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나걸(羅杰)
어떤 사람은 무측천이 남총(男寵)을 둔 것은 심리적인 필요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생리적인 필요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두 가지 모두라고 말한다. 역사연표로 보자면, 당고종 이치(李治)는 홍도원년(683년)에 사망했다. 이해에 무측천은 61세이다. 사실상 이치가 붕어하기전에 이성임조(二聖臨朝)시기부터 정상적인 성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치는 중년에 들어 두통을 앓았고, 발작시에는 아주 심했다. 이 병은 위장계통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먹고 자는 것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신은 자연히 초조해지게 된다. 나중에, 이치의 시력도 나빠지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정양을 하게 된다. 보기에 그저 퇴락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노인이었다. 이런 신체상황과 정신상태로 성적충동이 있을 리 없다.
시간으로 계산하자면, 이치가 권력을 잡은 후기부터 수공초년까지, 즉 685년까지, 10년가량, 무측천의 성생활은 공백이다. 그녀의 정력은 모조리 반란을 진압하고, 숨은 우환을 제거하고, 혹리정치를 실시하고 권력을 장악하는데 집중된다. 그러므로, 무측천에게 ‘과부가 정권을 잡자마자, 즉시 음란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권력투쟁에 몰입함으로써 그녀는 다시 얼굴에 빛을 띄고 정력이 충만해지고, 청춘을 되찾게 된다.
이는 결국 무측천은 남성심리가 강한 여인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하여 그녀의 애정방식은 남성들처럼 공격적이었다. 그녀와 이치의 침실에는 사방에 모두 구리거울을 설치했다. 이치의 몸이 건강했을 때는 두 사람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즐겼다.
한번은 명장 유인궤가 배알을 청하고 침실에 들어갔는데, 이치가 거울의 사이에 앉아있는 것을 본다. 그는 깜짝 놀란다: 하늘에 두 해가 있을 수 없고, 땅위에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거울에 무수한 천자가 보이다니, 이는 불길한 징조가 아닐 수 없다.
방안에 모조리 황제라니, 이는 놀랄만한 일이다. 이것은 궁중의 한 우스개이다. 다만 이러한 창의적인 성생활방식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치가 죽은 후, 무측천은 한가지 일에 집중한다. 즉,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다. 그 과정의 흥분과 자극은 무측천 내심의 고독감을 없애주었다. 그녀는 일반 시정의 과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한 가지 일에 집중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싫증과 피로가 오기 마련이다. 오랫동안 무측천의 신경계통은 고도긴장상태에 있었다. 정치적으로 우위를 차지한 이우헤 그녀는 느슨해진다. 그러자 공허와 피로가 밀려왔다. 이때의 그녀는 젊고 잘생긴 남자에게서 자신의 청춘시대를 추억하고자 갈망했다. 성의 즐거움으로 마음의 공허함을 메우고자 한 것이다. 더욱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배가 부르니 음욕이 생긴 것이다. 무측천에게 있어서 배가 부른 것은 권력을 모조리 차지했기 때문이다.
남자든 여자든 망상과 현실은 천리나 떨어져 있다. 실전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
제왕으로서 하고 싶은 일은 뭐든지 할 수 있다. 이는 제왕의 권리이고, 신하의 의무이다. 아부도 좋고 충성도 좋다. 어쨌든 황상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무측천의 딸 태평공주는 모친에게 멋진 남자를 하나 바치는데, 그의 이름은 풍소보(馮小寶)였다.
이 풍소보는 낙양거리에서 가짜약을 파는 자였다. 하루종일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가짜약을 팔았다. 이 일을 해내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말을 잘해야 하고, 몸이 건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해낼 수가 없다. 풍소보는 이를 타고났다. 한번은 우연한 기회에 태평공주와 알게 된다. 태평공주는 풍소보가 키도 크고 몸이 건장하며, 근육이 발달된 것을 보고는 그를 거둔다. 그를 거두어 쓰다보니 아주 좋았다. 이 풍소보는 경험이 풍부하고 정력이 충만했다. 게다가 그는 물건이 아주 뛰어났다. 노애와 맞먹을 정도였다. 태평공주는 효성이 지극한 딸이었다. 자신이 사용해본 후에, 효과가 좋자, 이를 모친 무측천에게 드리고자 한다.
