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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곽말약)

곽말약(郭沫若)과 문혁(文革)

by 중은우시 2023. 5. 28.

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

 

57년전의 문혁은 수도 없이 많은 이슈를 남겼다. 그러나 중국과 세계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다수의 글은 그저 그 일부분만 건드리고 있다. 마치 맹인이 코끼리를 만지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모두 자신만의 문혁이 있다. 이는 자신과 가정이 문혁때 한 역할 및 경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사람들의 문혁에 대한 평가에 대하여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중국정계와 문단에서 유명한 인물이 서로 다른 시기와 공간에서 그에 대한 평가가 양극을 달린다니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만의 어려운 점이 있었다는 것도 알 수가 있다.

 

이 사람은 저명한 무산계급문학가, 시인, 극작가, 고고학자, 사상가, 고문자학자, 역사학자, 서예가, 학자이며 저명한 혁명가, 사회활동가로 국내외에 명성을 떨쳤다. 그는 중국 신시(新詩)의 기초를 닦은 사람이고, 노신(魯迅)이후 혁명문화계의 공인된 영수였다. 그는 바로 곽말약(1892.11.16 - 1978.6.12)이다.

1. 문혁기간중 곽말약의 처지

 

건국후 일련의 정치풍파를 겪은 곽말약은 곧 도래할 문혁의 기세가 흉맹할 것을 예감하고 마음 속으로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1966년 1월, 그는 중국과학원 당조서기 장경부(張勁夫)를 통해 사직서를 제출한다:

 

"나는 오랫동안 개인적인 바램이 있었는데, 오늘에야 당신에게 서면으로 진술합니다.

 

나는 귀가 멀고, 최근 들어 시력도 쇠퇴하여, 과학원의 업무를 다할 수가 없습니다. 나 자신은 마음 속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느껴, 하루하루 불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일찌감치 과학원의 일체의 직무(원장, 철학사회과학부 주임, 역사연구소 소장, 과학기술대학 교장등등)를 사임할 뜻을 가졌습니다. 모쪼록 고려해주셔서 영도에게 올려 비준을 받아주십시오.

 

나의 이 요청은 오랜 동안 생각한 끝에 나온 것이며, 다른 바르지 못한 생각은 전혀 없으니, 혜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곽말약의 사직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일부 사람들은 비판의 창끝을 곽말약에게 향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직접 곽말약에게 편지를 쓰고 기고를 하여, 그의 문예작품과 사학저작중의 일부 견해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어떤 문제는 원칙에 관련된 것으로 상당히 엄중했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이다. 곽말약의 <만강홍(滿江紅).영수송(領袖頌)>의 "청웅계일창편환중(聽雄鷄一唱遍寰中), 동방백(東方白)"에 대하여 전국인민이 '동방홍(東方紅)'을 부르는데, 왜 당신만 '동방백'이라고 말하느냐, 도대체 무슨 의도인가?

 

1966년 4월 14일, 곽말약은 전인대 상무위원회 제30차(확대)회의에서 문화부 부부장 석서민(石西民)이 쓴 <사회주의문화대혁명에 관하여>라는 보고를 들은 후, 회의석상에서의 즉석발언을 통해, 당시 문화계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한 마디를 한다:

 

"수십년간, 나는 붓을 들고 글을 써왔고, 약간의 글을 번역했다. 글자수를 헤아려보니, 아마 수백만자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내가 이전에 쓴 것들은 엄격하게 말해서, 마땅히 모조리 불태워버려야 한다. 조그만치의 가치도 없다."

 

1973년 봄, 모주석은 곽말약을 비판하고 유종원(柳宗元, 당송팔대가중 한명으로 진시황의 중앙집권을 찬양한 당나라때의 저명한 시인이자 정치가임)을 찬양하는 말을 한다: 

 

곽로종류퇴(郭老從柳退)

불급유종원(不及柳宗元)

명왈공산당(名曰共産黨)

숭배공이선(崇拜孔二先)

 

곽말약은 일찌기 "5.4"시기 "타도공가점(打倒孔家店)"의 구호가 크게 울릴 때, 홀로 나서서, 공자도 혁명의 '선구자'라는 견해를 내놓는다. 그리고 여러 비판자들 앞에서 이치를 따지면서 논쟁을 벌였고,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항전시기에는 더더욱 <십비판서(十批判書)>를 써서 진시황의 독재정치를 욕했다. 당시에는 권력자인 장개석(蔣介石)을 빗대어 비난한 것이었다.

 

1973년 5월, 중앙공작회의는 주석의 '비공(批孔)'에 관한 의견을 전달한다. 그는 사람을 시켜 큰 글자체의 <십서>를 안배하여 "평법비유(評法批儒, 법가를 평가하고 유가를 비판함)"에 썼다.

