면서 1941년 5월 21일 <대공보(大公報)>는 사평(社評)을 통해 <진남(晋南)전투를 위한 일종의 호소>에서 "국가, 민족의 대의명분 하에서, 18집단군은 마땅히 진남전투에 즉시 참가해야 한다....18집단군이 만일 이렇게 한다면, 적의 유언비어가 모조리 없어지게 될 뿐아니라, 충용을 크게 떨칠 것이고, 단결을 견지하는 신념을 완전히 실천하는 것이 될 것이다."
중공은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을 항전승리까지 계속하여 사용해왔다. 1945년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모택동이 직접 초안한 <제18집단군총사령부에서 장개석에게 보내는 두 개의 전보>에서 장개석이 공산당군대에게 일본군이 투항할 때 '원주둔지를 방어하며 명을 기다리라"고 명령하고, 내전을 준비하는 것에 대하여 날카롭게 해방구의 모든 무장부대는 일본군의 투항을 받을 권한이 있다고 말하면서, 중국공산당의 6개항주장을 제기하고, 전국인민들에게 장개석의 내전음모를 경계할 것을 교육하게 했다. 8월 15일, 주덕은 또한 중국해방구 항일군총사령관의 명의로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의 투항을 요구하는데 관한 명령>을 내린다.
결론적으로 중국공산당내부의 문건에서는 '팔로군'이라는 명칭을 많이 사용했지만, 정식 경우 특히 대외적으로 소통하는데서는 '제18집단군'이라는 명칭이 더 많이 사용했다. 이를 합법적인 번호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지키고, 투쟁의 견결성, 신축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팔로군"이라는 명칭은 전체 항일전쟁때 계속하여 사용했으며 한번도 중단된 적이 없다. 지금, "팔로군"은 여전히 빛나는 명칭이고, 남녀노소 모두가 아는 명칭이며,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명칭이다. 세계군대역사상의 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을 이룩한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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