구당서 <<설회의>>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태평공주가 무측천에게 풍소보를 소개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소보는 비상재(非常材)이다. 가까이둘 만하다(可以近侍)”
선물은 마음에 들었다. 무측천도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바로 손을 뻗어 받을 수는 없었다. 당고종 이치의 유골도 아직 식지 않았다. 식었다고 하더라도, 태후로서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직접 이 선물을 궁중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은 적절하지가 않았다. 이리저리 생각해본 다음. 한가지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풍소보를 먼저 출가하여 중이 되도록 한 다음에 입궁시키는 것이다. 당나라때는 승려 도사가 궁중을 출입하는 것은 통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무측천은 풍소보를 출가시켜 중으로 만든 후 그에게 이름을 내린다. 바로 회의(懷義)이다. 이것은 우회적인 방법이다. 옛날에 무측천도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어 감업사에 있다가 나중에 당고종 이치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러나,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풍소보의 출신이 너무 미천했던 것이다. 그는 강호에서 가짜약을 팔던 자이니,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출가한다고 하더라도 출신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런 자를 궁중에 들이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이때 무측천은 태평공주의 남편을 떠올린다. 즉 자신의 사위인 설소(薛紹)이다. 그녀는 설소로 하여금 풍소보의 숙부가 되도록 한다 .이렇게 하자, 세상에는 더 이상 풍소보는 없고, 변신한 설회의만 남았다. 지금의 연예인들과 마찬가지로 포장은 중요하다.
설회의라는 이 신데렐라는 동화처럼 낙양 백마사의 주지가 된다. 그리고 자주 태후의 침궁에 드나든다.
60여세된 무측천은 오랜 가뭄 끝에 단비를 만난 것같았다. 그러나, 권력자인 과부와 비천한 출신의 설회의 사이에 애정이 있었을까? 이것은 문제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두 사람의 감정은 대등한 것이 아니다. 어찌하여 대등하지 않은가? 무측천은 설회의에게 애정은 없다. 그저 애모(愛慕)가 있을 뿐이다, 설회의도 무측천에게 애정은 없다. 그저 앙모(仰慕)가 있을 뿐이다. 이 서로 다른 감정이 함께 있으면서 일종의 복합적인 연애상태가 된 것이다.
설회의는 시정의 잡상인에서, 무측천의 수석남총으로 변신한다. 이는 진실한 역사의 신데렐라이야기이다. 그가 성공한 후에도 시정의 악습은 버리지 못했다. 토마토를 아무리 씻어도 기껏해야 연시로 봐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루비가 될 수는 없다. <<자치통감>>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설회의가 궁중을 드나들 때, 앉는 것은 천자의 마차였고, 곁에는 십여명의 환관이 따랐다. 백성들이 만나면 모두 도망쳤다. 만일 이 마차에 가까이 다가가면, 머리에 피가 터질 정도로 두들겨 팼다. 그리고는 길거리에 버려두고 갔다. 생사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중이므로, 도사를 싫어했다. 시장에서 회면을 파는 사람이 석회를 파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과 비슷했다. 그러므로, 설회의는 길에서 도사를 만나면, 아무 이유없이 두들겨 팼다. 도사의 머리를 모조리 잘라버린 다음에야 멈추었다. 누군가 뜨면 누군가 따르게 된다. 누군가 따르면 누구는 더욱 뜬다. 설회의는 기고만장했고, 조정의 고관대작들도 그의 앞에서 설설 기었다. 무승사, 무삼사도 그에게는 종복처럼 예의를 다했고, 그의 마차를 끌어주었다. 그러나, 설회의는 이런 자들은 눈에 두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는 시정의 무뢰배들을 끌어모아서, 이들 무뢰배들의 머리를 깍아 중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온갖 나쁜 짓을 하도록 방치했다. 아무도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우대어사 풍사훈이 이를 지적하고, 국가의 법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했다. 설회의는 이에 앙심을 품고 길에서 풍사훈을 만나자, 바로 구타하게 하여, 하마터면 풍사훈은 맞아죽을 뻔했다.