 

7월 4일, 모택동은 왕홍문(王洪文), 장춘교(張春橋)와 얘기할 때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정식으로 동지들에게 책들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야 지식분자들에게 속지 않는다. 무슨 곽로(곽말약), 범로(范老), 임계유(任繼愈), 양류교(楊柳橋)같은 류의 쟁론에. 곽로는 현재 다시 공자는 노예주의 성인이라고 말한다. 곽로는 <십비판서>에서 자칭 인본주의, 즉 인민본위주의라고 했다. 공자도 인본주의이니 그와 같다. 곽로는 공자를 존경할 뿌나니라, 법가에 반대한다. 존공반법. 국민당고 마찬가지이다. 임표도 역시 그랬다!"

 

8월 5일, 모택동은 다시 강청(江靑)에게 그의 신작 <독(봉건록), 증곽로>라는 시를 기록하게 한다:

 

권군소매진시황(勸君少罵秦始皇)   권하건데 진시황을 더 이상 욕하지 말라

분갱사건요상량(焚坑事件要商量)   분서갱유사건은 좀 따져볼 필요가 있다.

조룡혼사업유재(祖龍魂死業猶在)   진시황은 죽어도 그의 업적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공학명고실비강(孔學名高實秕糠)   공자의 학문은 명성만 높지 실제는 쭉정이이다.

백대다행진정제(百代多行秦政制)   백대에 계속하여 진나라의 정치제도가 행해졌으니

십비불시호문장(十批不是好文章)   <십비>는 좋은 글이라고 할 수가 없다

 

다만, 주은래가 곽말약은 마땅히 보호해야할 일부간부명단에 넣어놓았고, 모주석도 그 명단을 승인했기 때문에, 문혁기간동안 곽말약은 홍위병들에게 비투를 당하는 액운은 겪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의 '폭풍'은 곽말약에게 두 아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어린아들 곽민영(郭民英)은 음악학원에서 '특수화'로 고발당한 후, 1967년 4월 우울증에 빠져 자살하고, 다음 해 4월에는 아끼는 아들 곽세영(郭世英)이 농업대학의 조반파에게 붙잡혀 갇힌 후 고생끝에 죽고 만다.

 

2. 곽말약 두 아들의 죽음

 

곽민영은 어려서부터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한때 중앙음악학원에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1964년, 곽민영은 집안의 녹음기를 휴대하고 학교로 갔고, 친구들과 함께 고전음악을 감상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음악학원의 '엄중한 문제'라고 보고, 모택동에게 글을 올려 "봉,자,수(봉건주의, 자본주의, 수정주의)", "대,양,고(大人, 洋人, 古人)"를 고발하고 비판하자는 기치를 내걸며, 곽민영이 "특수화"를 꾀한다고 질책한다. 곽민영은 "자산계급생활방식을 자랑한다"는 비난과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크게 상처입고 좌절한다. 그리하여 우울증을 앓게 된다. 정신병으로 고통을 겪던 곽민영은 음악학원의 억압된 환경 속에서 더 이상 생활할 수가 없어, 할 수 없이 다음 해에 퇴학한다.

 

원래, 곽말약은 곽민영을 인민대학으로 전학시켜 공부하게 하려 했다. 1학년부터 시작해도 상관없었다. 그리하여 곽말약은 비서 왕융생(王戎笙)에게 이 업무를 맡긴다. 그리고 곽민영에게도 의견을 물어봤다. 그러나 학교생활에 공포를 느낀 곽민영은 응락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곽말약부부는 곽민영을 군대에 보내기로 결정한다. 군대라는 용광로에 들어가면, 곽민영의 성격도 바뀔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곽말약은 이를 위하여, 직접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있던 나서경(羅瑞卿)을 찾아가 만난다. 어려서부터 바다를 좋아하던 곽민영은 해군에 입대한다. 곽민영은 음악천재이고, 군대에서는 그런 인재가 드물었다. 게다가 총참모장이 직접 안배하였으니, 중용받는다. 그리하여 중공예비당원이 된다. 다만, 문혁의 맹렬한 비판투쟁의 폭풍이 다시 그의 상처입은 기억을 환기시켰는지, 아니면 다른 원인에서였는지는 몰라도 곽민영은 돌연 자살해버린다.

 

그때 자살은 스스로 인민과의 관계를 끊고, 스스로 당과의 관계를 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래서 조그만치의 동정도 받지 못했다. 곽민영은 사후에 군적과 당적이 취소된다. 아들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들은 곽말약 부부는 상심이 컸지만, 조직에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자녀를 잘 교육하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을 하면서.

 

이쪽 호로박을 누르면 다른 쪽이 튀어오르고, 한 물결이 지나가면 다른 물결이 닥친다. 1968년 4월 22일, '문혁'의 폭풍은 다시 그의 아끼는 아들 곽세영을 집어삼킨다.

