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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56

이신(李信)의 경적(輕敵)이 패전의 원인인가? 작자: 미상 사서에 기록된 이신(李信)의 연나라공격과 초나라공격의 시간순서는 약간 혼란스럽다. 이신은 한나라의 비장군 이광의 조상이다. 그의 평생사적은 정사에 그다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단지 <사기.왕전백기열전>에 몇 마디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이신은 총사령관.. 2012. 10. 5.
리커창(李克强)은 누구인가? 글: 하중원(何中原) 리커창은 간부가정출신이고 청소년시기에 부친 리펑산(李奉三)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았다. 리펑산은 안휘성(安徽省)의 지방관리로, 일찌기 펑양현(鳳陽縣) 현장을 지낸 바 있고, 그후에 안휘성 지방지판공실 부주임으로 있다가 퇴직한다. 1955년 7월, 리커창은 안휘.. 2012. 9. 19.
환관과 사대부: 누가 더 나쁜 짓을 많이 했는가? 글: 문재봉(文載縫) 동한 후기 하진(何進)은 여동생과 후궁태감의 관계를 이용하여 대장군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그는 대권을 장악한 후,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무고하고 선량한 태감들을 해친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사서에는 함부로 적었다. 이것은 모두 태감들이 횡행불법을 저질.. 2012. 9. 19.
진시황의 자손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글: 진사황(秦四晃) 진왕 영정은 육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고나서 자신만만하게 소리친다: "짐은 시황제이다. 후세는 숫자로 계산한다. 이세부터 삼세, 만세까지 영원무궁하게 전해지도록 할 것이다."(<사기.진시황본기>). 시황제의 뜻은 그를 시작으로 하여 그후 중국의 황권은 .. 2012. 5. 30.
이각(李恪): 당태종이 가장 사랑한 아들 글: 장걸(張杰) 두 왕조의 혈맥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영예가 아니라, 재난이었다. 만일, 운명을 바꿀 용기가 없다면, 그저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릴 뿐이다. 그는 명문출신으로, 대당(大唐)의 황자(皇子)이면서, 전조인 대수(大隋)의 황손(皇孫)이기도 하다. 그는 두 왕조의 황족혈.. 2012. 2. 6.
"위무자손(魏武子孫)"과 "조만유종(曹瞞遺種)" 글: 갈검웅(葛劍雄) "장군위무지자손(將軍魏武之子孫), 어금위서위청문(於今爲庶爲淸門)" 장군은 위무제 즉, 조조의 자손인데, 지금은 평범한 백성집안이 되었네. 이것은 당나라의 대시인 두보(杜甫)가 유명화가인 조패(曹覇)에게 써준 시 <단청인(丹靑引)>의 첫부분이다. 비록.. 2012. 1. 31.
모택동은 왜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을까? 글: 유계흥(劉繼興) 역사상 진실한 제갈량은 업적이 출중한 정치가이다. 촉국을 다스리는데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뛰어난 점은 많지 않다. <삼국연의>에서 그려진 것처럼 그렇게 용병여신(用兵如神)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삼국연의>는 민간에 영향이 아주 .. 2012. 1. 1.
음모궤계(陰謀詭計)에 관하여 글: 우해파(鄔海波) 중국역사서적에 널리 퍼져있는 상고시대의 전설은 이렇다: 개명한 군주가 다스려서 백성들은 평안하고 행복하기 그지없는 생활을 즐겨서 세외도원이라 할 만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이루어진 상(商)나라 귀족무덤에 대한 발굴은 사실이 그렇지 않았음을 드러내준다. 대량으로 출토.. 2011. 4. 4.
양귀비와 안록산의 사통설 글: 월초(越楚) 후세인들에 의하여 중국고대 ‘4대미녀’중 하나로 꼽히는 양귀비는 태어나면서부터 빼어난 용모를 지녔을 뿐아니라,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추었으며, 음률에도 능통했으니, 당나라 연예계의 제일인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나라의 최고 스타로서, 스캔들이 나지 않을 수 없다. 그.. 2010. 11. 24.
설회의(薛懷義): 무측천의 수석남총 글: 나걸(羅杰) 어떤 사람은 무측천이 남총(男寵)을 둔 것은 심리적인 필요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생리적인 필요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두 가지 모두라고 말한다. 역사연표로 보자면, 당고종 이치(李治)는 홍도원년(683년)에 사망했다. 이해에 무측천은 61세이다. .. 2010. 9.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