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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주은래)

주은래(周恩來)의 여비서 양강(楊剛)은 왜 자살했을까?

by 중은우시 2023. 10. 4.

글: 왕우군(王友群)

 

1957년 10월 7일 새벽, 양강은 그녀의 북경 매사후통(煤渣胡同)의 숙사 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그녀는 다량의 수면제를 먹고 죽었으며, 나이는 겨우 52세였다.

 

이때 양강은 <인민일보> 부총편집이었다. 이전에 그녀는 당시 국무원 총리인 주은래의 판공실주임비서였으며 주은래의 국제사무와 대외선전업무를 처리하는 조수중 한명이었다.

 

양간은 왜 자살했을까?

 

1. 인병설(因病說)

 

그녀의 미국인 친구인 존 킹 페어뱅크(John King Fairbank, 費正淸)의 견해이다.

 

1955년, 그녀는 불행히도 교통사고를 당했고, 심각한 뇌진탕을 일으켰다. 치료를 받은 후에도 후유증이 남아서, 자주 두통으로 힘들어 하며 정상적으로 업무를 볼 수 없었다. 그녀는 부득이 병가를 청했고, 광동의 종화(從化), 항주(杭州)에서 요양했다. 그러나 효과는 별로 없었다.

 

존 킹 페어뱅크는 이렇게 분석했다: "그녀는 그녀의 대뇌가 심각하게 손상된 것을 발견했고, 더 이상 쓸모있는 업무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녀는 자살한 것이다."

 

다만, 그녀의 신문사 동료들에 따르면 그녀는 자살하기 전에 회의에 참석하고, 원고를 쓰고 기사를 처리했는데 모두 정상적이었다. 이는 그녀의 병세가 업무에 크게 지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2. 원고분실설

 

모택동의 대비서 호교목(胡喬木)의 견해이다.

 

호교목은 <양강문집(楊剛文集)>의 서문에서 이렇게 적었다: "1957년 10월, 그녀는 우연히 노트를 한권 분실했다. 비록 아무런 책망도 듣지 않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신경쓰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매우 긴장했다(이는 당시의 긴장된 정치분위기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10월 7일 정신이 지극히 비정상적인 상황하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호교목의 기억에는 착오가 있다. 양강이 노트를 잃어버린 것은 1957년 10월이 아니라, 1950년 10월의 일이다. 

 

1950년 10월, 주은래의 비서로서, 양강은 중요한 노트를 분신했다. 그 안에는 당의 기밀이 적혀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주은래에게 징계를 요청한다. 주은래는 이렇게 말했다. 노트가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원래 노트를 주운 사람이 이미 노트를 주은래에게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당시, 주은래는 그녀를 징계하지 않았고, 그녀는 주은래의 곁에서 1953년까지 계속 일했다.

 

1953년,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이 체결된 후, 양강은 주은래의 곁에서 하던 일을 끝내고, 중앙선전부 국제선전처의 처장으로 옮겨간다. 19554년에는 <인민일보>의 부총편집이 된다.

 

양강이 노트를 잃은 일은 7년전에 발생한 일이다. 비록 실수였지만, 그녀에게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3. 이상붕괴설

 

중국작가 부국용(傅國涌)은 이 견해를 취한다.

 

양강의 인생경력을 되돌아보면, 이 주장이 더욱 설득력있는 것같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양강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혁명에 투신하여, 목숨을 걸고 분투한 것은 모두 그녀가 공산주의이상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녀의 가정까지 버렸다.

 

양강의 원래 이름은 양계휘(楊季徽)이고, 조적(祖籍)은 호북(湖北) 면양(沔陽)이며, 1905년 강서(江西) 평향(萍鄕)의 한 관료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 양회강(楊會康)은 무창수비(武昌守備), 강서도대(江西道臺), 악성정무청장(鄂省政務處長), 호광조운사(湖廣漕運使), 호북성대성장(湖北省代省長)을 지냈다. 그리고 고적서화 자기의 수집가였다. 모친은 대지주집안의 천금소저였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가숙(家塾)에서 고적을 배웠고, 중학은 미국인이 개설한 교회학교인 남창보령여중(南昌葆靈女中)을 다녔으며, 대학은 미국인이 개설한 교회대학인 연경대학(燕京大學)을 다녔다.

 

연경대학에서 공부할 때, 그녀는 당시 많은 열혈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진보사상의 영향을 받아 중공에 가입하고 혁명의 길을 걷는다.