이런 자를 누가 미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는 권력자의 애인이다. 아무리 죄가 있더라도, 베개옆에서 한마디만 하면, 아무 일도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이처럼 흑백이 전도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설회의는 무측천에게 잘 보여서 조정의 중신으로 성장했는가?
당연히 아니다. 첫째, 우리는 알고 있다. 설회의와 무측천은 단순한 육체관계가 아니다. 그저 한번 놀고 돈을 얼마주는 관계가 아니다. 그들 간에는 서로 연애감정이 있다. 연애라고는 하지만 서로의 마음을 보살펴주는 것이다. 설회의는 정말 무측천의 마음을 잘 알았다. 태후가 기뻐하면 그도 기뻐하고, 태후가 근심하면 그도 근심했다. 태후의 일이 그의 일이었다.
둘째, 또 알고 있다. 이때가 무슨 시기인가? 바로 무측천이 황제에 오를 준비를 하던 시기이다. 이현이 폐위되고, 방주로 유배가서 여릉왕이 되었다. 이단은 동궁에 연금되어 있다. 조정의 정무는 모조리 무측천이 처리했다. 이때 누구를 가장 신임할 수 있었을까? 누가 걱정거리를 덜어줄 수 있었을까? 당연히 곁에 있는 남총이다. 일이 있으면 그들에게 시켰다. 승진을 시키려면 업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관료사회법칙의 하나이다. 그리하여 무측천은 설회의에게 낮에 할 일을 맡긴다. 무슨 일인가? 명당(明堂)을 건설하는 일이다.
명당은 유교의 종교건축이다. 고대문화의 중심은 종교였다. 명당은 종교를 중심으로 하여 종교, 정치, 교화를 일체로 한 것이다. 고대 최고통치자의 ‘본부’였다. 명당은 어찌되었건 신성한 곳이고, 신성한 건축이다. 무측천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를 그의 남총에게 맡겼다.
무측천은 사람을 잘 썼다. 1년도 되지 않아, 설회의는 참신하고 거대한 명당을 만든다. 이 명당은 높이가 294척이고 사방이 300척이고 3층으로 나뉘어 있다. 아랫층은 사시를 모방했고, 중층은 십이시진을 모방했고, 상층은 원개(圓蓋)로 아홉마리의 용이 한마리의 철로 만든 봉(鳳)을 모시고 있다. 봉의 높이는 일장이고, 바깥은 금으로 발랐다. 역대명당중에서 가장 장관이었다. 그리하여 “만상신궁(萬象神宮)”이라고 불렀다. 백성들도 들어가서 볼 수 있게 허용했다. 이어 명당의 북쪽에 천당(天堂)을 만드는데 더욱 크고 모두 5층이었다. 3층에 올라서면 명당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이 천당은 불상을 모시는데 썼다. 불상은 아주 컸고, 불상의 손가락 하나에 수십명이 올라설 수 있었다.
이는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천당을 처음에 지을 때, 바람이 불어서 쓰러진 적이 있다. 그런데 다시 만들었다. 매일 만명이상의 인원을 동원했다. 장강의 산지역에서 목재를 채취했다. 수년의 시간이 들고 엄청난 돈이 들었다. 국고가 모두 빌 정도였다. 설회의는 돈을 물쓰듯 했다. 그는 돈을 보기를 흙과 같이 했다. 무측천도 이를 따지지 않았다. 무측천이 왜 이렇게 대가를 고려하지 않고 공사를 진행했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생각이 있었던 것같다. 하나는 설회의가 화상이므로 그녀에게는 종교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같다. 둘째는 무측천이 불교를 자신이 이룡하려는 생각이 있었던 것같다.
