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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강희제)

강희제의 근검절약

by 중은우시 2015. 2. 10.

글: 양진(楊珍)

 

 


강희제는 강건성세의 개창자이고, 중국고대에 몇 안되는 명군이다. 그의 웅재대략과 문치무공은 세상사람들이 이미 많이 평가했다. 여기서 언급할 점은 이 어린 나이에 등극한 만승지군이 사치하지 않고 근검절약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강희제의 일상생활은 비교적 간소하고 검박했다. 강희39년(1700년) 그는 대학사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짐이 청정(廳政, 강희제14살때 친정을 시작함)한 이래로 입고 먹는 것은 모두 절검(節儉)했다." 47년 가을, 그는 황태자 윤잉을 질책할 때 이렇게 말한다: "짐이 즉위한 이래, 모든 일은 절검하여, 몸에는 낡은 이불을 덮고, 발에는 베로 만든 양말을 신었다." 이 말은 비록 과장된 점이 있을지언정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신하들에게 근검절약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옹정3년(1725년), 옹정제는 왕공대신을 소집하여, 그들에게 강희제 생전의 건청궁 동,서난방에서 쓰던 카페트를 보여준다. 대신들은 보고 난 후에 이렇게 아뢴다: "(강희제)께서 육십여년간 재위하지면서, 시시때때로 물력을 아끼시고 검소를 숭상하였으며....어전에 놓은 카페트는 30여년동안 쓰면서도 아직 깨끗하고 완벽하니, 검소를 숭상하고 물건을 아끼는 것이 실로 자고이래로 없었습니다." 궁중에 놓아두는 용품도 강희제는 경제적이고 근검절약하는 것을 기준으로 삼아서, 검박을 숭상하고, 호화사치를 추구하지 않았다.


강희연간 청나라조정에서 일한 프랑스 선교사 백진(白晋, Joachim Bouvet,1656—1730年)은 강희제의 일상생활에서의 일부 상황을 직접 목격했다. 그래서 이런 기록을 남긴다: "그(강희제) 개인과 관련된 방면을 보면, 그런 염담(恬淡), 소박(素朴)함은 선례가 없을 정도였다. 그는 가장 보통인 음식에 만족했고, 조그만큼도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그의 담백함은 사람들이 상상할 수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황궁내부 및 일부 전각은 비록 황제가 거주하는 곳이라도, 겨우 몇 폭의 자화(字畵), 몇 건의 금장식물과 일부 상당히 간소하고 소박한 비단이 놓여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단은 중국에서는 아주 보통인 물건이고, 사치품에 속하지도 않는다. 간단함과 소박함에 거의 그곳에 모두 장식되어 있다. 그의 의복은 몇 건의 궁정에서 자주 볼 수있는 겨울을 나기 위한 흑초(黑貂), 은서(銀鼠) 가죽옷을 제외하고, 일부 중국에서 아주 보통이고 자주 볼 수 있는 비단복장이다. 여름에 우리가 보는 것은 그가 아주 보통의 마포(麻布)로 만든 짧은 마고자이다. 이것도 일반인들이 보통 입는 옷이다. 그는 궁내, 궁외에서 말을 타지 않을 때 쓰는 가마는 그저 들것과 비슷한 물건일 뿐이다. 나무재질도 보통이고, 칠을 했다. 몇 곳에는 구리조각으로 감거나 일부 도금한 나무조각을 했을 뿐이다. 말의 도구로 비교적 호화스러운 것은 상당히 소박한 도금한 쇄로 만든 등자이다. 그리고 황색비단으로 만든 고삐분이다.


이상의 묘사는 비록 지나친 측면이 없지 않지만, 일정한 정도 강희제의 생활에서의 어느 측면을 반영한다고 할 것이다.


한번은 강희제가 의미심장하게 자손들에게 말한다; "듣기로 명나라 궁중에서는 먹고 입는 것이 아주 번잡했다고 한다. 궁녀들이 수천이 이르고, 건물을 짓기만 하면 수만의 돈을 썼다고 한다. 지금 내가 우리 왕조의 각 궁전을 계산해보니, 당시 비빈 한 명의 궁에 일하던 수에도 미치지 못한다. 우리왕조의 지방 군사의 비용은 명나라때와 거의 비슷하다. 다만 궁정에서 쓰는 것은 1년에 쓰는 것이 그때 하루 쓰던 것도 되지 않는다." 강희29년, 강희제는 일찌기 대학사들과 명청양조의 비용에 대하여 비교한 바 있는데, 거기서 눈에 띄는 숫자를 제시해놓고 있다"


이전 명나라 궁내에 매년 쓰는 금은을 쓰는 것을 보면 모두 96만9천4백여냥이었다. 지금은 모조리 군수비용으로 쓴다. 이전 명나라의 광록시는 매년 궁내에 쓰는 각종 돈과 식량이 24만여냥이었는데, 지금은 매년 단지 3만여냥만 쓴다; 명나라궁정에서 매년 장작 2천6백86만여근을 썼는데, 지금은 단지 6,7백근만 쓴다. 명나라때 각궁의 침상, 장막, 가마, 카페트등의 항목으로 매년 은2만8천2백여냥을 썼는데, 지금은 모두 쓰지 않는다. 이전 명나라의 궁전은 9층의 바닥으로 하고 성벽도 임청전(臨淸塼)을 썼으며, 목재도 남목(楠木)을 썼다. 지금은 궁중의 건물을 수리할 때 만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바닥에 임청전을 쓰지 않고, 모든 성벽은 보통재료를 쓰며, 나무는 그저 소나무를 쓸 뿐이다.