 

그러나, 바로 중공이 북벌전쟁기간동안 농민들을 부추겨서 그녀의 집을 불태우고, 그녀집안의 재산을 나누어주고, 그녀의 부친을 감금시킨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과 헤어져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북경대학 경제학과 학생인 정간(鄭侃)에게 시집갔고, 딸 하나를 두었다. 그러나 그후, 그녀와 남편은 인생관이 달라 자주 싸웠다.

 

하루는 그들이 크게 싸우게 된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좋은 처나 좋은 모친이 될 수는 없다. 시대는 나에게 사명을 부여했다. 나에게 구식의 현모양처가 되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더더구나 남자에게 의존하는 평범한 여자가 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은 말한다: "당초 나도 혁명진리를 추구했고, 인생의 길을 탐색했다. 나는 너의 혁명정신을 존중한다. 그러나 네가 집안에서 항상 혁명만 생각하며, 남편과 아이는 마음에 두지 않도록 할 수는 없다. 물어보겠는데, 그런 혁명이 무슨 좋은 점이 있겠는가?"

 

그렇게 싸운 후 그녀와 남편은 서로 갈라선다.

 

이렇게 그녀는 자신의 혼인을 버렸다.

 남편과 헤어진 후 그녀는 계속 독신이었다. 한 해는 홍콩에서 그녀가 중화항적문예가협회 홍콩분회주석인 허지산(許地山)을 만난 후, 허지산의 부인이 그녀를 위해 중매를 서겠다고 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먼저 부인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부인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사랑에 대해서도 깊이 느꼈을 겁니다. 사랑은 양방향이고, 서로 진심으로 사랑해야 비로소 인류의 가장 성결한 정신생활이 될 것입니다. 그저 억지로 함께 있는 것은 부부관계를 용속한 정욕의 파트너가 되게 만들 뿐입니다. 저는 현재 차라리 고독하게 생활할 지언정, 마음이 맞지 않는 남자와 억지로 함께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재혼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유일한 딸과도 오랫동안 헤어져 있었다.

 

딸인 정광적(鄭光迪)은 3살 때, 친구이자 미국 여교수인 포귀사(包貴思)의 집에 맡겨 길렀고, 그후 그녀는 어린 딸을 연안으로 보낸다. 딸이 중학을 다닐 때 그녀는 미국에 있었다; 딸이 대학을 다닐 때, 그녀는 상해에 있었다. 딸이 소련유학을 떠났을 때, 그녀는 북경에 있었다. 그녀가 자살할 때도 딸은 여전히 소련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당의 사업을 위해 자신을 불태웠다.

 

1928년 중공에 비밀가입한 후, 그녀는 북방 "좌익작가연맹"의 발기인이자 조직자중 한명이었다.

 

1933년 봄, 그녀는 상해에서 중국좌익작가연맹에 참가하고, 중공을 위하여 선전하던 미국의 좌익작가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 史沫特萊)를 알게 된다. 그해 가을, 그녀는 북평(북경)으로 돌아와 한 미국기자가 중국현대단편소설선인 <살아있는 중국>을 번역하는 것을 도운다. 이 미국기자는 바로 나중에 중공찬가인 <중국의 붉은 (西行漫記)>를 쓴 에드가 스노이다.  

 

1937년, 그녀는 <대공보>의 기자가 되고 나중에 신문사를 따라 홍콩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소건(蕭乾)을 이어 <대공보> 부간의 편집을 책임진다. 그리고 이 작은 부간이 "갑옷을 입고, 전포를 걸친" 하나의 '호통(號筒)'으로 만든다. '붉은 비단옷을 입고 태양을 향해 소리높이 외치는 호통이 된다'

 

1943년, 그녀는 중경으로 가서 계속 <대공보>의 문예부간의 편집을 맡는다. 그녀의 재능을 주은래가 인정한다. 주은래는 그녀에게 편집인, 기자 신분으로 미국주중대사관인원과 미국기자들과 연락하도록 지시한다. 이 기간동안 그녀는 미국주중대사관 신문처주임으로 일하던 존 킹 페어뱅크를 알게 된다.

 

1944년-1948년 그녀는 대공부 주미특파원이 된다. 중공의 지시에 따라, 그녀는 대량의 미국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까발리는 통신을 쓰게 된다.

 

그녀는 미국의 신문계, 문예계와 극동문제전문가들 사이를 다니면서 미국이 경제적, 군사적으로 중화민국을 지지하는 것에 반대하고, 미국의 중공에 대한 동정을 호소했다.

 

그동안 1945년-1947년, 그녀는 하버드대학 레드클리프여자학원에 들어가 문예를 공부한다.