설회의는 건축에서 성공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정삼품의 좌위위대장군의 관직을 받고, 양국공이라는 작위를 받는다. 대장군이면 전공을 세워야 한다. 그리하여 무측천은 그에게 일을 하나 맡긴다. 돌궐을 토벌하는 것이다. 설회의는 원래 잡상인이므로, 돈을 들여서 건물을 짓는 것은 할 수 있지만, 병사를 이끌고 전쟁을 하는 것은 좀 생각하기 힘들다. 무측천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원인은 단 하나이다. 이해는 영창원년(689년)으로 무측천이 황제에 오르기 직전 해이다. 그녀는 이 일로 바빴다. 북부의 돌궐이 뭘 모르고 자주 변방을 침략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그녀는 무장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애인에게 공을 세우게 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설회의로 하여금 토벌하도록 시킨 것이다.
평행도행군대총관 설회의는 가짜약이나 팔아먹든 풍소보이다. 그가 전투를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그는 담량이 있었다. 전선에 가서 보니 돌궐의 병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 원래 돌궐은 유목민족이어서, 유격전에 능한 것이 특징이다. 초상비처럼 흔적이나 그림자도 없는 것이다. 풍소보는 위소보처럼 운이 좋았다. 그가 병사를 이끌고 갔을 때, 돌궐군대가 마침 없었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는 그냥 돌궐의 땅을 한바퀴 둘러보고 돌아간다. 개선장군처럼. 무측천을 만나서는 허풍을 늘어놓는다. 돌궐이 그의 이름을 듣더니 놀라서 모두 도망치고 그림자도 보이지 않더라고. 무측천은 기뻐했다. 그녀는 설회의를 2품 보국대장군으로 승진시켜준다.
연재원년(694년) 돌궐칸 골돌록이 죽는다. 그의 아들은 아직 어려서, 그의 동생인 묵철이 칸에 오른다. 그리고는 병사를 이끌고 영주를 공격한다.
무측천은 다시 설회의를 보낸다. 이번에 그의 명칭은 대북도대총관이다. 같은 해 3월, 다시 삭방도대총관으로 직위가 바뀐다. 이번 정벌은 저번보다 훨씬 규모가 컸다. 무측천은 장사 이소덕, 사마 소미작을 설회의의 참모로 딸려 보낸다. 동시에 조인사, 사택충의등 18명의 장군이 함께 따르도록 한다. 설회의는 운이 엄청 좋았다. 출발도 하기 전에 돌궐군이 물러났다. 세상에 이렇게 편한 싸움은 없다. 준비만 하면 이기는 것이다. 무측천이 이유를 묻자, 설회의는 똑같이 대답한다: 그 돌궐은 내 이름을 듣자 간담이 서늘해져서 모조리 도망쳐서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설회의는 공을 거듭 세우고, 관직도 갈수록 커진다. 설회의는 한번 뜨게 되자 자신의 실력을 모르고, 교만하고 발호하며 유아독존처럼 군다. 적절한 선에서 그만두는 것을 몰랐다. 이렇게 계속 실수를 하다가 결국은 생명을 잃고 만다.
설회의의 죽음은 아주 기묘하다. 이것은 수수께끼이다. 우선은 그의 질투부터 얘기해야겠다. 심남료라는 어의가 있었다. 무측천의 병을 봐주었는데, 자주 드나들다보니, 무측천이 심어의를 좋아하게 되었다. 설회의는 기분이 영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설회의가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모른 것이다. 무측천은 이미 황제가 되었다. 역대의 황제는 모두 후궁을 가득 두었다. 남자황제들도 그렇게 하는데 여자황제인 무측천이 여러 남총을 두는게 뭐가 어떤가? 남존여비의 전통관념은 무측천의 시대에는 거꾸로 봐야하지 않겠는가?
