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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청 후기)

무술변법의 실패는 외국인의 개입때문이다?

by 중은우시 2013. 6. 26.

글: 조종국(曹宗國) 

 

청나라말기의 무술변법은 원래 대세의 흐름이고, 여론도 거세었다. 그리고 서태후의 동의를 거쳐 광서제가 앞장서서 추진했다. 그런데 왜 단지 103일간 진행하다가 돌연 서태후는 마음을 바꾸어, 황제를 유폐시키고 변법은 중도에 요절했는가?

 

옛 교과서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것은 원세개가 밀고했기 때문이라고. 현재의 역사학계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 것이 정설이다. 새로 검색한 자료를 보면, 담사동이 밤에 법화사를 찾아가서, 원세개에게 가을열병때 서태후를 붙잡고, 영록을 주살하라고 한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그것은 9월 18일 밤의 일이다. 그러나, 서태후는 19일 오후에 이미 이화원에서 궁으로 돌아왔고, 21일 새벽에 이미 수렴청정을 선포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내에 원새개가 천진의 영록에게 밀고한다는 것은 부가능하다. 그리고 당시 서태후는 그저 강유위형제2인을 붙잡았고, 죄명은 "결당영사(結黨營私), 유언난정(莠言亂政)"이다. 담사동이 천진소참의 정변을 도모한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3일이후 즉 9월 24일에서야 비로소, "포장화심(包藏禍心), 잠도불궤(潛圖不軌)"의 죄명으로 담사동등의 관직을 박탈하고 처벌한다. 9월 28일 육군자는 채시구에서 참형을 당한다. 이것은 서태후의 훈정이 먼저이고, 원세개의 밀고가 뒤에 일어났다는 것을 말해준다. 서태후는 원세개의 밀고때문에 변법을 말살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때문에 서태후는 돌연 마음을 바꾸었는가, 하나의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외국인의 간섭이다.

 

서태후는 뼛속부터 변법에 반대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분명 변법의 요해(要害)를 잘 알았을 것이다. 당초 강유위는 서방각국의 변법자료를 광서제에게 욜려 보게 한다. 서태후도 서방국가에서 군주입헌을 실시하며 황제제를 대체했다는 것을 들었을 것이다. 그녀가 광서제로 하여금 변법을 하도록 동의한 것은 그저 여론압력에 밀린 것일 뿐이다. 그리고 마음대로 하게 놔두고서, "나중에 제대로 못하면 그때 두고 보자"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서방국가의 방식을 따라가지 못하도록 그녀는 먼저 3가지 제한을 건다: 하나는 조제(祖制)를 어겨서는 안된다, 둘은 2품이상 관리의 임면은 그녀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셋은 심복인 영록을 총독대리로 하여 군권을 장악하게 한다. 이 세 가지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조제"를 어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황제제도는 불변이라는 말이다.

 

기실, 타협을 위하여, 강유위는 처음에 입헌을 내세우지 않았다. 그저 먼저 무근전(懋勤殿)에 "제도국(制度局)"을 설치했을 뿐이다. "대의제도"부터 시작하여 과도기를 거쳐 군주입헌으로 가려는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길이었다. 영국의 군주입헌도 먼저 대읮를 하고, 나중에 입헌조각을 한다.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던 것이다. 독일은 심지어 군주내각 이원제를 오랫동안 지속했다. 일본의 메이지유신은 허군입헌이다. 그러나 그들은 총검을 가지고 결국 완성해낸다.

 

서태후는 체제문제에 대하여 아주 민감했다. 변법에서 제기된 정치, 군사, 문화교육 및 경제체제에 관한 200여개의 변법조치에는 그녀가 모두 동의한다. 다만, 광서제가 그녀에게 무근전에 제도국을 설치하는 문제를 보고하고 동의를 구할 때 그녀는 단연코 거절한다. 그리고 아주 심한 말을 한다. 광서제는 이치를 내세워 따지다가 아주 기가 죽고, 심지어, '짐의 위치를 보전하기 어렵겠다'는 생각까지 한다. 강유위등은 조급해진다. 그래서 외국인들을 끌어들여 서태후와 완고파에 압박을 가하고자 한다. 그들은 영국선교사인 이제마(李提摩)의 건의를 받아들여, 직접 미국, 영국, 프랑스등 나라의 외국인들이 정무와 세무를 관리할 수 있도록 하려 한다. 이것은 메이지유신을 주재한 바 있는 일본의 전 수상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을 방문했을 때, 강유위는 광서제에게 그를 변법의 고문으로 삼도록 청한다. 9월 20일, 광서제는 이토 히로부미를 접견한다. 그들의 대화는 이미 궁으로 되돌아온 서태후가 막후에서 모조리 듣고 있었다. 이것은 서태후를 격노하게 한다. 이것은 군주입헌을 해서 황제제도를 버리겠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대청이 천하를 외국인들에게 내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그녀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외국인(일본인)의 직접적인 개입은 서태후로 하여금 변법의 목적이 일본이나 서방국가들과 같이 입헌군주제를 행하려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만든다. 그녀는 증거를 잡고, 핑계도 얻었다. 그리하여 바로 변법을 중지하고, 강유위등이 주장하는 변법은 '결당영사,유언난정"이다.

 

당연히 6월 11일 "명정국시(明定國是)"후, 광서제와 그가 의존하던 몇몇 '장경(章京)'은 조급해진다. 한꺼번에 정치, 군사, 문화교육 및 경제체제에 관련된 200여항의 변법조치를 170여개의 성지를 통해 하달한다. 각성 도독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과거폐지, 관리감원, 녹영감축 및 육부폐지등 권력귀족과 팔기자제, 만한선비의 이익에 밀접하게 관련된 조치는 더더욱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만든다. 변법이 강력한 저항에 부닥쳐 앞으로 나가기 힘들게 되었을 때, 강유위등은 더더욱 조급하게 움직여 실책을 한다. 광서제는 어찌해야좋을지 몰랐다. 이는 서태후의 훈정에 충분한 이유거리를 주게 된다. 변법이 완고파의 강렬한 반대에 부닥쳐 있을 때, 예부 "육당관"사건이 벌어진다. 광서제가 서태후의 승인을 받지 않고, 화가나서 예부상서 2품고관인 탑회포(塔懷布)를 삭탈관직한다. 강유위는 공개적으로 "2품이상의 신법에 반대하는 고관은 죽여버린다"고 공언한다. 이것은 서태후로 하여금 더더욱 변법이 실제로는 그의 권력을 노리는 것이라고 느끼게 만든다. 특히 원세개가 나중에 영록에게 밀고한 강유위등이 쿠데타를 도모한 음모는 변법자들에게 '포장화심, 잠도불궤'라는 죄명을 뒤집어씌울 수 있게 된다. 광서제를 유폐시킬 수 있게 되었을 뿐아니라, 강유위 양계초도 화를 피하기 어렵게되었다. 담사동등 6군자를 참살한 것도 정정당당하게 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요소는 모두 부차적인 것이다.

 

외국인의 개입으로 변법이 서방의 선진정치제도를 학습하는 것을 매국매족하는 것과 같이 보게 만들었다. 완고파들은 중국인들의 배외심리를 이용한다. 이렇게 하여 서태후는 마음을 바꾸어 변법을 중지시키는데 있어서 여론의 우위를 점하게 된다. 이 점은 아주 중오했다. 그래서 나중에 손중산이 "구제달로, 회복중화(驅除靼虜, 恢復中華)"를 부르짖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