 

1948년 11월, 그녀는 중공의 명을 받아 귀국한다. 홍콩에서 그녀는 <대공보> 사평위원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전력을 다해 <대공보> 총경리 호정지(胡政之)와 총편집 왕운생(王芸生)를 설득하여, 일찌기 "부당(不黨), 불매(不賣), 부사(不私), 불맹(不盲)"을 신문종지로 삼던 <대공보>를 국민당에 반대하고, 공산당을 옹호하도록 만든다.

 

그녀는 홍콩에서 북상하여, 서백파(西柏坡)로 간 후, 중공지도자 모택동의 접견을 받는다.

 

1949년초, 그녀는 명을 받아 천진 <대공보>를 중공의 <진보일보>로 개조하고, 부총편집, 당위서기를 맡는다.

 

1949년 5월, 그녀는 명을 받아 남하하여 상해 <대공보>의 군대표가 되어 이 신문도 중공의 확성기로 개조한다.

 

1950년 그녀는 명을 받아 북경으로 돌아와 외교부 정책연구실 주임비서가 된다. 얼마 후 주은래총리판공실의 주임비서로 옮겨간다.

 

일찌기 <인민일보> 총편집을 맡았던 오냉서(吳冷西)의 회고에 따르면, "한국전쟁 정전협상 3년간, 그녀는 매일 저녁식사후에 총리당직실로 가서 당직을 서며 밤을 새웠다. 12시간 연속하여 일을 했으며 주은래총리가 맡긴 일을 우수하게 완성하여, 총리의 외사처리에서 아주 믿을만한 조수가 된다."

 

다만, 1955년 그녀는 <인민일보>로 옮겨오고, 1957년까지 그녀는 직접 모택동이 일으킨 한차례 또 한차례의 사람을 숙청하는 정치운동을 겪게 된다.

 

특히 1957년 모택동이 일으킨 반우파운동때, 많은 저명한 신문인, 작가, 예술가들 그녀의 친구, 상사, 동료를 포함해서 하나 둘 타도되고 전국의 상하에서 모두 불안에 떨게 된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있던 희망의 불은 점점 꺼져갔다.

 

1940년대, 중국좌익작가연맹에는 3대여기자가 있었다: 팽자강(彭子岡), 포희수(浦熙修), 양강.

 

1957년이 되어, 팽자강과 포희수도 우파로 몰린다.

 

그녀는 부득이 팽자강을 비판하는 회의에서 발언해야 했다. 그녀가 <대공보>의 동료로 있을 때, 그녀와 함께 생사를 넘나들던 중공지하당원인 팽자강을 비판해야만 했던 것이다.

 

1957년이 되어, 그녀의 연경대학 동창이자 오랜 친구인 소건도 우파로 몰린다.

 

항전전에, 그녀는 소건으로 하여금 <대공보> 문예부간을 맡게 했고, 이때부터, <대공보>는 중공근거지 문예작품을 가잠 낳이 발표하는 3대신문중 하나가 되었다.

 

1949년, 소건은 이미 영국 캠브리지대학의 초청장을 받아놓아서, 귀국하는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극력 권하여 귀국하여 '신중국'을 위해 힘쓰게 했었다.

 

그런데, 지금 소건은 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몇 마디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했다고 하여, 반당반사회주의반모택동사상을 가진 나쁜 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가 자살하기 하루 전, <인민일보>의 "반우영도소조"의 제3인자로서 부득이 소건을 비판하는 글을 써야만 했었다.

 

그녀의 글은 다음날 신문에 실릴 터였다. 그날 저녁, 편집인 섭요(葉遙)는 그녀의 글의 교정을 책임졌다. 심야23시가 넘어, 교정이 거의 끝날 때쯤 그녀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 섭요에게 초조해하며 말했다. "발표하지 말아라!"

 

그녀가 자살하기 이틀전, 그녀는 문련 강당에서 거행된 정령(丁玲), 풍설봉(馮雪峰), 애청(艾靑)등 8명에 대한 비판대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정령의 옆 자리에 앉았다. 당시 정령은 손수건을 꺼내서, 계속하여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표정이 어두웠고, 마치 목석같았다.