설회의는 자신이 어떤 역할인지를 제대로 몰랐다. 담결석이 사리를 사칭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포지셔닝을 너무 높게 잡았다. 그는 우울한 심정을 풀길이 없자, 나이어린 무뢰배 중들과 어울렸고 여러가지 사건을 벌였다. 이는 무측천의 불만을 샀다.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서, 그를 비호해준다. 그러나, 설회의는 갈수록 심했다. 그는 무측천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전혀 주의하지 않고 갈수록 광망해졌다. 그는 다시 용서받을 수 없는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다. 그는 무측천이 남총을 두는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본질적으로 말해서, 무측천이 남총을 둔 것은 역반심리와 보복심리이다. 평상심으로 말하자면, 이 양자는 모두 질책받을 일이다. 그녀는 역사상 첫번째 여황제가 된다. 그는 남자황제가 누렸던 모든 특권을 누리고자 했다. 후궁제도를 포함해서. 그녀가 보복한 것은 어느 한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다. 전체 남권사회에 대한 것이다. 그녀는 하나의 부호이다. 하나의 상징이다. 하나의 도전이다. 남권사회를 타격한 영원한 기억이다. 이런 의미에서 무측천은 유일무이하다.
둘째, 한 여인으로서 후궁에서 투쟁을 통하여 총애를 받는 지위에 올랐다. 그런데 나중에 쓸쓸한 감업사에서 고독하게 지냈다. 중년이 되어 즐거움을 누렸지만, 금방 남편은 힘을 못쓰게 되었다. 그녀의 모든 정력은 권력추구와 다른 사람과의 투쟁에 바쳤다. 남편은 죽고, 과부가 되었다. 황제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녀는 늙었다. 60여세된 할머니로서 그녀의 성욕이 그리 강했을까? 그녀는 그렇게 남자가 필요했을까? 아무리 어의가 그녀의 몸에 좋은 약을 만들어주었다고 하더라도, 그녀의 정력이나 체력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60여세면 이미 폐경이 된 상태일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무측천이 남총을 둔 것은 심리적인 필요가 70%, 생리적인 필요가 30%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설회의와 보낸 밤은 아마도 주로 서로 말을 하면서 마음을 주고받은 것이었을 것이다.
일단, 설화의가 마음으로 무측천과 교류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 그가 잘못을 저질렀던 아니든. 잘못을 저질렀다면 더욱 혹독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일 뿐이다. 그는 이미 가치가 없다. 여황제인 무측천이 남총 하나를 더 찾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쉬운 일이다. 그러나 마음이 통하는 파트너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설회의는 원래 공로가 있었다. 그러나, 설회의는 695년 정월 십육일에 한가지 멍청한 일을 저지른다. 그리하여 무측천이 극도로 상심하게 만든다. 두 사람의 감정은 끝이 난다. 정월 십육일의 사건을 불러온 원인은 정월 십오일의 사건이다. 앞뒤로 하루 차이가 있다.
정월 십오일, 이날은 한가위날이다. 전통명절에는 행사가 있기 마련이다. 무측천은 명당으로 가서 법회를 개최했다. 설회의는 이 활동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준비하였다. 사람들에게 명당의 지하에 5장 깊이의 구덩이를 파게 해서, 불상을 그 안에 묻어놓게 했다. 그리고 채색비단끈으로 궁전과 비슷한 것을 만들었다. 이것은 정교하게 만든 장치였다. 무측천이 명당에 도착하면, 불상은 땅속에서 끌어올려지고, 모의궁전안에 모셔진다. 이를 실제상황으로 보면 불상이 땅 속에서 솟아오르는 것같다. 아주 창의적이며 신선하다. 설회의는 이 화면만으로는 무측천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또 한 가지 수법을 동원한다. 바로 소를 한 마리 죽여서, 소의 피로 200척높이의 큰 부처를 그려서 천진교 남쪽에 걸어두었다. 그리고 무측천에게는 이것은 자신의 피로 그린 것이라고 말한다. 무측천이 이걸 믿을 리가 있겠는가? 네가 이렇게 많은 피를 흘렸다면 당연히 죽었을 것이다. 어찌 얼굴색이 이렇게 발그레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설회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전혀 감동을 받지 않은 것이다.
