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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151

송교인: 중국근대헌정의 최후희망 글: 장천범(張千帆) 나는 개인적으로 미신이 있다. 항상 13이라는 숫자는 불길하다고 믿는다. 백년전의 그 13(1913년)에 과연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3월 20일 저녁, 상해 기차역에서, 한 발의 총탄이 청넌정치가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죽은 사람은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이것은 보통.. 2013. 11. 10.
원세개는 왜 융유태후를 첩으로 삼으려 했는가?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1911년 10월 10일, 국민혁명군이 무창(武昌)의거를 일으킨다. 20일후, 원세개는 청나라정부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다음 해인 1월 25일, 원세개 및 각 북양장령은 전보를 보내어 공화(共和)를 선택한다. 남방혁명정부로부터 대총통의 자리를 보장받은 후, 원세개는 청황.. 2013. 11. 10.
광서제 검시보고서에 대한 검토 글: 풍학영(馮學榮) 1908년 11월 14일, 나이 겨우 38세된 광서제가 돌연 붕어한다. 다음 날 11월 15일, 서태후도 곧이어 병사한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서태후가 광서제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유행했다. 지금까지 백여년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주장은 중국인들이 무조건적으로 믿어왔다... 2013. 9. 14.
영년(英年): 청나라말기의 황실풍수대가 글: 포강객(浦江客) 광서24년(1898년) 팔월 초엿새, 서태후는 돌연 정변을 일으켜, 변법을 추진하던 광서제를 영대에 연금시키고, 일체의 행정을 모조리 폐하고, 훈정(訓政)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최고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기실 이전의 광서23년에 대권을 손에서 놓치고 싶어하지 않던 .. 2013. 8. 15.
경친왕(慶親王) 혁광(奕劻): 만청제일탐관 글: 유계흥(劉繼興) 마지막 황제 부의는 혁광이 신해년에 한 행위에 대하여 가장 날카롭게 평가한 바 있다: "(혁광)은 원세개의 돈을 받고, 태후에게 나라를 넘기라고 권했다. 대청 이백년의 천하는 혁광의 손에 끝장났다." 혁광은 만주 상남기 사람으로, 애신각라씨이며, 건륭의 열일곱째 .. 2013. 8. 15.
부준(溥儁): 청말 대아거(大阿哥)로 황위계승자가 되었던 인물 글: 상한(桑寒) 청나라말기, 서태후는 온갖 방법을 다 써서 구차하게 정권의 목숨을 연장하고자 하였다. 가경제이후, 청왕조는 황태자를 둔 적이 없다. 황태자를 두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직접적으로 국가의 장래 주인을 결정하는 일이다. 서태후는 '무술변법'이후 광서제를 멸시한다. 자.. 2013. 8. 15.
암살과 고두: 증국번은 서태후가 심어놓은 인물을 제거했다 글: 유강(劉剛) 이동군(李冬君) 1870년(동치9년), 새로 부임한지 2년도 되지 않은 양강총독(兩江總督) 마신이(馬新貽)가 암살당해 죽었다. 자객이 손을 쓴 곳은 양강총독의 열병장이었다. 그런데 마치 무인지경처럼 양강총독에게 걸어갔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고, 아무도 묻지 않았으며, 자.. 2013. 8. 5.
의화단(義和團)은 왜 화북(華北)에서 성행했는가? 글: 오구(吳鉤) 1900년 8월, 경자(庚子)년, 서태후(자희태후)는 두번째로 황망하게 북경성을 도망쳐 나가서, "서수(西狩)"를 하러 갔다. 제1차 "서수"는 40년전에 일어났다. 1860년, 영불연합군이 경사로 쳐들어왔을 때이다. 이번에 다시 "사냥"의 명의로 도망친 것은 바로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 2013. 7. 12.
무술변법의 실패는 외국인의 개입때문이다? 글: 조종국(曹宗國) 청나라말기의 무술변법은 원래 대세의 흐름이고, 여론도 거세었다. 그리고 서태후의 동의를 거쳐 광서제가 앞장서서 추진했다. 그런데 왜 단지 103일간 진행하다가 돌연 서태후는 마음을 바꾸어, 황제를 유폐시키고 변법은 중도에 요절했는가? 옛 교과서에서는 이렇게.. 2013. 6. 26.
서태후의 마지막 하루 글: 이옥광(李玉廣) 1908년 11월 15일 새벽 서태후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잠에서 깨었다. 즉 소위 "청가(請駕)"이다. 전날, 즉 14일에 광서제가 붕어했다. 서태후는 종일 광서제의 후사를 처리하느라 바빴고,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저녁 늦어서야 쉴 수 있었다. 무엇때문인지 몰라도, 서.. 2013. 6.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