마찬가지로 자금성내에 거주하고, 마찬가지로 궁정에서 쓰는 돈이지만, 부패몰락한 왕조와 신흥왕조간에는 이렇게 큰 차이가 있었다. 실로 깊이 반성하게 만드는 일이다.


매년 열하피서산장을 수리하는데 일반적으로 한번에 2천냥의 은자를 썼다. 그러나 강희56년의 수리공사때는 공사관리관리가 백은3천냥이 필요하다고 한다. 강희제는 그 말을 듣고 상세히 조사하라고 명한다. 그리하여 내무부는 수리비용응 다시 2천냥으로 깍아서 낮춘다. 강희제는 그 내용을 보고받고 이렇게 지시한다: "이천냥은도 여전히 너무 많다!" 그외에 강희제의 '재촉'하에 황궁내외의 수리공사에 쓰는 안료(顔料)의 비용에서 강희37년에서 52년까지 사이에 백은 13만3천여냥을 절약한다.


강희제가 절검을 숭상하고 신하와 백성의 모범이 되었다. 이는 조야에 큰 영향을 미친다. 왕공대신들이 속속 이를 본받아, 적게 쓴다. 금은으로 된 그릇을 쓰지 않고 금으로된 등자도 쓰지 않는다. 일상에 입고 먹는데 쓰는 비용을 "이전의 십푼이내와 비교하면, 이미 구푼이 줄었다." 강희초기, 고관귀족은 친척의 장례때 가죽옷을 태우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강희제 중엽에 이르러서는 이미 그 기풍이 사라진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강희제의 근검절약에 대하여 비난의 소리도 있었다. 예를 들어, 강희48년 조선의 사신이 귀국하여 국왕에게 올린 보고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강희제는 재물을 탐하고 좋아한다. 그래서 중국의 사람들은 모두 애은황제(愛銀皇帝, 돈좋아하는 황제)라고 부른다" 이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원래, 강희제는 궁중에서 근검절약했을 뿐아니라, 나라를 다스리고, 국가재정문제를 처리하는데서도 마찬가지였다. 근검절약의 방침을 실시하게 되면 통치집단 내부의 일부 사람들이 가진 기득권을 건드리게 된다. 탐관오리들의 불법행위도 어느 정도 지장받는다. 그래서 일부 관리들은 불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그로 인해 '피해'를 입은 자들은 불평불만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비난하고 비방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강희제는 '애은황제'라고 부르는 중국인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주로 강희제의 근검절약에 피해를 입은 관리들일 것이다.


실제로, 강희제가 근검절약방침을 실시할 때, 강약조절을 잘 하고, 내외구분을 잘 한 편이다. 백진은 이에 대하여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쓴다: "그(강희제)는 개인이 지출을 아주 절제했다. 동시에 아주 통크게 국가의 경비를 제공한다. 제국의 복리를 위한 것이면 천만백만이라도 그는 전혀 아끼지 않았다. 공공건축물을 수리하거나, 강의 물길을 뚫는데나 다리를 놓는데나 배를 만드는 등의 백성의 편의를 위하고 무역에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는 거금도 서슴지않고 썼다. 그래서 이렇게 단정할 수 있다. 그는 개인이 헛되게 쓰는데는 한푼도 들이지 않았는데, 이는 현명한 절약이다. 금전을 제국의 진정한 용도에 쓴 것이다.


강희제가 각종 근검절약조치를 제정하고 시행하며, 몸소 모범을 보이는데 치중한 것은 여러가지 방면의 이유가 있다.


비록 청나라왕조가 북경에 정착한 후에 출생하였지만, 만주인들은 산해관을 들어오기 전에 근검절약을 숭상했고, '순박한 기풍'이 있었다. 그 전통은 강희제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그는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짐은 성격상 가치가 너무 비싼 물건은 좋아하지 않는다. 바깥나들이할 때 얻은 나무뿌리 혹은 보기 좋은 돌, 사냥터에서 잡은 짐승의 뿔이나 이빨, 그리고 나뭇잎같은 류는 반드시 그 재질에 맞추어 그릇이나 물건으로 만들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천하의 물건은 비록 가장 가치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모두 쓸모가 있는 것이다. 함부로 버려서는 안된다." 이는 실용을 근본으로 하년 가치관과 자연과 질박을 추구하는 심미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또 다른 측면으로, 청나라초기의 최고통치자로서, 강희제가 처한 역사적 환경이 그에게 편하게 지내지 못하도록 했을 수 있다. 재위한 60여년동안, 먼저 보신 오배의 권력농단이 있었고, 이어서 오삼계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쟁이 있었고, 대만을 통일하는 전투가 있었다. 준가르부와의 장기전쟁 및 여러 황자의 황태자위쟁탈전등이 있었다. 그가 즉위한 초기에 경제는 아직 회복되지 못했고, 조운, 치수등 여러 국계민생에 관련되는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긴장되고 사건이 많은 객관적인 형세를 볼 때, 그는 반드시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했고, 비교적 맑은 두뇌를 유지해야 했다. 가능한한 자신의 욕망을 억제해야 했다.


강희제는 근정애민(勤政愛民)으로 일생동안 많은 업적을 남긴다. 근검절약을 받드는 것도 여러 중대방침, 국책중 불가결의 한 항목이었다. 이런 심모원려는 교만을 경계하고 조급함을 경계하는 무실의 기풍이었고, 후세인들이 본받을 만하다. 당연히, 강희제의 근검절약과 간소질박은 모두 역사상 일부 호화사치에 교만하고 놀기 좋아하며 돈을 물쓰듯이 썼던 황제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인 것이다. 비록 그가 각종 절약방안을 만들어 시행했지만, 청나라궁중의 일상적인 비용지출을 보면, 그래도 대단할 정도이다. 확실히 그의 여러가지 절약조치는 근본적으로 봉건왕조의 고유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