설회의는 이때 무측천의 마음이 이미 자신에게서 떠나 심남료에게 넘어갔다고 느낀다. 그는 실연한 것이다.
실연한 사람은 스스로 취하거나, 세상을 취하게 만든다. 설회의가 선택한 것은 후자이다. 정월 십육일밤에 설회의는 불을 지른다. 천당을 불질러버린다. 불길은 번져서 명당까지 태운다. 큰 불이 붙어서 한밤중이 대낮처럼 밝았다. 날이 밝을 때는 천당과 명당이 재만 남았다. 예전에 화려한 건축물은 순식간에 검은 재로 바뀐 것이다.
이것은 설회의의 무측천에 대한 복수였다. 그는 멍청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멍청한 인물은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느낄 때, 사람들이 놀랄만한 일을 저지른다. 이렇게 하여 상대방의 주목을 받으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역겨운 일인지도 모르면서.
이 점에 있어서 설회의는 잘 몰랐다. 특히 무측천의 마음을 몰랐다. 명당과 천당은 일반적인 고급건축물이 아니다. 그것은 정치의 표지이다. 무측천 대주왕조의 상징이다. 그녀는 거기서 제사를 지내고, 조정관리의 배알을 받는다. 멋있으면서도 신성한 곳이다. 설회의가 아무리 독해도, 질투를 해도 이 곳을 화풀이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방화범 설회의도 일이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그는 불안했고, 간담이 서늘했다. 무측천이 도대체 그를 어떻게 처치할지 걱정되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록 무측천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 설회의는 알았다. 그가 알고 있는 무측천은 절대로 용서할 사람이 아니다. 여황제는 한번 결정하면 과감하게 해버리는 성격이다. 그런데 왜 아무런 조치도 없을까? 이는 폭풍우가 오기 전의 고요가 아닐까?
명당과 천당의 방화사건에 대하여 조정대신들도 논의를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것을 하늘의 계시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무측천이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아부를 했다. 이것은 길조라는 것이다. 옛날에 주무왕이 상의 주왕을 토벌할 때, 강을 건너는데 하늘에서 큰 불이 내려왔고, 나중에 주무왕이 과연 상주왕을 이겼ㄷ는 것이다. 이를 보면, 대주가 더 흥성할 것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견해에 대하여 무측천도 마음이 불안했다. 누구든지 듣기 좋은 말을 원한다. 그러나 듣기좋은 말에 진실이 얼마나 되는가? 큰 불이 신성한 표지를 태워버렸는데, 오히려 잘된 일이라니. 이것은 헛소리가 아닌가? 무측천은 이를 하늘의 경고로 보았다. 그리하여 설회의가 천당과 명당이라는 대주왕조의 상징적 건축물을 불태워버린 행위는 무측천의 마음 속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조용했다. 설회의는 터럭 하나 손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걱정에 가득찬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반달후, 바로 천책2년 이월사일, 설회의는 돌연 사망한다.
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생각할 수 있었다. 분명히 무측천이 비밀리에 애인 풍소보를 죽여버린 것이라는 것을. 그녀는 공개적으로 죽이지 않았다. 체면이 상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설회의가 천당과 명당을 방화한 행위는 죽을 죄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방화한 이유가 바로 심남료 어의에 대한 질투때문이었다. 이것을 공개할 수는 없다. 그러면 무측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여기에서 여황제는 남황제와 다르다. 남황제의 후궁이 서로 질투하여 문제를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남황제에게는 별다른 영향이 없다. 그러나, 여황제라면 말이 다르다.
이때, 의도내인(宜道內人)이라는 궁녀가 무측천에게 음양의 도리를 얘기한다.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다. 남총을 두는 것은 음이 양을 구하는 것이니 반드시 훼멸로 갈 것이라고. 그래서 반드시 남총을 제거해야한다고 말한다. 무측천은 온 몸에 식은땀이 났다. 곧이어 설회의를 암살하도록 한다. 이 내용은 이상은의 <<의도내인전>>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소설이다. 소설이 무엇인지는 모두 알 것이다. 허구는 허구이다. 신뢰도가 아주 낮다. 그저 이야기거리로 들으면 된다.