 

당시 중국작가협회 당지부서기를 맡고 있던 여신(黎辛)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나와 중조부장 안자문(安子文)이 양강의 자살에 대하여 얘기나눌 때, 안자문이 나에게 이렇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날 회의를 누가 알았느냐?' 나는 말했다. 우리 5인소조가 알고 있다고. 안자문이 다시 물었다: '그리고 또 누가 아느냐?'. 나는 말했다: "중앙선전부 부장과 부부장이 압니다.' 나는 또 다시 말했다: '부장 육정일(陸定一)은 정치국후보위원, 부총리이니, 이 일이 간여하지 않았을 겁니다.' 안자문은 돌연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럼 주양(周揚)이군. 분명 주양이 양강에게 통지했겠네. 그는 전과를 확대시키고 싶었던 거였군.'"

 

주양은 당시 중앙선전부 부부장이었고, 모택동이 문예계를 숙청할 때 가장 악독한 실행자중 한명이었다. 반우파운동에서 과거 그를 반대했거나, 그를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던 사람(반드시 존중하지 않았던 사람만이 아니라)은 모조리 그에게 타도되었다. 작가 위군의(韋君宜)는 그녀의 <사통록(思痛錄)>에서 이렇게 썼다. 이리저리 숙청하다보니 문예계에는 오직 그(주양을 가리킴)만이 '정확'한 사람이었다!

 

주양은 양강을 찍어서 정령의 비투대회에 참가하게 했다. 이에 양강은 전율했다.

 

여자문(黎子文)은 이렇게 썼다: "그 장면은 양강으로 하여금 그녀도 정령처럼 비투당할 수 있다고 느끼게 만들었을 것이고, 그리하여 자살했을 것이다."

 

1957년 6월 9일, 반우파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인민일보>의 <이것은 무엇때문인가?>가 발표된 다음 날, 양강은 "금은화(金銀花)"라는 필명으로 <인민일보> 부간에 <나에게 몇 마디 화나는 말을 하게 해달라>는 글을 발표한다. 이건 그녀가 생전에 발표한 마지막 글이다. 그녀는 이렇게 썼다:

 

"형제들이여, 나는 그때 우리가 함께 꾸었던 꿈을 생각한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수억명의 꿈이라면 분명히 아주 클 것이다. 그때, 미국인과 지주관료자본의 채찍이 우리를 땅바닥에 구르게 만들었다. 우리의 고뇌는 하늘만큼 컸다. 우리의 꿈도 하늘만큼 컸다. 하늘에는 붉은 깃발이 휘날리고, 천막과 연통이 서로 끌어안고, 우리의 홍기를 둘러싸고 소리쳤다. 소리치면서 우리의 강렬한 시편을 내뿜었다. 강철의 화염과 연기, 우리는 모두 일어서서, 보라새긔 아침해를 맞이한다. 그리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사회주의라고.....사회주의의 거센 물결은 사람들을 영원히 실어갈 것이다. 비록 우리는 말다툼도 하고, 점수를 다투고, 음식을 다투며, 관료주의에 반대하지만...그러나, 공산당이 없으면 신중국도 없다. 공산당이 없으면 사회주의도 없다. 형제들이여 우리 함께 꿈을 꾸고, 함께 꿈을 생활로 만들자. 설마 이게 잘못이란 말인가? 설마 우리가 꿈을 잘못 꾼 것이란 말인가!"

 

"설마 우리가 꿈을 잘못 꾼 것이란 말인가?" 이 오랫동안 억눌러두었던 말이 결국 그녀의 마음 속에서 터져나왔다. 아마도 이것은 그녀가 개인적으로 공산주의를 위해 분투한 이상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결론

 

모든 것을 당에 바친 충성스러운 딸인 양강은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중공은 "자유와 존엄(수천년동안 그들이 얻지 못했던 자유와 존엄)을 위하여 투쟁하는 위대한 민족의 화신"이라고.

 

다만, 중공이 신중국을 건립한 후 진행한 몇 차례의 정치운동 특히 눈앞에 펼쳐지는 반우파운동은 그녀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이상과 잔혹한 현실의 대비는 실로 너무나도 잔혹했던 것이다.

 

모택동은 먼저 지식인들에게 당에 의견을 제출하라고 호소했다. 당을 도와달라고 하면서 지무불언(知無不言), 언무부진(言貿不盡), 언자무죄(言者無罪), 문자족계(聞者足戒). 순진한 지식인들은 마음 속에 있던 말을 모두 내뱉었고, 한차례, 또 한차례 그들은 모두 반당 반사회주의 반모택동사상을 지닌 우파분자로 몰리게 되고, 비판받아 타도된다.

 

수십년동안, 그녀가 죽어라 추구하던 자유는 어디에 있는가? 존엄은 어디에 있는가?

 

이상은 원래 거울 속의 꽃(鏡中花)이다. 일생의 분투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양강은 절망했고, 결국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