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초근일일(草根一一)
"아비만큼 아들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知子莫若父)"는 말이 있다. 그러나 궁중에서, 부자간의 서로 속고 속이는 것은 여전히 궤이막측하다. 예를 들어 구자탈적(九子奪嫡)의 곤경에 빠진 강희제는 죽기 전에야 비로소 몇몇 아들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다. <옹정왕조>에서 강남에 수재가 발생한 후, 황태자 윤잉(胤礽)은 여러 폐단을 드러내서 강희제의 불만을 산다. 양자간의 갈등은 갈수록 쌓여가고, 마침내 열하(熱河)를 순수(巡狩)할는 도중에 폭발하게 된다. 강희제는 여러 몽골왕공들 앞에서 황태자는 병들었다고 선언하고, 황태자에게 내렸던 옥여의(玉如意)를 회수하여, 황태자를 폐위시킬 징조를 드러낸다. 북경으로 돌아올 때 황태자 윤잉은 이미 어연(御輦)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신태자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강희제는 세력이 강대한 황팔자(皇八子) 윤사(胤禩)를 발견한다. 황팔자는 억누르기 위해 할 수 없이 다시 태자를 복위시킨다. 윤잉이 태자의 자리에 다시 오르기는 했지만, 이때의 그는 벌써 강희제가 여러 황자를 억누르는 방패막이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10여년의 후계다툼을 통해, 여러 황자들은 숨겨두었던 진면목을 드러낸다. 가장 강희제를 놀라게 만든 것은 황십사자(皇十四子) 윤제(胤禵)이다. 강희제는 죽기 전에 여러 아들들에 대한 평가를 내리게 도는데, 황십사자에 대하여는 "십사아거(十四阿哥, 아거는 만주어로 황자를 가리킴)는 요 몇년동안 병력을 거느리고 훈련시켜서 큰 성과를 냈다. 그러나, 그는 담량이 너무 크고, 흉금이 너무 작다. 군대를 지휘하는데는 근신하는 것이 마땅하고, 나라를 다스리게 되면 반드시 나쁜 일이 생길 것이다."
사람은 죽기 전에 옳은 말을 하는 법이다. 강희제의 황십사자에 대한 평가는 그래도 봐준 것으로 보인다. 황십사자는 어찌 흉금이 좁은 것에 그치겠는가. 그는 극도로 음험(陰險)했다. 황십사자는 계속 황팔자 윤사의 편이었다. 열하에서 황태자를 폐위시킬 때, 그는 돌연 수면 위로 나타나서, 크게 타격을 가해 불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한다. 황태자의 병력이동명령문서를 위조한 것이다. 이런 일은 생각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고, 더더구나 감히 저지를 사람은 더욱 적다. 황팔자 윤사는 그 소식을 들은 후 깜짝 놀라서 그건 목숨이 날아갈 일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황십사자는 전혀 겁내지 않는다. 그는 문서를 위조했을 뿐아니라, 자신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고 지나간다. 아마도 이건 생각해본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강희제가 황팔자 윤사를 감금시킬 때, 황십사자는 왜 황십삼자와 한바탕 싸우고, 굳이 강희제에게 대들었는지.
겉으로 보면, 황십사자의 행위는 생각없는 행동이다. 이처럼 마음이 조급하여 황팔자를 위하여 주먹질까지 하는 사람이 어찌 황태자의 병력이동명령문서같은 것을 위조할 수 있겠는가. 설사 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황팔자 윤사가 시켜서 한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황십사자는 겉으로 보기에 황팔자를 위해서 그런 행동을 한 것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잘못을 모조리 황팔자 윤사에게 뒤집어 씌우고, 자신은 그 죄책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 뒤에 황팔자는 고복(高福)에게서 황태자가 임백안(任伯安)에게 보낸 밀서를 얻는다. 황팔자는 황십사자로 하여금 그 밀서를 강희제에게 올리게 한다. 황십사자는 아주 총명하다. 그는 자신이 황태자를 탄핵하는데 앞장서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그 밀서를 강희제에게 올리면서 아무런 글도 쓰지 않는다. 이는 분명 황팔자를 암중으로 팔아먹는 행위이다. 이런 깊은 속내를 지니고 있으니, 과연 황사자와 황위를 다툴만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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