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유계흥(劉繼興)
역사상 진실한 제갈량은 업적이 출중한 정치가이다. 촉국을 다스리는데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뛰어난 점은 많지 않다. <삼국연의>에서 그려진 것처럼 그렇게 용병여신(用兵如神)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 <삼국연의>는 민간에 영향이 아주 컸다. 그러나 그것은 연의 즉 소설이지, 역사서는 아니다. 삼국시대의 역사를 진실하게 기록한 역사서는 <삼국지>이다. 노신은 <삼국연의>를 비판하면서, "제갈량을 지혜가 많아서 요사스럽게 그렸다(多智而似妖)"고 하였는데 바로 정곡을 찌른 탁견이다.
<삼국연의>의 영향을 깊이 받아서, 민간에서는 제갈량을 거의 신처럼 떠받들고, 제갈량이 고금제일의 군사천재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가 최종적으로 실패한 것에 대하여는 '때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등등 여러가지 핑계를 대준다. 군사적인 조예가 깊었던 모택동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제갈량의 둔전(屯田), 병기혁신, 민족화합등의 역사적공적은 인정했다. 그러나, 제갈량의 군사적재능에 대하여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왜 그랬을까?
역사와 군사를 잘아는 모택동이 사물을 분석하는 것은 확실히 독보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가 현상을 뚫고 본질을 보는 공력에 대하여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항상 그중 핵심을 찌르니 입목삼푼(入木三分)이다. 그는 여러 차례 제갈량이 군사적 분야에서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고, 제갈량이 최종적으로 실패한 것은 천시(天時)를 원망할 것이 아니라, 실패의 근원은 제갈량의 군사전략과 실천에서의 여러가지 실수때문이라고 보았다.
모택동은 제갈량의 군사상 실수를 3가지로 지적했다.
첫째, 장수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1948년 5월중순 서백파(西柏坡). 어느날 오전, 이은교(李銀橋)는 화산촌에 있는 모택동이 거주하는 방을 청소하고 있었다. 바깥에서 산책을 하고 돌아오던 모택동은 어린아이처럼 살금살금 이은교의 뒤로 다가가서 돌연 고함을 지른다. "꼼짝마. 두 손 들어!"
돌연, 이은교는 몸을 돌려 두 손으로 모택동의 두 팔을 붙잡았다. 모택동은 두 팔을 뽑으려고 몸부림치면서 웃으며 말했다. "너를 위사조장으로 삼은 것은 내가 잘못 뽑은 것이 아니구나!"
이는교는 말했다: "주석께서 언제 사람을 잘못뽑으신 적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모택동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나 모택동은 첫째, 석가모니가 아니고, 둘째 제갈량이 아니다. 제갈량이라 하더라도 관우를 잘못 쓰고, 마속을 잘못 쓴 때가 있었다."
이은교는 이해가 되지 않아 묻는다. "제갈량이 어떻게 관우를 잘못 쓴 것이라고 하십니까?" 모택동이 대답한다: "당초 제갈량이 형주를 지켰다. 유지가 제갈량을 사천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제갈량은 관우를 형주에 남겨서 지키도록 하지 않았어야 한다. 관우로 하여금 형주를 지키게 한 것은 잘못된 한 수이다. 관우는 오만했다. 관우는 사상적으로 동오를 무시했다. 제갈량의 동오와 연합하여 조위에 항거해야한다는 전략방침을 진지하게 집행하려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제갈량의 전략의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 결과 근거지를 잃었다. 형주를 잃었다. 자신마저도 동오에 피살당한다."
이은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그저 제갈량이 읍참마속한 것만 알고 있었습니다. 마속이 가정을 잃었기 때문에, 제갈량은 공성계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택동이 말한다. "그것도 제갈량이 사람을 잘못 쓴 사례이다."
