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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영년(英年): 청나라말기의 황실풍수대가

by 중은우시 2013. 8. 15.

글: 포강객(浦江客)

 

광서24년(1898년) 팔월 초엿새, 서태후는 돌연 정변을 일으켜, 변법을 추진하던 광서제를 영대에 연금시키고, 일체의 행정을 모조리 폐하고, 훈정(訓政)이라는 명목으로 다시 최고권력을 장악한다. 그러나, 기실 이전의 광서23년에 대권을 손에서 놓치고 싶어하지 않던 서태후는 이미 광서제에게 손을 썼다. 그것은 바로 칠왕분(七王墳)에 관한 풍수지쟁이다.

 

칠왕분은 북경 서교 북안하의 서북20여리에 있는 묘고봉 고향도(古香道)의 곁에 있다. 이는 순친왕(醇親王) 혁현(奕譞)의 능묘이다. 혁현은 도광제의 일곱째 아들이며, 항간에서 "칠왕야(七王椰)"라고 불리웠다. 칠왕분은 혁현이 경사의 유명한 풍수대가 이당(李唐)에게 부탁하여 정한 장소이다. "고송(古松)의 서북을 가리키며 내용정맥(來龍正脈)이라고 하고, 가장 좋은 혈을 찍었다." 그리고 "노송은 높이가 육장여에 이르고,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둘레가 삼장오척이었으며, 그림자가 한 무에 이르고, 과실이 많이 달렸다. 모두 수백년된 물건들이다." 혁현이 묘지를 정한 후, 과연 그에게 좋은 운이 많이 따랐다. 육년후, 동치제가 천화로 목숨을 잃자, 순친왕의 아들 재첨(載湉)이 새로 황제에 오른다. 그러나, 복과 화가 모두 숨어 있었다. 혁현이 죽은지 4년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고, 제당,후당의 당쟁이 날로 심해진다. 광서제는 전쟁을 주장하고, 유신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일련의 거동은 권력을 탐하던 서태후를 좌불안석하게 만든다. 한 풍수선생이 서태후에게 풍수대책을 제시한다: 반드시 칠왕분 앞의 은행나무를 잘라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순왕부의 풍수를 끊어야 큰 우환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막을 수 있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광서제의 반대를 무릎쓰고, 친히 공사를 감독하며 은행나무를 잘라버린다. 광서제는 그 소식을 듣고 홍산입구까지 달려가서 가마 안에서 대성통곡했다. 예전에는 이 곳에 오면 멀리서 커다란 나무를 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이미 없어졌다고 하면서 이십리를 울면서 갔다." "황상은 아무 말이 없이, 묘를 세 바퀴 걸어서 돌고는 걸음을 멈투고 눈물을 닦고 돌아갔다. 이것은 광서23년의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형편없는 아이디어를 내놓은 풍수선생은 도대체 누구인가? 청나라 진사 왕조(王照)의 <덕종유사>에 따르면, 그는 바로 당시에 말이 많던 황실풍수대사 영년이었다. "순친왕의 묘도 앞에 은행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그 나무는 8,9명이 합쳐야 감쌀 수 있었다. 높이는 수십장이었다. 백년이상이 된 물건이다. 영년는 태후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황실풍수를 얘기하며, 모조리 이 지손들이 차지하니, 이를 벌채하여 본가지에 이롭게 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영년이 이 말을 서태후를 움직인다. 원래 풍수의 핵심내용은 "장지를 잘 써서 후손이 잘되게 한다'는 것이다. 학자들의 고증에 따르면, 왕씨의 이야기는 청나라의 기록들과도 일치한다. <옹동화일기>에도 그런 말이 있다. 이 사건은 영년이 당시에 가진 지위와 권세를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영년에 관한 기록은 사서에 많지 않다. <청사고.열전이백오십이>에는 겨우 이백자의 기록이 있다. 영년의 자는 국제(菊儕)이다. 성은 하(何)이며, 한군정백기 사람이다. 광서연간에 좌익총독, 정홍기 한군부통령, 공부우시랑등의 직을 지낸다. <청사고>에는 그가 어떻게 이리 빠른 승진을 거듭할 수 있었던지에 댛나 설명이 없다. 숭이의 <도함이래조야잡기>에 따르면, 영년의 관운이 형통한 원인은 바로 풍수에 정통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연영(李蓮英)이 안에서 도와주어 관운은 계속 좋았다고 한다. 사료의 기록에 따르면, 영년은 두개의 저명한 풍수에 관한 사례가 있다. 하나는 이화원 수선방의 우물을 팔 때의 길일을 선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화원 산문통의 공사착공일자를 선택한 것이다. 영년은 시기를 잘 보아서, 서태후에게 '은행나무를 자르도록'하는 풍수지책을 내놓아 그녀가 정적을 이기도록 해주었다. 그리하여 서태후는 더욱 그를 총애한다.

