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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문혁후)

리커창(李克强)은 누구인가?

by 중은우시 2012. 9. 19.

글: 하중원(何中原) 

 

리커창은 간부가정출신이고 청소년시기에 부친 리펑산(李奉三)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았다. 리펑산은 안휘성(安徽省)의 지방관리로, 일찌기 펑양현(鳳陽縣) 현장을 지낸 바 있고, 그후에 안휘성 지방지판공실 부주임으로 있다가 퇴직한다. 1955년 7월, 리커창은 안휘성 허페이(合肥)에서 태어난다. 어렸을 때, 그는 좋은 가정교육을 받았고, 안휘성 합비시 제8중학에서 공부한다. 합비팔중은 1956년에 창립되어, "완선자아(完善自我), 추구탁월(追求卓越)"을 교훈으로 하며, 교풍은 "존사(尊師), 육재(育才), 여지(礪志), 구진(求眞)"으로 유명하다. 개성이고 특색있는 명문학교이다.

 

그러나, 리커창은 정치동란의 시대에 살았다. 중학에 들어간지 얼마되지 않아, 문화대혁명이 발발한다. 일시에 학교는 쑥대밭이 되고, 수업활동은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다. 얼마후, 전국의 모든 학교는 수업중단상태에 빠지고, 대학입학시험도 취소된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한 리커창은 성적이 뛰어났지만, 할 수 없이 공부를 그만두고 집에서 지낸다. 당시 부친 리펑산은 자주 리커창을 데리고 안휘성 문사관(文史館)에서 근무하는 국학대사(國學大師) 리청(李誠)을 찾아가서 담문논도(談文論道)한다. 리펑산과 리청은 시를 말하고 글을 얘기하며, 서로 화답하는데, 두 사람은 자주 오전부터 저녁까지 말을 나누면서도 피곤한 줄을 몰라했다. 곁에 있던 리커창은 자주 그들이 시를 읊을 때 억양돈좌(抑揚頓挫), 수무족도(手舞足蹈)하며 완전히 몰입해있는 광경에 감동을 받는다.

 

소년 리커창은 총명하고 공부를 좋아했다. 천부적인 재능이 남달랐다. 그래서 리청은 그를 제자로 삼고는 하나하나 가르친다. 그에게 중국의 국학, 치학의 방법 및 고금일사(古今逸事)를 가르친다. 어떤 때에는 그에게 진지하게 설문해자(說文解字)해주기도 한다.

 

그후, 리커창은 자주 리청의 집으로 가서 설문해자를 듣는다. 리청은 몸이 약하고 눈이 좋지 않음에도 자주 리커창을 위하여 독서목록을 만들어주고, 문풍, 학문 내지 지신응세(持身應世)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쳤다. 그는 리커창에게 <사기>,<한서>,<후한서>,<자치통감>등 역사를 읽게 했고, 리커창에게 <소명문선(昭明文選)>, <고문사류찬(古文辭類纂)>등 고문선을 모조리 외우게 했다.

 

리커창이 봐서 모르거나 들어도 모르는 곳이 있으면, 그는 온화한 어조로 그에게 가르쳐주었다. 어떤 때는 리커창에게 당시를 가르치기도 했다. 하루에 한 수를 가르치고, 매번 1수를 가르칠 때마다 1시간의 시간을 들여서 관련된 고사와 배경을 알려주었다. 거의 매 문장 매 시는 모두 리커창의 지식에 대한 갈망에 뜻밖의 수확과 만족을 주었다.

 

리청을 스승으로 모시던 5년의 시간동안, 리커창은 '수업중단 및 혁명'의 나날동안 학업을 내버려주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학식이 날로 늘어갔다.

 

1974년 3월, '지식청년은 농촌으로 가서,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으라"는 구호하에 리커창은 다른 학생들과 홍기를 펼치고 북과 징을 울리는 시끄러운 와중에 큰 버스를 타고 펑양현 대묘공사(大廟公社) 동릉지대(東陵支隊)로 떠난다. 농촌에 삽대(揷隊)하면서 처음으로 집을 떠나게 된다. 막 집을 나서자 리청이 골목어귀에 서 있었다. 그를 떠나보내는 것을 아쉬워했다. 헤어지면서, 리청은 그에게 공부를 계속하고, 농촌에서 배우고, 사회에서 배우고, 책에서 배우라고 당부한다.

 

펑양은 명태조 주원장의 고향이다. 그래서 '제왕지향'이라는 이름이 있다. 도시에서 이 편벽되고 가난한 오지로 갔으니, 리커창으로서는 고생이 막심하다고 할 수 있다. 땅도 낯설고 물도 낯설다보니, 그는 온 몸의 피부가 문드러지고 헐어버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농사일을 계속했고, 1년이 끝날 때까지 모든 사람들이 "인민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새겨진 보자기에 마른 음식과 절인 채소를 넣고서 농지로 가서 일했다. 점점 농촌생활에 익수해지며, 농사일도 대부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해는 노동강도가 강한데다가 식용유와 채소가 부족하여, 식사량이 아주 많아졌다. 혁명정신에 결사정신으로 리커창은 근골을 단련하고, 의지를 연마하였다. 삽대기간동안 리커창은 매일 농사일을 하고 밤에 돌아왔다. 그러면서 리청의 당부를 잊지 않았다. 허페이에서 가져온 책으로 독학한다. 밤이 되면 등을 켜놓고 읽곤 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지식을 실천해보기도 했다. 농민들을 이끌고 과학영농을 하고, 벼의 우량품종을 보급하기도 하여, 농민의 옹호와 인민공사 당조직의 인정을 받는다.

