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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공통)

환관과 사대부: 누가 더 나쁜 짓을 많이 했는가?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문재봉(文載縫) 

 

동한 후기 하진(何進)은 여동생과 후궁태감의 관계를 이용하여 대장군으로 승진한다. 그러나, 그는 대권을 장악한 후,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무고하고 선량한 태감들을 해친다. 이것은 무엇때문인가?

 

사서에는 함부로 적었다. 이것은 모두 태감들이 횡행불법을 저질러 국가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 화근을 제거한 것이라는 것이다. 소설 <삼국연의>이건, 사서 <삼국지>이건, <후한서>이건, <자치통감>이건 모두 이렇게 해석했다. 그리고, 현대의 관련 서적에서 작가들이 이 당시의 이야기를 적을 때 모조리 눈을 감고, 고인들이 함부로 적은 내용을 그대로 배껴쓰고 만다.'

 

사실상, 횡행불법을 저지르고, 국가를 어지럽힌 것으로 말하자면, 이들 사대부들이 더 많이 저질렀다. 더욱 잔인하고 더욱 사악했다.

 

사서에서 환관이 횡행불법한 기록은  단지 3가지이다. 사서는 사대부들이 적는 것이다. 만일 환관들이 나쁜 짓을 더 저질렀다면, 사관들이 절대로 그냥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긁어모으고 모아서 겨우 3개를 적었다. 이를 보면, 태감들이 나쁜 짓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나쁜 짓을 한 빈도나 정도에 있어서 확실히 사대부들보다는 많이 약했다.

 

마찬가지로 사서는 사대부들이 적은 것이므로, 만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그들은 사대부들이 태감에 대하여 저지른 사악한 죄행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저 만부득이한 상황하에서만 기록했다. 그러나, 이들 기록만으로도 이미 간담이 서늘하고 손가락질을 할 만하다.

 

먼저 사서에서 태감의 죄행에 대한 3가지 기록을 보자:

첫째는 160년, 환관이 명신 조기(趙岐)의 전가족을 죽였다.

둘째는 166년, 환관이 민간여자를 사살(射殺)한다.

셋째는 179년, 환관이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걸어두었다.

 

이 세 가지 일은 아주 잔인하고, 사악하다. 그러나 사대부들의 잔인, 사악과 비교하면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사대부들이 저지른 나쁜 일을 몇 가지만 걸리는대로 들어보자. 어느 쪽이 더욱 사악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사대부 양구(陽球)를 얘기해보자. 그는 환관집안의 딸을 처로 맞이한다. 대환관 왕맹에게 아부를 잘하여, 마침내 고위직까지 오른다. 그런데 나중에 돌연 안면을 바꾸고, 왕맹부자를 모조리 감옥에 집어넣는다. 왕맹은 그에게 살려달라고 했지만, 양구는 진흙을 왕맹부자의 입에 넣어 말을 못하게 막고, 부자 두 사람을 때려서 죽였다.

다음으로 환관이 민간여자를 사살했다는 사건은 실제로 환관 서황의 조카인 서선이 한 일이다. 그러나 사대부인 동해상 황부는 서선의 전가족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모조리 잡아서 고문을 가한다. 

 

그외에, 사대부 장검이 있다. 그는 길에서 대환관 후람의 모친을 만난다. 그는 두 말도 하지 않고 그 할머니를 죽여버린다. 그리고, 이왕 시작한 것 끝을 본다고, 후람의 집으로 쳐들어가서, 후씨집안의 노소 1백여명을 모조리 죽여버린다. 이렇게 듣는 사람의 모골이 송연할 멸문혈안을 일으킨다.

사건발생후, 장검은 관직을 버리고 도망친다. 도중에 그를 재워준 집은 모조리 관청에 체포되어 벌을 받는다. 그중 가장 비참한 것은 바로 공융(孔融)의 형인 공포(孔褒)였다.

 

"융사세(融四歲), 능양리(能讓梨)". 공융은 네 살 때 배를 양보할 줄 알았다. 이것은 <삼자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공융은 4살의 어린 나이일 때, 배를 고르면서 작은 것을 고르고 큰 것을 남에게 양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공융이 배를 양보할 때 누구에게 양보했는가? 바로 그의 형인 공포이다.

비참한 공포는 큰 배를 양보받아 먹었기 대문에 결국 목숨을 잃게 된다.

 

사대부 장검은 대환관 후람의 온집안 식구를 죽인 후 곡부의 공가까지 오게 된다. 문을 두드렸고, 문을 열어준 것은 9살된 공융이었다. 공융은 장검을 집안으로 들인다.

얼마후 사건이 터지고, 관청이 책임을 묻는다. 비록 문을 어린 공융이 열었으나, 그는 나이가 너무 어리다. 행위능력과 책임능력이 없다. 그의 형 공포는 이미 16살이고, 이전에 공융에게 배를 양보받아먹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이 일은 공포가 책임지는 것으로 하자. 공융은 4살 때 배를 양보했고, 공포는 16살 때 목숨으로 이를 갚았다. 그래서 공포는 관청으로 끌려가서 목이 잘린다.

이것이 바로 '공융양리'의 후속이야기이다.

 

순식간에 공융은 어른이 된다. 그리고 북해국상이 된다. 그도 사대부가 된 것이다. 하루는 그의 부친 장례를 치르는데, 현지의 군중들에게 모두 곡을 하라고 한다. 죽은 사람이 그들의 부친이 아닌데,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끌려오다보니 곡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공융이 어떻게 했을 것같은가?

공융은 그의 부친의 묘 앞에서 곡을 하던 사람을 죽여버린다. 죄명은 비통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말해서, 사대부의 풍격과 덕성이 이렇다. 인간성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절대로 태감보다 선량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사악했고, 창의성이 있었다.

하진이 태감집단을 죽인 것은 태감들이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니다. 태감들이 한 나쁜 짓은 한계가 있었으나, 사대부들이 한 나쁜 짓은 한계가 없었다. 태감집단을 죽인 것은 목적이 단 하나이다. 책임전가.

무슨 책임을 전가했단 말인가?

184년, 낭중 장균은 글을 올려 십상시를 탄핵한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것은 모두 십상시 때문이니, 십상시를 죽여서 천하에 고해야, 천하가 태평해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