 

영년이라는 황실의 풍수대가의 위세가 최고조에 달한 것은 의화단운동이 일어났을 때이다. 광서26년, 산동경내에서 의화단운동이 막 일어나서 요원을 불길처럼 번져갔다. 산동, 하북일대의 의화단은 '부청멸양'의 기치를 내걸고, 당당하게 북경성으로 진입했다. 서태후는 열강이 그녀가 광서제를 폐위시키는데 반대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잇었다. 그리하여 의화단을 초무하여 서방열강에 항거하고자 했다. 이를 통하여 페립의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 이때 풍수대가 영년이 시기를 잘 파악하여, 조야상하의 여러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화단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중의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영년도 의화단과 마찬가지로, 풍수를 믿었다. 의화단은 대부분 가난한 농민출신이고, 팔괘풍수설을 깊이 믿었다. 의화단운동이 한창 무르있었을 때, 의화단은 철로, 전선, 윤선등 외국사물을 적대시했다. 열강의 미친듯한 약탈을 적대시하는 외에, 뿌리깊은 풍수사상의 뿌리가 있었다. 그래서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영년과 의화단은 신앙의 측면에서 일맥상통한다. 둘째는 영년은 계속하여 서태후의 눈치를 보며 행동했다는 것이다. 경사의 의화단운동이 일어날 대, 영년은 이미 서태후가 의화단을 이용하여 외국인세력을 몰아내고자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하여, 영년은 서태후로부터 중용된다. 좌익총병인 그와 서우익총병 재란은 강의와 함께 의화단업무를 처리한다. 사료에 따르면, 서태후는 의화단과 열강의 싸움에서의 의사결정에서 풍수선생 영년을 파격적으로 발탁하고 크게 기대를 건다. 경자 오월 이십칠일, 선전포고를 내놓은 다음 날, 서태후는 다시 경진지구의화단의 통령의 임명을 선포한다. 그 임명서에 따르면, "의화단민분지경사 및 천진일대에 지휘예속이 없다. 그리하여 장친왕 재훈, 협판대학사 강의를 파견하여 통솔하게 하고, 또한 좌익총병 영년, 서우익총병 재란이 공동으로 업무를 처리하게 한다. 인무참령 문서는 익장으로 파견한다." 이 때의 영년은 장친왕 재훈, 협판대학사 군기대신 강의의 바로 다음 자리를 차지하여 서열 3위가 된다. 이를 보면 그의 지위가 혁혁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풍수대가의 좋은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달도 차면 기운다. 경자 칠월 이십일, 경성이 함락되고, 영년은 서태후를 따라 서쪽으로 도망친다. 관직은 좌도어사, 호위행영에 이르고, 그는 힘을 다하여 업무를 처리한다. 그러나, 제국주의열강으로부터 '흉수를 처벌하라'는 요구를 받은 후, 의화의 성지를 받은 이홍장과 유곤일, 장지동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장친왕 및 영년등의 혼용오국(昏庸誤國)죄를 처벌해주도록 요구한다. 압력에 밀려, 서내후는 처음에는 영년을 삭탈관직하고, 나중에는 부득이하여 영년을 서안의 감옥에 가둔다. 정월 초엿새, 영년은 서태후로부터 "참감후(斬監候)"에서 "사자진(賜自盡)"으로 바꾸는 새해선물을 받는다. 그리하여 대들보에 목을 매어 자결한다. 경사인들은 탄식했다. "평생을 다른 사람의 풍수를 봐주더니, 자신에 대하여는 왜 이렇게 신중하지 못했는가. 묘고봉의 순친왕의 능묘는 영년 시랑이 정해준 것이다. 나무를 벤 것이 아마도 죽은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풍수는 감여(堪輿)라고도 한다. 중국의 역대황조에서 계속 전승되어 왔다. 만청도 마찬가지이다. 만청의 관료사회에서 전쟁의 승부, 관운의 승진이전 혹은 권력의 명쟁암투는 모두 풍수에 의탁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로 많았다. 가장 큰 우스개는 제1차아편전쟁때의 일이다. 도광제가 깊이 믿고 있던 노장 양방(楊芳)은 광주에 도착하여 배와 대포가 날카로운 영국과 싸우기 위하여, 그는 서양인들의 총포가 사기(邪器)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취예(臭穢)지물로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이사제사(以邪制邪)의 전술을 고안한다. 전체 성에서 분뇨통을 수집하고, 종이로 사람인형을 만들고, 도량을 만들고 귀신에 기도하는 등의 활동을 벌인다. 이렇게 일을 벌였지만, 양국이 의화하면서 쓸 데가 없어진다. 다만 후세에 우스개거리만 남겼다. 광동의 한 사람이 시를 지어 이를 조롱한다: "버드나무가지(楊枝)는 남풍을 견디지 못한다. 참찬은 어찌하여 이런 사람을 기용했을까? 분뇨통으로 당연에 묘책을 시전했는데, 더러운 명성이 광주성내에 길이 전파될 것이다."

