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잉 13

"구자탈적(九子奪嫡)"때, 왜 황십사자(皇十四子) 윤제(胤禵)는 동모형제(同母兄弟)인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를 지지하지 않았을까?

글: 이뢰일(李磊一) 최근 시간이 남아서 다시 한번 드라마를 보면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강희제(康熙帝) 말년에 발생한 소위 '구자탈적'의 일을 모두 알고 있다. 즉, 황위를 서로차지하기 위하여 황자들간의 다툼이 발생한 것이다. 황장자(皇長子) 윤제(胤禔), 폐태자(廢太子) 윤잉(胤礽), 황삼자(皇三子) 윤지(胤祉), 황사자 윤진(나중의 옹정제), 황팔자(皇八子) 윤사(胤禩), 황구자(皇九子) 윤당(胤禟), 황십자(皇十子) 윤아(胤䄉), 황십삼자(皇十三子) 윤상(胤祥), 황십사자 윤제이다. 이들중에서 한쌍의 형제가 아주 특수하다. 그것은 바로 황사자 윤진과 황십사자 윤제로 동모친형제이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적대진영에 속했다. 이치대로라면 고인들이 항상 말하는 것처럼, "상진친형제(上陣親兄弟),..

강희제의 가장 음험한 아들은 황사자(皇四子)가 아니라 황십사자(皇十四子)였다.

글: 초근일일(草根一一) "아비만큼 아들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知子莫若父)"는 말이 있다. 그러나 궁중에서, 부자간의 서로 속고 속이는 것은 여전히 궤이막측하다. 예를 들어 구자탈적(九子奪嫡)의 곤경에 빠진 강희제는 죽기 전에야 비로소 몇몇 아들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다. 에서 강남에 수재가 발생한 후, 황태자 윤잉(胤礽)은 여러 폐단을 드러내서 강희제의 불만을 산다. 양자간의 갈등은 갈수록 쌓여가고, 마침내 열하(熱河)를 순수(巡狩)할는 도중에 폭발하게 된다. 강희제는 여러 몽골왕공들 앞에서 황태자는 병들었다고 선언하고, 황태자에게 내렸던 옥여의(玉如意)를 회수하여, 황태자를 폐위시킬 징조를 드러낸다. 북경으로 돌아올 때 황태자 윤잉은 이미 어연(御輦)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신태자를 추천하는 과정에..

구자탈적(九子奪嫡)때, 혜비(惠妃)는 왜 친아들인 황장자(皇長子)가 아닌 황팔자(皇八子)를 지지했을까?

글: 취간역사(趣看歷史) 황장자 윤제(胤禔)는 그의 부친 강희제가 말한 것처럼 어리석은 인물(蠢材)이었다. 발전가능성이 없는 멍청한 자. 그래서 생모인 헤비도 구자탈적중 할 수 없이 자신이 기른 황팔자 윤사(胤禩)를 지지한 것이다. 황장자 윤제는 구자탈적중 유일하게 옹정제나 건륭제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황자이다. 윤제는 생모인 혜비도 좋아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황실내에서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윤제는 '구자탈적'중 사후에 유일하게 황제로부터 용서받지 못한 황자이다. 강희제때 '구자탈적'에 참여한 9명의 황자는 각각 황장자 윤제, 황이자(皇二子)인 폐태자(廢太子) 윤잉(胤礽), 황삼자(皇三子) 윤지(胤祉), 황사자(皇四子) 윤진(胤禛) 즉 나중의 옹정제(雍正帝)이고, 황팔자 윤사, 황구자..

순치제,옹정제가 친딸이 있으면서 양녀를 많이 들인 이유는...?

글: 관첩(關捷) 순치제와 옹정제는 분명히 자신의 친딸도 있으면서, 계속하여 양녀를 들였다. 이것은 겉으로 보기에 확실히 괴이한 일이다. 순치제는 자신에게 6명의 딸이 있으면서 다시 3명의 양녀를 들였다. 그의 손자인 옹정제는 자신에게 4명의 딸이 있으면서 굳이 다시 3명의 양녀를 ..

황위쟁탈에 참여하지 않았던 삼아거(三阿哥) 윤지(允祉)는 왜 옹정제에게 죽임을 당했을까?

글: 관첩(關捷) 애신각라. 윤지(1677.3.23.-1732.7.10)는 강희제의 셋째아들이다. 만주황실의 말타기 활쏘기에서 윤지는 24명의 황자들 중에서도 제 일류였다. 강희31년(1692년) 그는 겨우 15살의 나이였는데, 강희제를 따라 사냥을 나섰을 때,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부친과 대결을 벌여서 막상막..

[황자쟁위술] 차도살인술(借刀殺人術) 무술살인패(巫術殺人牌)

인류가 나타난 때로부터 여러가지 원시종교신앙이 있었고, 무술(巫術)과 이를 담당하는 무(巫, 남성무당)와 무정(巫靚, 여성무당)이 차례로 등장한다. 사람들은 무당에게 하늘이 평안하게 잘 살게 해달라고 비는 동시에, 어떤 경우에는 무당으로 하여금 보통사람들이 갖지 못한 능력..

[황자쟁위술] 양호상쟁술(兩虎相爭術) 이적제적패(以敵制敵牌) 이원길편

한나라에서 흉노를 대적할 때 집금오(執金吾) 경병(耿秉)은 이런 계책을 올린다: “옛날 한무제때 흉노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천시(天時)를 만나지 못해 성사시키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행히 하늘의 도움으로 흉노에 내분이 일어났으니, 이이벌이(以夷伐夷)를 하면 국가에 이로움이 적지 ..

[황자쟁위술] 이퇴위진술(以退爲進術) – 후발제인패(後發制人牌)

이런 말이 있다: “고개내민 새가 총을 맞고(槍打出頭鳥), 솟아나온 나무가 바람에 쓰러지고, (風摧秀林木), 튀어나온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露頭椽子先腐朽).”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면 위험이나 곤란에 처하는 경우에 혼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휘주를 ..

[황자쟁위술] 애옥급조술(愛屋及鳥術) - 교타황손패(巧打皇孫牌)

"적자사(嫡子死), 입적손(立嫡孫)". 적장자승계원칙이 유지되던 중국고대에 적자가 죽으면 적손을 세우는 것이 봉건예제의 원칙중 하나였다. 상(商)왕조때 태갑(太甲)이 태정(太丁)의 아들이며 탕왕(湯王)의 적손으로 왕위를 승계한 것이 그 효시이다. 다만, 중국 고대역사상 황태손(皇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