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차도살인술(借刀殺人術) 무술살인패(巫術殺人牌)

by 중은우시 2015. 10. 11.

 

인류가 나타난 때로부터 여러가지 원시종교신앙이 있었고, 무술(巫術)과 이를 담당하는 무(巫, 남성무당)와 무정(巫靚, 여성무당)이 차례로 등장한다. 사람들은 무당에게 하늘이 평안하게 잘 살게 해달라고 비는 동시에, 어떤 경우에는 무당으로 하여금 보통사람들이 갖지 못한 능력인 염승술(厭勝術)을 이용하여 적대적인 사람이나 종족을 없애줄 것을 빌기도 했다. 아마도 손자병법을 지은 손무도 여기에서 영감을 받아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하게 되지 않았을까?

 

염승술을 이용하여 적수를 없앤 것으로 기록된 최초이자 유명한 사람은 바로 주나라의 강태공(姜太公)이다. <태공금궤>에 따르면, “주무왕이 은주왕을 정벌할 때, 천하가 모두 귀순하였는데 오로지 정후(丁侯)만이 주무왕을 인정하지 않았다. 강태공은 정후의 모습을 그린 다음 이 화상에 화살을 쏜다. 그러자 정후는 병이 든다. ...그는 강태공이 염승술을 써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자 바로 사신을 주무왕에 보내어 항복한다. 강태공이 화상의 화살을 뽑아내자 정후의 병은 나았다”. 그러나, 이는 황자쟁위에서 쓰인 것은 아니다. 염승술이 흥성한 것은 서한(西漢) 초기 삼제방사(三齊方士)가 활발하게 활약한 이후의 일이다.

 

한무제의 황후 진아교(陳阿嬌)는 금옥장교(金屋藏嬌)로 유명하지만 나중에 자식을 낳지 못하고, 질투를 심하게 부려, 한무제가 점점 멀리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새로 후궁으로 들어온 위자부(衛子夫)가 임신을 해서 한무제의 총애를 독차지하는 것을 보자, 자신이 다시 한무제의 사랑을 차지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녀는 경성의 유명한 여자무당 초복(楚服)을 궁안으로 불러 한편으로 그녀가 부인미도(婦人媚道)를 써서 한무제의 사랑을 회복하고 아들을 임신할 수 있도록 빌면서, 다른 한편으로 염승술을 써서 목각인형에 위자부의 이름을 쓰고 땅에 묻음으로써 하루 빨리 위자부가 죽어서 지옥에 떨어지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이런 수법은 전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을 뿐아니라, 오히려 그 사실이 들통나면서 초복은 시장에서 참수당하며, 이 사건에 연루되어 주살당한 자만 3백여명에 이른다. 한무제는 진아교를 폐위시킨 다음 장문궁에 유폐시킨다.

한무제가 나이들어 병석에 눕자, 강충(江充)은 황후(위자부) 소생인 태자 유거(劉據)와 원한이 있어, 나중에 한무제가 죽고 태자가 황제에 오르면 자신이 살아남기 힘들다고 보고, 간계를 세운다. 그는 한무제에게 “황궁에 고(蠱)의 기운이 많다. 이를 없애지 않으면 황상의 병이 나아지지 않는다”고 고한다. 한무제는 그 말을 믿고 강충에게 이를 철저히 조사하도록 명한다. 강충은 태자궁의 땅속에서 오동나무로 만든 인형을 파내고, 고(蠱)를 파낸다. 그러자 유거는 도저히 결백함을 밝힐 도리가 없다고 보고, 강충을 붙잡아서 친히 참수해버린다. 그러자 강충의 일당은 감천궁으로 도망쳐 황제에게 태자가 이미 반란을 일으켰다고 보고한다. 한무제는 승상 유굴리(劉屈嫠)에게 반란을 평정하도록 명하고, 양군은 장안에서 5일간 혼전을 벌여 죽은 자만 수만에 이른다. 결국 태자는 패배하여 도망치고, 장안 동쪽의 호현(湖縣)에서 목을 매어 자결한다. 황후 위자부도 역시 자결한다. 역사에서 “무고(巫蠱)의 화”로 불리는 사건이다. 태자의 아들들도 모조리 죽임을 당했는데, 정위감 병길(丙吉)이 강보에 싸인 황손을 한명 숨겨둔다. 그 황손이 나중에 한선제(漢宣帝)가 된다. 한무제는 나중에 태자에게 반란을 일으키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강충의 삼족을 멸하고, 소문등 사건에 연루된 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주살한다. 그리고 호현에는 “사자궁(思子宮)”을 지어 아들을 그린다.

 

이런 일이 미신이 성행한 한나라때 나타난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천칠팔백년이 흐른 후에 강희제의 아들들이 황위를 놓고 다툴 때, 이 수단이 다시 사용된다. 강희14년에 강희제가 이미 적자이며 효성인황후 소생인 황이자(皇二子) 윤잉(胤礽)을 태자로 삼았으므로, 다른 황자들은 황위를 포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만주족들은 한족과는 개념이 달랐다. 아마도 만주족은 태자를 세우지 않는 전통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황장자 윤지(胤禔), 황삼자 윤지(胤祉), 황사자 윤진(胤禛), 황팔자 윤사(胤禩), 황십사자 윤제(胤禵)등등이 차례로 황태자와 황위를 놓고 공공연히 다투는 상황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이들 황자들의 1차목표는 힘을 합쳐서 황태자 윤잉을 끌어내리는 것이었다. 결국 강희47년과 강희50년 황태자 윤잉은 두 번이나 폐위된다. 이 과정에서 황장자 윤지는 강희제가 한족의 방식대로 적자인 황이자 윤잉을 황태자로 세운데 대하여 불만이 가장 컸다. 그리하여 가장 격렬하게 각을 세우고 싸웠다. 그는 집에 나무로 인형을 깍아 윤잉이 평소에 입던 모양의 옷을 입히고, 윤잉이라는 이름을 쓰고 낮에는 불에 굽고, 기름에 튀기고, 거꾸로 매달아 놓으며, 강철바늘로 심장을 찔렀다…..아마도 이것이 효과가 있어서인지 강희제는 점점 황태자 윤잉을 멀리하고 결국은 폐위시킨다. 황삼자 윤지의 고발로 강희제는 황장자 윤지가 염승술을 행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강희제는 윤잉이 여러가지 나쁜 짓을 저지르게 된 것은 황장자 윤지가 염승술을 행하여, “미친 것(瘋癲)”이므로 참작할 점이 있다고 조서에 적게 된다. 결국 윤잉이 한 나쁜 짓의 모든 책임은 황장자 윤지가 뒤집어 쓰게 되어 그는 황위에서 멀어지게 된다.

 

이런 염승술은 지금 보자면 그저 심리적인 위안이나 일종의 바램일 뿐이다. 그들이 하늘에 무언가를 얻게 해달라고 기도할 때 비록 경건하긴 하지만 마음 속으로 다 믿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을 이렇게 쉽게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의 적에 의하여 자기도 이미 죽었어야 하지 않겠는가. 누구도 피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중국역사를 뒤져보면 이 방법을 쓴 경우가 적지 않다. 그만큼 시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로 인하여 패가망신을 하게 된다. 결국 염승술을 쓴다는 것은 자기 발등을 자기가 찍는 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