 

공상길의 <영년과 만청북경풍수열>이라는 글을 보면, 만청의 북경에는 풍수열풍이 불었다. 먼저 조정이 제창한 것도 큰 관계가 있다. 황실은 자금성내에서 전각이나 건물을 지을 때나 교외에 제왕의 '묘지'를 선정할 대 모두 풍수를 우선시했다. 설사 아주 보잘것없는 자잘한 일이라도, 풍수선생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 없었다. 풍수붐은 만주귀족고관대작들 사이에서도 유행한다. 그들은 고위직에 있으며 영화부귀를 누렸다. 이런 특권이 대대로 이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래서 자주 풍수선생을 청하여 도움을 받는다. 풍수붐은 한족관료와 백성들 사이에서도 큰 시장이 있었다. 설사 만청때 학문이 있고, 두뇌가 기민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모두 풍수를 극히 믿었으니 실로 놀랄만하다. 그러한 사람으로 증국번, 증국전, 진치, 이성탁등이 있다. 청나라사람이 말한 대로, "풍수는 세상에서 믿는 사람이 많다. 특히 장지를 중시한다. 그리하여 후세자손이 형통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청나라황실은 풍수를 중시했다. 그리하여 관료사회에서도 일부 이름있는 풍수대가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풍수선생 영년은 한때 황실의 풍수를 봐주어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풍수를 미신하는 것은 정치부패의 한 특징이다. 서방열강의 튼튼한 배와 날카로운 대포 앞에서 청왕조는 풍수의 신화속으로 침몰했다. 서태후가 의화단을 지지한 것은 의화단의 신기한 법력 즉 염불을 외움으로서 몸은 "철포삼", "금종조"를 둘러싼 것처럼 되어 도창불입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양인의 총포를 이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서태후가 영년이라는 풍수대가를 신뢰한 것은 풍수신령의 도움을 받고자 해서이다. 한 왕조가 간단한 주술로 힘든 과학발전을 대체하고자 망상을 품는다면, 기득이익을 해치지 않는 법술로 혁신과 변법을 대체하고자 한다면, 그렇게 하여 약함이 강함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부패한 수구정권의 비극이다.

 

기실, 영년등 황실풍수대가들은 역겨우면서도 가소롭다. 그들은 황실에 풍수를 가지고 운명을 얘기한다. 실제로 그들의 운명은 황실에 달려 있다. 제대로 속이면 돈도 벌고 관직도 오르지만, 잘못 속이면 관직도 잃고 머리도 달아난다. 옹정제가 아직 옹친왕일 때, 무이산을 지나가다가 한 도사를 만난다. 그는 그에게 '만(萬)'자의 운명을 지녔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도사를 이인으로 보았다. 선지능력이 있고, 화복을 예측하고 미래의 길흉을 점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나중에 도사는 강희왕조의 후게자다툼때 책사로 활동한다. 옹정이 즉위한 후, 북경의 백운관도사 가사방(賈士芳)과 관계가 밀접했다. 가사방은 옹정제의 병을 치료해주었는데 효과가 좋았다. 가사방은 졸지에 총애를 받는 이인이 된다. 몸값이 몇 배로 뛴다. 온 가족이 다 같이 계견승천(鷄犬昇天)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옹정제가 그에게 거는 기대는 너무 컸다. 그러나 가사방의 능력은 한도가 있었다. 그저 겨우겨우 황제를 속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옹정제에게 들통이 난다. 결국 하옥되어 얼마후 참형에 처해진다. 가족들까지도 처벌을 받는다. 가도사는 이인으로 보였고, 생사를 예측할 수 있다고 했지만, 자신의 목숨조차 부지하지 못했다. 영년도 그렇지 않은가. 총명한 자는 총명함 때문에 오히려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