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장걸(張杰)
두 왕조의 혈맥이 그에게 가져다준 것은 영예가 아니라, 재난이었다. 만일, 운명을 바꿀 용기가 없다면, 그저 운명의 수레바퀴에 깔릴 뿐이다.
그는 명문출신으로, 대당(大唐)의 황자(皇子)이면서, 전조인 대수(大隋)의 황손(皇孫)이기도 하다. 그는 두 왕조의 황족혈맥을 계승했으니, 그를 천황귀주(天湟貴胄)라 불러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의 일생은 아주 비극적이었다. 그를 비극왕자라고 불러도 그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는 바로 당태종 이세민의 셋째아들인 이각(李恪)이다.
어떤 때는 신분배경이 사람의 또 다른 얼굴이 되어 사람의 운명을 좌우한다.
당태종 이세민의 황후 및 9명의 비빈은 모두 14명의 아들을 낳았다. 만이 이들 황자들의 모친의 신분지위를 얘기하자면, 이각의 모친신분은 절대로 보통이 아니다.
이각은 619년에 출생했고, 바로 이해에, 대수의 천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때부터 천하는 더 이상 외할아버지의 '양"씨의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인 "이"씨의 것이 되고 말았다. 그의 부친은 일대명군 당태종 이세민이고, 모친 양비(楊妃)는 그 이름도 유명한 수양제의 딸이다.
얘기하자면 약간 웃기는 일인데, 양비가 어찌하여 그녀의 양씨천하를 빼앗은 '난신적자'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을까? 이 역사는 이미 고증할 수가 없다. 한가지 주장에 의하면 당년 귀족이던 이씨가 거병하여 반란을 일으켜, 양비의 부친 형제를 죽이고, 양씨의 천하를 빼앗는다. 그녀는 포로가 되어 전리품이 되고, 당고조 이연은 전조의 군신들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녀를 진왕에게 주었다. 이 양비는 이세민과의 사이에 두 왕자를 낳는데, 하나는 오왕(吳王) 이각(李恪)이고 다른 하나는 촉왕(蜀王) 이음(李愔)이다.
<신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이격)의 모친은 수양제의 딸이다. 명망이 높아서 안팍에서 모두 그를 향했다" 모친의 신분이 높다보니, 이각은 당태종의 아들들 중에서 명망이 자연히 높을 수밖에 없었다.
황자인 이각은 신분이 존귀할 뿐아니라, 문무를 겸비했다. 성격도 강인하고 굳건했다. <구당서>에는 그를 "말타고 활쏘기를 잘하고, 문무의 재주를 모두 갖추었다." 고 적었다. 당태종이 자주 이각을 자신과 가장 닮은 아들이라고 말하던 것도 이해가 된다. <자치통감>에도 이런 말이 있다: "태종의 여러 아들중 오왕 각, 복왕 태가 가장 현명했고 모두 재주가 뛰어났다." 모택동은 <신당서>의 독서필기에서 이런 말을 적었다: "이각은 영물(英物)이고 이치는 후물(朽物)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각이 당태종의 14명 아들 중에서 얼마나 우수했던지를 알 수 있다.
이각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그는 영월히 자신의 혈연을 바꿀 수가 없다. 그의 모친은 수양제의 딸이다. 혈통만을 따지던 사회에서 그의 몸에는 영원히 수나라의 그림자가 지워질 수가 없었다. 대당의 조정에 있는 공신들중에는 수나라에 반역한 신하들이 있다. 이각의 혈통은 조정신하들이 꺼리는 바이다. 그래서 이각의 민감한 신분은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 어렵게 만들었다.
비록 역사의 필연적 결과는 아니었지만, 역사의 선택이었다. 어느 제국이 전조의 혈통을 지닌 왕자를 후계자로 삼겠는가? 설사 그가 가장 우수하다고 하더라도. 설사 그가 양대왕조의 혈통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설사 그가 당태종과 같은 문도무략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수당의 아들이 황위에 오르면, 다시한번 수당간이 옛상처, 새원한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혈연의 관계는 이미 기본적으로 이각을 황위후계자에서 밀어낸다. 공신들은 또 다른 하나의 카드를 내민다. 수당이전의 봉건예제에 따르면, 군왕이 태자를 세울 때, 우열에 따르지 않고 적자를 세운다는 것이다. 대신 저수량은 이렇게 상소를 올린다: "옛날의 성인의 예의에 따르면, 적자를 존중하고 서자를 낮춘다. 서자를 사랑하더라도 적자를 넘어서서는 안된다. 정체(正體)는 존중받아야 한다." 비록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태자 이건성을 폐위시켰고, 이연으로 하여금 그에게 선양하도록 핍박했지만, 그는 어쨌든 이연의 적자이다.
그래서,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는 것은 장손황후 소생인 이승건(李承乾), 이태(李泰), 이치(李治)의 세명이 된다. 이각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혈연의 배경은 바꿀 수가 엇고, 서출의 신분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황위를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외에, 당시 장손황후의 오빠인 장손무기는 당나라의 정치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는 절대 이각과 같이 신분배경이 복잡한 사람이 자신의 외조카를 배제하고 황위에 오르게 할 리가 없다. 그래서 이각은 황위와는 인연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각의 비극적 운명은 출생시에 이미 결정되었다.