 

1976년 5월, 그는 마침내 금추은겸(金錘銀鎌)의 당기 아래에서 오른손을 들고, 장엄하게 선서한다. 이 순간, 그는 자신이 진정으로 어른이 되었다고 느낀다. 자신은 이미 도시에서 '사지르 쓰지 않고, 오곡도 구분할 줄 모르는" 어린학생에서 농민과 가깝게 얘기를 나눌 수 있고, 농촌,농민,농업을 아는 지식청년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 순간 리커창은 홍색 출발점에 선 것이다.

1970년대말, 리청이 사망한다. 마침 펑양에서 삽대노동하고 이미 대묘공사 대묘대대 당지부서기가 된 리커창은 그 소식을 듣고 슬픔을 금치 못한다.

 

1997년 5월 15일,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를 맡고 있던 리커창은 <안휘일보>에 <리청선생을 추억하며>라는 글을 발표한다. 그는 글에서 은사와의 교류하던 이런저런 이야기를 추억한다: "리선생은 매일 항상 단정하게 탁자앞에 앉아서,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혹은 붓을 들고 동그라미를 그리고, 혹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신음했다. 매일 매일, 해가 바뀌어도 그러했다." 리커창은 리청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선생은 "차가운 돼지고기를 먹으며, 뜨거운 걸상(凳)위에 앉아 있는" 치학태도를 보였고,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원칙을 엄격하게 지킨다. 리청의 언행과 품행은 리커창의 청소년시대를 함께 하였고, 리커창으로 하여금 학식이 풍부하고, 고금의 시서를 통달하게 해주었으며, 그의 인생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1977년 8월, 덩샤오핑의 결정으로 대학입시가 부활된다. 라디오방송을 통하여 이 소식을 듣고, 리커창은 기쁨을 금치 못한다. 다행히 자신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리커창은 즉시 책을 준비하여, 공부에 매진한다. 목마른 사람처럼 '시험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일을 하고 남은 시간에 그는 시험을 준비하고, 아침일찍부터 밤늦게까지 공부한다. 모든 것은 그 당시에는 머나먼 꿈이었던 대학입학을 위한 것이다.

 

이해 12월, 겨울에 시험이 치러진다. 이는 시대의 전환점이다. 리커창은 570만명중 한 명이었다. 운명을 바꿔놓을 시험장에 들어간 것이다.

 

대학지원서를 채울 때, 그의 제1지망은 안휘사범학원이었고, 제2지망은 북경대학이었다. 어쨌든 이 해의 대학입시는 신중국성립이래 가장 치열한 한 해였다. 합격률이 29:1이었다. 그는 북경대학의 입학점수가 너무 높아서, 비록 마음은 북경대학에 있지만, 제2지망으로 써넣게 된 것이다.

일반 사람들은 그가 지원을 써넣을 때의 모순된 심리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리커창이 도대체 어떻게 된 거냐? 대학지원을 어떻게 이렇게 했느냐?

 

곧이어 견디기 힘든 기다림이 있었다. 20일, 10일, 5일....대학합격통지서를 마침내 받아든다. 여러 날동안 불안했던 마음이 드디어 진정된다. 리커창을 흥분시킨 것은 자신이 꿈에도 그리던 북경대학 법률계에 합격한 것이다. 이것은 펑양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977년말, 리커창은 영광스럽게 '77학번'의 일원이 된다. 나중에 리커창은 회고한다: "대학지원을 써넣기 전에, 나는 일찌기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학자의 서신을 받았다. 그는 일찌기 북대를 졸업했고, 그곳이 지식의 금자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신에서 나에게 말해주었다. 10년만의 기회를 놓치지 마라. 북대가 유일한 선택이다. 당시에 나는 많은 시간을 고향사람들과 함께 사느라 바빴다. 거의 다른 꿈을 꿀 수가 없었다. 생존욕과 지식욕이 교차하며 나는 제1지망으로 본성의 한 사범학원의 이름을 적어넣었다. 듣기로 사범대학에서 공부하면 돈을 낼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렇기는 했지만, 나는 북대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그리움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제2지망의 난에 북대를 써넣었다. 아마도 북대가 우선권이 있었는가 보다. 북대는 나의 불경한 태도에도 개의치 않고 나를 합격시켜 주었다."

 

1978년 12월 안휘성 펑양현 소강촌의 18가구 농촌대표는 천하의 금기를 깨고, 연명으로 분전(分田)과 포산제(包山制)의 계약을 체결한다. 이로부터 중국농촌경제체제개혁의 서막이 열린다. 이 해 3월, 리커창은 이미 동경을 안고 4년의 삽대생활과 고별한다. 나중에 중국농촌개혁의 발원지라는 명예를 얻는 펑양을 떠나 북경대학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