형주(荊州)는 <삼국지>에 따르면, "북으로 한나라를 막고, 이익이 남해에 미치고, 동으로 오나라와 연결되어 있고, 서로는 파촉과 통한다" 그 전략적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를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이 교만하고 동오와의 연합전략방침을 집행할 생각이 없었던 관우를 잘못 기용하는 바람에, 나중에 관우가 형주를 잃는 비극이 발생한다. 형주를 잃으면서 손권과 유비가 반목하고, 촉한의 국세는 이때부터 역전이 불가능하게 되어버린다. 제갈양은 참담한 댓가를 치러야 했고, 촉한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 역사에 대하여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등소평까지도, "제갈량은 사람을 쓸 때 수단을 잘썼다. 그러나, 관우에 대하여는 영합한 측면이 있고, 원칙도 지키지 못했다. 관우의 오만한 정서를 조장했고, 나중에 큰 잘못을 저지르게 만들었다."
마속을 잘못 써서 가정을 잃은 결과도 아주 심각했다. 모종강이 삼국을 평할 때 했던 말처럼, "가정을 잃은 것은 공명으로 하여금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게 만들었다....그리하여 남안을 버릴 수밖에 없게 되고, 안정도 부득이 넘겨주고, 천수도 부득이 포기한다. 기곡의 병력도 부득이 철수해야 하고, 서성의 군량미도 거두지 않을 수 없데 된다. 마침내 하후를 붙잡고, 최량을 참하고, 양릉을 죽이고, 상방을 취하고, 기현을 습격하고, 왕랑을 욕하고, 조진을 격파한 공로는 모조리 물거품이 되었다. 슬프도다." 결론적으로 이는 제갈량의 첫번째 북벌의 성과를 모조리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전체 형세가 역전되어 촉군은 철수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없게 된다. 마속의 잘못을 강조하는 것에 대하여도 모종강은 비교적 적절한 평론을 한다: "마속이 실패한 것은 병법의 성어를 가슴 속에 잘 기억하고 있었는데, 기껏해야 '사지에 놓인 후에 살 길을 찾는다.', '높은 곳에서 내려보면 파죽지세이다'는 것들 뿐이다. 자리에 앉아서 시비를 논하는 것은 잘하지만, 실제로 집행하는 것은 못한다. 책을 많이 읽었지만, 적용하는 것은 잘 못했다. 어찌 크게 한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므로 사람을 잘 쓰는 것은 말에 있지 않으며, 병사를 잘 쓰는 것은 책에 있지 않다."
둘째, 중요한 시기에는 총사령관이 친히 전투에나서서 전투를 지휘하여야 한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자치통감. 권71. 위기3>을 보면 이런 기록이 있다. "처음에, 월태수 마속은 재주가 남들보다 뛰어났고, 군사계책을 논하기를 좋아했다. 제갈량은 그를 중시하였다...군대를 기산에서 출동시킬 때, 제갈량은 옛장수인 위연, 오의등을 선봉으로 기용하지 않고, 마속을 여러 군대를 지휘하여 앞장서게 하여, 장합과 가정에서 싸우도록 하였다. 마속은 제갈량의 지시를 어기고 물을 버리고 산으로 오른다. 아래로 내려가 성을 점거하지 않았다. 장합이 그의 물길을 끊고,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병사가 흩어진다. 제갈량이 앞으로 나아가도 점거할 곳이 없어서 서현의 천여가가 한중으로 돌아간다. 마속을 하옥한 후, 죽인다." 모택동은 이 내용을 읽고 이렇게 평했다. "처음 전투에 제갈량은 마땅히 친히 전투에 임했어야 한다." 가정의 전투에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고 전진하고, 직접 지휘했어야 하며, 병력을 분산해서는 안되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미뤄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우수한 군사지휘관은 언제든지 적군과 아군의 강약형세의 변화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하고, 유리한 시기를 선택하고 유리한 지리조건을 이용하여 적을 이겨야 한다. 제갈량이 북벌할 때, 촉한의 전체적인 실력은 조위보다 약했다. 당시 유비가 서겋하여 위나라의 변방은 여러해동안 공격을 받지 않고 있었다. 관중과 농우지역은 병력이 비어있었고, 수비가 느슨했다. 이는 제갈량에 있어서 하늘이 내린 좋은 기회이다. 제갈량은 원래 이 유리한 시기를 이용하여 대군을 이끌고 장안까지 직접 치고들어가 관중을 평정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갈량은 대장 위연의 병력을 집중하여 관중을 취하자는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운, 등지를 한 부분으로 하여 기곡을 공격하고, 마속, 왕평을 한 부분으로 하여 가정을 공격하게 한다.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기산에 주둔했다. 