 

곽세영은 곽말약의 여러 자녀들중에서 가장 재능이 뛰어났다. 그리고 성격이나 기질이 곽말약을 가장 닮았다. 만일 곽민영의 자살은 그래도 질병때문이라고 한다면, 곽세영이 죽은 것은 완전히 '문혁'으로 인한 것이다.

 

1968년때, 중국농업대학의 학생들은 곽세영에 대하여 감시를 진행한다. 왜냐하면 그가 자주 독자적인 생각을 얘기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모택동사상은 둘로 나누야 한다든지, 8개의 양판희(樣板戱)는 개선할 곳이 없지 않다든지. 직접 해를 당안 원인은 그가 여자친고와 전화할 때 영어를 썼다는 것이다. 그걸 다른 학생이 들었고, 그가 이통외국(裏通外國)한다고 보아 바로 체포한다. 곽세영은 한번 도망쳤는데, 청소실에 숨어 있다가 다른 학생들에게 발견되어 다시 붙잡혀 오고, 심하게 구타를 당한다. 곽세영이 조반파에 붙잡힌 것은 4월 19일로 금요일이었다. 월요일에 농업대학혁명위원회가 선발해서 보낸 대표가 곽말약부부에게 알려준다: "곽세영은 이미 스스로 인민을 떠났다." 사후 곽씨집안의 강력한 요구로 부검의가 시신감정을 했는데, 결과는 "높은 곳에서 추락사했다"는 것이다. 죽은 곽세영은 온 몸이 상처투성이었고, 팔뚝, 발목은 밧줄로 묶여서 혈육이 모호했다....

 

주은래는 곽세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특별히 곽말약의 집을 찾아가서 위문한다. "혁명에는 항상 희생이 따른다. 위유희생다장지(爲有犧牲多壯志), 감교일월환신천(敢敎日月換新天)." 주은래는 곽세영의 죽음에 대하여 연락원을 파견하여 조사하게 했지만,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결국 흐지부지되고 만다.

 

어떤 사람은 곽세영이 능욕을 참지 못하고 자살로 그의 피의 항의를 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곽세영이 묶인 채로 3층에서 밀려 떨어져서 죽은 것이라고 한다. 곽세영의 직접사인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이다.

 

3. 곽말약의 문혁기간의 시사(詩詞)

 

1967년 6월 5일, 아시아아프리카작가상설국이 주최한 모주석의 <연안문예좌담회상의 발언>25주년기념토론회에서 곽말약은 <평생 모주석의 좋은 학생이 되자>라는 제목의 폐막사를 하면서. 그는 흥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즉석에서 시를 한 수 읊는다. "이 자리에 참석하신 강청 동지에게 바치고, 또한 여러 동지와 동료들에게 바칩니다."

 

친애적강청동지(親愛的江靑同志)

니시아문학습적호방양(你是我們學習的好榜樣)

니선어활학활용전무불승적모택동사상(你善於活學活用戰無不勝的毛澤東思想)

니분불고신지재문에전선상함진충봉(你奮不顧身地在文藝戰線上陷陳冲鋒)

사중국무대충만공농병적영웅형상(使中國舞臺充滿工農兵的英雄形象)

 

친애하는 강청동지

당신은 우리가 배워야할 좋은 모범입니다.

당신은 백전백승의 모택동사상을 생생하게 배워서 생생하게 활용했고,

당신은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문예전선에서 선봉으로 돌진하여,

중국무대를 공농병의 영웅이미지로 충만하게 했습니다.

 

이 시사는 대체로 곽말약이 가장 욕먹는 시사중 하나일 것이다.

 

문혁의 고압과 위세하에, 병중의 곽말약은 성의있는 "자아비판"을 한다. 그는 1974년 2월 7일 병석에서 붓을 들고 두 수의 칠률을 지어 모주석에게 바친다. 제목은 <춘뢰(春雷)>이다.

 

춘뢰동지포소소(春雷動地布昭蘇)

창해군룡경토주(滄海群龍竟吐珠)

긍정진황공백대(肯定秦皇功百代)

판선공이유여고(判宣孔二有餘辜)

십비대착명여화(十批大錯明如火)

유론고첨찬약주(柳論高瞻燦若朱)

원여공농제보벌(願與工農齊步伐)

척제오탁회신도(滌除汚濁繪新圖)

 

독서삽재탐용혈(讀書卅載探龍穴)

운수망망미득주(雲水茫茫未得珠)

지유신방의속골(知有神方醫俗骨)

난배고독곤궁우(難排蠱毒困窮隅)

기감저력비승묵(豈甘樗櫟悲繩墨)

원갈노태효책구(願竭駑駘效策驅)

최행춘뢰경대지(最幸春雷驚大地)

촌심초각식귀도(寸心初覺識歸途)

 

아음의 두 시사는 겨우 5달을 사이에 두고 지은 것인데, 그 내용은 정반대이다.

곽말약같은 대문호, 대인물도 이러했을진데, 하물며 우리같은 초민들이야 더 말할 것도 없지 않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