비록 장손황후가 이세민을 위하여 세 아들을 낳았지만, 이세민과 같은 재능을 지닌 아들은 없었다. 정관17년(643년), 이세민은 고르고 고른 끝에 "난장이중에서 키큰 자"를 골라서 진왕(晋王) 이치(李治)를 황태자로 삼는다.
당태종도 한때 후회한 적이 있다. 심지어 이치를 폐위시키고 이각을 황태자로 세울 생각까지 한다. 다만, 장손무기가 알고 난후 확실하게 반대한다. 태종은 불쾌하여 묻는다: "이각이 너의 외조카가 아니기 때문이냐? 그래서 네가 반대하는 것이냐?"
이 말을 장손무기의 사심을 드러낸다. 일반인이라면 분명히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이미 세상일을 골고루 다 겪었다. 그는 얼굴색도 바꾸지 않고, 줄줄이 이세민이 반박할 수 없는 이유를 내놓는다. 첫째, 이치는 성격이 인후하여, 수성지군으로 가장 적합하다. 둘째, 후계자는 국가의 근본이다. 가볍게 세우고 내리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태종은 그 말이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하여 이각을 포기하고 현상을 유지한다.
이런 복잡한 배경은 장손무기와 오왕 이각간에 평화공존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장손무기는 분명히 알았다. 나중에 이각이 반드시 심복대환이 될 것이다. 일단 기회만 있으면, 그는 이각을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한다.
당고종 이치가 즉위한 후, 비록 표면적으로는 천하가 태평하지만, 그는 능력이 없어서 '무위이치(無爲而治)'했다. 그러다보니 명망이 높은 이각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장손무기는 걱정이 되었다. 만일 이각이 어느날 들고 일어나면 그 결과는 아마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일 것이다. 이 강산의 성이 뭐가 될 것인지도 불명확하다. 그래서 장손무기는 미연에 우환을 방지한다는 차원에서, 공적이건 사적이건 그는 반드시 오왕 이각을 죽여야 했다.
바로 장손무기가 이각에 대하여 고민하고 있을 때,역사는 그에게 기회를 준다. 653년, 고양공주와 부마 방유애가 모반한 일이 발각된다. 약간 비열한 장손무기는 이 기회를 틈타 이각의 생명줄을 끊고, 자신의 바램을 완성시키려 한다.
당시 당태종의 딸 고양공주는 전횡패도했다. 그리고 현장의 제자인 변기(辯機)와 사통한 바도 있었다. 사통한 일이 발각된 후, 변기화상은 요참형을 당한다. 당고종이 즉위한 후, 고양공주와 부마 방유애는 당고종과 관계가 좋지 않은 일부 대신들과 연락하여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탕취하려 한다. 그러나 기밀유지가 제대로 안되어, 그들이 손을 쓰기 전에 모반계획이 누설되고, 사람들이 모조리 감옥에 갇힌다.
방유애를 잡자마자, 장손무기는 그에게 강경책, 유화책을 다 쓴다. 그리고 방유애에게 암시한다. 오왕 이각을 물기만 하면, 방유애의 대죄를 용서해줄 수 있다고. 이 방유애는 삶을 탐하고 죽음을 두려워할 뿐아니라, 도덕이 있는 자도 아니었다. 그는 바로 이각이 모반에 참여했다고 인정한다.
이각은 정말 억울하다. 그는 성실하게 집에만 있었는데, 화가 그의 머리로 다가온 것이다. 깨어나보니 그는 당당한 황실종친에서 모반역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는 계하수가 되어 있을 뿐아니라, 십악불사의 난신적자가 되어버렸다.
이런 상황하에서 이각이 어떻게 변명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믿지 않을 것이다. 이각은 결국 장손무기의 도마위의 고기가 된다.
654년 이월 초이틀, 이각의 샘명은 34살로 끝난다. 그는 장안에서 자진한다. 그의 자진은 그에게 또 하나의 별명을 붙여준다. 사상 가장 비정한 황자. 이각은 마지막에 이렇게 소리친다: "사직에 영령이 있다면 들어주십시오. 장손무기가 이씨일족을 멸족시키려 합니다."
이각이 억울하게 죽은 후 해내에서 모두 이를 억울하다고 여기며, 천하는 절망한다.
이각이 죽었다. 비정하게 죽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그의 죽음은 그의 수왕조 혈통과 서출이라는 신분때문이지만, 심층적으로 보면, 그의 죽음은 당시 이당강산의 외척세력이 지나치게 팽창한 것과 관련된다. 뿌리깊은 봉견예교의 적자서자관념과 관련된다.
사료를 보면, 오왕 이각은 문무를 겸비한 인재이다. 그리고 백관과 백성들에게 명망이 있었다. 당태종도 이 아들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그는 부친처럼 정변을 일으킬 배짱은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이각이 궁중에서 자란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세민처럼 혈우성풍을 겪지 않았다. 출생입사의 경력이 없다. 더더구나 이세민처럼 천하의 영웅들과 교분을 맺지 못했다. 이각은 너무 연약했다.
현대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혈통과 적서의 옛날 관념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당연히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려 할 필요가 없다. 이 경쟁압력이 갈수록 커지는 사회에서, 사실 어떤 일은 우리가 바꿀 방법이 없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재벌이세' '고관이세'등이 그것이다. 자신이 불패의 위치에 자리잡으려면, 반드시 상규를 타파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성공을 저해하는 장애물에 도전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능력이 있다는 전제하에서, 다시 약간의 용기를 더하면, 우리는 이각처럼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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