그리하여 병력을 집중시켜 공격할 수가 없었다. 원래 상대적 강세이던 촉한의 병력이 분산된 것이다. 그래서 강세가 약세로 바뀐다. 결과적으로 마속이 가정에서 패배하는 것이다. 장합이 마속을 포위공격할 때, 제갈량은 가정으로 밀고 올라가서 마속과 호응했어야 하고, 장합과 결전을 벌였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모택동이 평한 "제갈량은 당연히 친히 전투에 임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갈량도 나중에 자신의 잘못을 의식한 것같다. 모택동은 다시 <자치통감. 권71. 위기4>에서 제갈량이 목문도에서 장합을 죽인 일을 기록한 곳에 이렇게 적었다: "가정을 잃은 후, 매번 출병할 때면 제갈량이 군대내에 있었다." 그는 이것을 제갈량이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가정의 실패는 제갈량이 주요한 책임을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지>의 배송지의 주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제갈량도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대군이 기산, 기곡에 있었고, 모두 적보다 많았다. 그러나 적을 이기지 못하고 적에게 졌다. 이 병은 병력이 적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때문이다." 두번의 전투패배는 한 사람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그 한 사람이 누구인가? 제갈량 자신이다. 제갈량이 전투에 실패한 더욱 심층적인 원인은 그의 전략사상에 잘못이 있었고, 전쟁수단을 지나치게 강조했고, 사회정치경제변화등 요소가 천하를 평정하는데 미치는 작용을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심층적인 원인은 제갈량의 초기북벌에 실패하게 만들었을 뿐아니라, 전체적인 북벌전쟁의 실패로 몰고갔던 것이다. 진수는 <삼국지>ㅇ서 이렇게 평가했다. 제갈량은 "해마다 사람을 동원하였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임기응변을 하는 것은 그가 잘하는 것이 아니었다."
명제청룡2년(234년), 제갈량은 10만대군을 이끌고 사곡(지금의 섬서성 미현 서남)으로 출병한다. 위수남원에 방어선을 쌓는다. 명제는 사마의에게 촉군을 막으라고 명령한다. 제갈량은 대군을 이끌고 먼 길을 왔으므로 속전속결이 유리하다. 사마의는 성을 굳게 지키며 나와서 싸우지 않았다. 제갈량이 여러차례 도전했고, 여러 장수들도 제갈량과 싸우고 싶어했지만, 사마의는 모두 따르지 않고 병력을 움직이지 않는다. 제갈량의 부대가 지치기를 기다린다. 제갈량은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보내어 사마의에게 "건국부인의 악세사리"를 보내어 사마의를 자극하여 싸우고자 한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계교를 이제 다 쓴 것이라고 생각하여 대노한 것처럼 행동하며, 조정에 글을 올려 결전을 벌이겠다고 요청한다. 조정은 윤허하지 않고, 깐깐한 신비를 감군으로 보내어, 위군이 출전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사마의가 통상적인 사람은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았다. 그리고 왕명을 빌려 여러 장수들을 제어했다. 이를 보면 그의 지략을 엿볼 수 있다. 사마의의 더욱 큰 지략은 전투를 하지 않은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갈량으로 하여금 스스로 패배하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모택동이 평할때 "사마의는 제갈공명의 지혜를 상대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모택동은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 사마의는 대단한 인물이다. 내가 보기에 조조보다 몇 수는 뛰어나다. 모택동의 이 두 가지 평가를 보면, 사마의의 군사재능은 조조나 제갈량보다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셋째, 군사전략의 실수
모택동은 소순(蘇洵)의 <권서.항적>을 읽다가 제갈량이 "형주를 버리고 서촉으로 갔다. 나는 그의 무능함을 알겠다"라는 부분을 읽을 때 아주 뛰어난 평어를 남긴다: "그 잘못의 시작은 <융중대>이다. 천리나 먼 곳에서 병력을 둘로 나누고, 마지막에는 관유, 유비, 제갈량으로 병력을 삼분하니, 어찌 실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대이래로 사가들은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내놓은 전략사상에 대하여 칭찬을 금치 못했다. 그러나, 모택동의 평가는 독보적이고 탁견이다.