그렇다면, 설회의가 피살된 진상은 어떠할까? 사건현장은 어디이고, 사건의 흉수는 누구인가?
이에 대하여는 두가지 판본이 있다. 먼저 첫번째 판본을 보자.
사건현장: 낙양궁성내 요광전(瑤光殿)
사건발생시간: 야간
사건흉수: 태평공주의 유모 장부인이 이끄는 무사들
사건과정: 무측천이 설회의를 요광전으로 불러서 만나자고 한다. 그날 저녁, 설회의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약속장소로 간다. 그러나 무측천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장여인이 보이고, 장여인의 뒤에는 무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무사들은 설회의를 덥쳐서 손과 발로 마구 때려서 죽여버린다.
사건기록: <<구당서>>
두번째 판본을 보자.
사건현장: 낙양궁성내 요광전
사건발생시간: 야간
사건흉수: 무측천의 당질 무유녕(武攸寧)
사건과정: 무측천은 설회의를 요녕성으로 불러서 만나자고 한다. 그날 저녁, 설회의는 아름답게 치장하고 약속장소로 간다. 그러나 무측천은 보이지 않았다. 그너 무유녕이 있을 뿐이었다. 무유녕의 뒤에는 한 무리의 무사들이 있었다. 이들이 설회의를 덥쳐서 손과 발로 마구 때려서 죽여버린다.
사건기록: <<자치통감>>
두가지 판본을 분석해보면, 먼저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설회의는 운이 없었다. 둘째, <<구당서>>와 <<자치통감>>에서 기록한 사건현장, 사건발생시간, 사건과정은 동일하다. 다만 주범이 다를 뿐이다. 하나는 태평공주의 유모인 장여인이고, 하나는 무측천의 당질인 무유녕이다. 누가 더 적합한가? 혹은 누가 더 무측천의 신뢰를 받을 만한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태평공주일 것이다.
첫째, 친족관계로 보아서, 태평공주는 무측천이 가장 사랑하는 딸이었다. 무유녕은 당질일 뿐이다. 신임으로 따지자면 당연히 태평공주를 더 신임한다. 그녀를 보내서 일처리하라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둘째, 태평공주는 일처리가 조심스럽고, 머리도 있고 권모술수도 있다. 그리하여 무측천이 아주 좋아했다.
셋째, 태평공주는 무측천과 설회의의 소개인이다. 당초에 네가 추천했는데, 지금 극악무도한 죄를 저질렀는데, 네가 가서 수습하는 것이 더 합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암살행동에서 중요한 것은 ‘암’이다. 몰래 해야 한다.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태평공주는 내부사정을 잘 알고 있다. 하필 당질인 무유녕까지 불러서 시킬 이유가 없다. 아마도 무측천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태평공주는 설회의를 없애버릴 생각을 했을 수 있다. 비록 설회의가 총애를 받기는 했지만, 재상도 아니고 국가정치에 관여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총애를 믿고 교만했고, 무측천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자신이 소개인이므로 여기에 연루될 수 있다. 자신의 유모를 보내어 처치해버리는 것이 더 나을 수 있다. 그렇게 하면 모친 무측천의 고민도 해결해주고, 자신도 안전하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분석일 뿐이다.
설회의가 죽은 후, 무측천은 그의 시신을 백마사로 운구하여, 불에 태운 다음, 탑을 하나 만들어서 세운다.
그는 무측천의 첫번째 남총이었다. 이 시기에 무측천이 남총을 두는 것은 그저 쇼였다. 이전에 남자황제들이 후궁을 두던 전통적인 방법을 본떴다. 이것을 가지고 도덕적이니 아니니를 따질 수는 없다. 후세인들이 무측천과 풍소보의 연애에 대하여 지나치게 질책하거나 손가락질 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이 남총은 나중의 장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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