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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황자쟁위술

[황자쟁위술] 이퇴위진술(以退爲進術) – 후발제인패(後發制人牌)

by 중은우시 2015. 7. 27.

 

이런 말이 있다: “고개내민 새가 총을 맞고(槍打出頭鳥), 솟아나온 나무가 바람에 쓰러지고, (風摧秀林木), 튀어나온 서까래가 먼저 썩는다(露頭椽子先腐朽).”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가면 위험이나 곤란에 처하는 경우에 혼자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휘주를 함락시킨 후 만난 거유(巨儒) 주승(朱升)으로부터 “성벽을 높이 쌓고(高築墻), 군량미를 많이 모아두고(廣積糧), 왕을 칭하는데 서두르지 않는다(緩稱王)”는 조언을 듣고 이를 실행하여 천하를 얻는데, 실질적으로 같은 취지이다.

 

동진의 진원제 사마예(司馬睿)는 사마의의 증손자이며 팔왕의 난때 낭야왕으로 있었다. 바보황제 사마충의 황후 가남풍과 동해왕 사마월, 월왕 사마륜, 여남왕 사마량, 하간왕 사마옹, 성도왕 사마영, 장사왕 사마의, 초왕 사마위, 제왕 사마경등이 권력을 향하여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서로 물고 물리는 이전투구를 벌일 때, 사마예는 끼어들지 않고 사사건건 물러나고 양보한다. 이렇게 하여 특히 가황후와 동해왕 사마월의 의심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왕도(王導)의 도움으로 건업에서 황제에 올라 동진(東晋)왕조를 개창할 수 있었다.

 

당태종 이세민의 14명 황자들 중에 장손황후 소생인 세 아들이 있었는데, 바로 태자 이승건(李承乾), 위왕(魏王) 이태(李泰) 그리고 후에 당고종이 되는 진왕(晋王) 이치(李治)이고 이들이 황위계승 후보자 1순위그룹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 중 이태는 재능이 가장 뛰어나고 당태종 이세민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형인 태자 이승건을 태자위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태자에 오르고자 한다. 이승건과 이태의 경쟁은 날이 갈수록 치열해졌는데, 이치는 스스로 자신은 나이도 두 형보다 어리고 재능도 그들보다 못하며, 성격도 유약하고 인후하여 황위계승다툼에 직접 끼어들지 않고 “태자의 자리는 나와 인연이 없다”며 빠진다. 대신 그는 모친 장손황후의 오빠이며 당시 실권자인 장손무기(長孫无忌)와의 관계를 잘 유지한다. 결국, 이승건과 이태는 한 명은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한 명은 자리를 빼앗기 위하여 생사의 결전을 벌이면서 서로 깊은 상처를 입는다. 이승건은 태자에서 폐위되지만, 태자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그를 끌어내린 이태가 아니라 조용히 관망하던 이치였다.

 

강희제 아들들의 황위계승투쟁은 중국역사상 가장 치열했다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강희제가 “내가 죽으면 건청궁내에서 너희들이 갑옷을 입고 서로 싸우겠구나”라고 할 정도였을까. 황태자 윤잉(胤礽)을 끌어내리는데 모두 열심일 때, 오로지 황사자 윤진(胤禛)은 황태자를 옹호하는 입장을 보여 강희제의 호감을 얻는다. 가장 먼저 황태자에 도전한 자는 황장자(皇長子) 윤지(胤禔)였다. 당시 조정에는 권신 2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소어투(索額圖)이고 다른 하나는 밍주(明珠)였다. 소어투의 조카가 바로 윤잉의 생모인 황후 허셔리씨이고, 밍주는 윤지의 생모인 혜비의 외삼촌이다. 황장자 윤지는 강희제가 윤잉을 폐위한 후 강희제에게 자신이 직접 윤잉을 처리하겠다고 말했다가 강희제의 노여움을 사서 작위를 박탈당한다. 그 후 윤지는 스스로에게 가능성이 없다고 여기고 혜비가 기른 인연이 있는 황팔자 윤사를 지지한다. 황팔자 윤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형제들과 대신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황태자 폐위후 강희제가 대신들에게 누구를 황태자로 앉히면 좋을지 의견을 물어보았을 때, 대부분의 대신은 황팔자 윤사를 지지한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황팔자 윤사는 오히려 강희제의 진노를 사고 후계자에서 멀어진다. 그 후 황팔자그룹에서는 황십사자 윤정을 후계자로 밀게 된다. 그러나 결국 최종적으로 황위를 차지한 것은 황태자 윤잉을 끌어내리는데 직접 가담하지 않고, 오히려 황태자를 옹호하는 편에 섰던 황사자 윤진이었다.

 

선발제인(先發制人)과 후발제인(後發制人)의 서로 상반되는 두 가지 전략이 있다. 전자는 기선을 제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고, 후자는 두 호랑이가 싸울 때 가만히 기다리며 어부지리를 노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중국의 속담이나 전략은 이처럼 상호모순되는 것이 많다. 결국, 전략이라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항상 옳은 것은 있을 수 없고, 시기와 상황에 맞추어 적절히 운용해야 하는 것이다. 사마예, 이치, 윤진은 ‘후발제인’의 전략을 적절히 사용하여 최종 승리를 거머쥔 사례이다. 천도후기자승(天道後起者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