모택동이 제갈량의 잘못을 <융중대>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천하에 변고가 있으면, 한 장수에게 명하여 형주의 병력을 이끌고 완, 락으로 진공하고, 장군이 익주의 무리를 이끌고 진천으로 나가면, 백성들이 음식과 음료수를 가지고 나와서 장군을 맞이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 언뜻 보면, 형주, 익주의 두 갈래로 출격하는 것은 아주 유혹적인 방안이다. 그러나, 모택동은 아주 잘 꿰뚫어 보았다. 형주와 익주는 천리나 떨어져 있다. 두 곳에서 병력을 나누는 방식은 유비군단으로 하여금 병력상의 우세를 잃을 수밖에 없다. <융중대>를 실시한 결과는 바로, 관우가 지키는 형주를 손권군단의 기습에 빼앗기고, 또한 관우부자가 손권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촉한이 쇠망한 화근은 <융중대>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모택동이 말한, "관우, 유비, 제갈량이 병력을 삼분했다"는 것은 관우가 형주를 지키고, 유비가 동오로 진격하고, 제갈량이 중원을 북벌한 것을 말한다. 이 '삼분병력'이 차례로 전개되고, 앞의 두 번의 병력분산이 가져온 실패는 아주 참담했다. 촉한의 원기가 크게 상한다. 제갈량의 북벌때 본전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모택동은 탄식한다. 병력을 삼분하였으니 어찌 실패하지 않으리오.
제갈량의 이 삼대 실책은 촉한에게 거대한 손실을 가져온다. 그래서, 역대이래로 제갈량을 위대한 군사가로 보는 잘못된 여론은 역사의 사실 앞에서 그대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삼국연의> 소설에서, 제갈량은 적벽대전의 최대공신으로 그려진다. <모택동선집> 제1권 204페이지의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를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중국전쟁사상 이 원칙에 부합하여 승리를 얻은 실례는 아주 많다. 초한 성고대전, 신한 곤양지전, 원조의 관도지전, 오위의 적벽대전, 오촉의 이릉지전, 진진의 비수지전등의 유명한 전투가 있다. 모두 쌍방의 강약이 서로 다르고, 약자가 먼저 한발 양보한 후, 후발제인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다." 이 말에서 모택동은 적벽대전을 '오위 적벽대전'으로 정의했다. 이는 제갈량이 적벽대전에 공헌을 하였다는 것을 그다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1953년, 모택동은 <청년단의 공작은 청년의 특징을 잘 살펴야 한다>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조조가 대군을 이끌고 강남으로 남하해서 동오를 공격했다. 그 때 주유는 '청년단원'으로 당시 동오의 총사령관이다. 정보등 노장이 불복하였으나, 나중에 설득하였고, 역시 그가 담당했으며, 결과적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말은 모택동의 입장을 잘 보여준다. 그는 적벽대전의 최대공신을 주유라고 보았지, 제갈량으로 보지 않았다.
모택동은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을 별로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다른 분야의 재능은 아주 높이 평가했다. 1930년 여름, 모택동은 홍사군간부회의의 업무보고를 했다. 선전선동업무를 얘기하면서, 그는 삼국시대 황충이 하후연을 대파한 이야기를 꺼냈다. 황충은 원래 나이가 많고 체력이 약해서 하후연을 이기기 힘들었다. 그러나, 지모가 뛰어난 제갈량은 '격장법'을 써서, 황충의 용기를 불러일으킨다. 그리하여 황충은 군령장을 쓴다: 만일 하후연을 참하여 말아래로 떨어뜨리지 않으면, 군법을 달게 받겠다. 그는 말한다. 우리의 전사들은 높은 계급적 각성이 있어서, '격장법'을 쓸 필요가 없다. 다만, 우리는 제갈량의 선전선동업무는 배워야 한다.
1950년 4월, 모택동은 북경 중남해에서 동기무 장군에게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은 공산당을 무서워한다. 그게 뭐 무서울 게 있느냐. 공산당은 마음과 입이 일치한다. 표리가 일치한다. 사적인 이익을 도모하지 않는다. 단결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단결시킨다. 우리 국가를 잘 만든다. 너는 <삼국연의>를 봤느냐? 공산당은 바로 제갈공명의 방법대로 일처리한다. 그것은 바로 "충신(忠信)을 말하고, 독경(篤敬)을 행하며, 성삼(誠心)을 열고, 공도(公道)를 펼치며, 중사(衆思)를 모으고, 중익(衆益)을 널리 편다"
모택동은 제갈량이 둔전제를 채택하여 변방을 공고히 한 방법에 대하여 충분히 긍정했다. 1955년 원단, 그는 왕진과 퇴역군인의 배치문제를 논의할 때 이렇게 말한다: 변방에 주둔하며 개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고대에 둔간제가 있었다. 관중도 했었고, 제갈량도 한중에서 했었다.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여 취업시키면, 전쟁의 상처를 치료하고, 변방을 공고히 할 수 있다.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모택동은 제갈량이 실천과정에서 혁신한 것을 높이 평가했다. 1962년 2월, 그는 남경포병공정기술학원의 원장 공종주와 날로 진보하는 과학기술을 얘기할 때, 제갈량의 병기혁신을 얘기한다: 우리의 조상이 사용한 십팔반무기중에서 칼창과 같은 류는 모두 진공성 무기에 속한다. 궁전은 창의 연장이자 발전이다. 화살을 오차가 크므로 다시 노기(弩機)를 만든다. 제갈량의 개선을 거쳐 한꺼번에 십여발의 화살을 쏠 수 있게 되고 정확성이 높아졌다. 그는 맹확을 정벌할 때 이런 선진무기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맹획도 방법이 있었다. 그는 삼천 등갑병으로 제갈무후의 노기가 제 작용을 하지 못하게 만든다. 제갈량은 조사연구를 거쳐, 등갑은 기름을 먹인 것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불로 등갑군을 태워버린다.
모택동은 제갈량의 '칠종칠금'도 아주 높이 평가했다. 제갈량이 민족관계를 처리할 줄 알았고, 그가 집행한 민족정책은 비교적 좋았으며, 소수민족의 옹호를 받았다. 모택동은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의 배송지가 인용한 <한진춘추>의 한 주석에 공백인 곳이 있는데, 많은 동그라미를 그려놓았다. 이 주석은 제갈량이 이족의 영수 맹획을 칠종철금한 것을 기록했다. 그리고 남중을 평정한 후 지방호족을 관리로 대거 임용하여 안배한 일을 기록했다. 그는 말했다. 이것은 제갈량이 고명한 점이다.
1953년 8월, 서남군구 참모장을 맡고 있던 이달이 모택동에게 귀주에서 포의족 여자비적 우두머리인 정연진을 체포한 것을 보고할때 이렇게 말한다: 이 여비적두령은 아래에서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택동은 말한다: 죽일 수 없다. 쉽지 않게 여자비적두령이 나타났고, 게다가 소수민족인데, 죽인다면 아깝지 않겠는가. 그는 또한 말한다. 사람들은 제갈량이 맹획을 붙잡고 칠종칠금을 할 수 있었는데, 우리는 정연진을 붙잡았는데 왜 팔종팔금하지 못할 것인가. 양종양금마저도 안된단 말인가? 결론적으로 붙잡았다고 바로 죽이면 안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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