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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인물-시대별/역사인물 (청 후기)

광서제 검시보고서에 대한 검토

by 중은우시 2013. 9. 14.

글: 풍학영(馮學榮) 

 

1908년 11월 14일, 나이 겨우 38세된 광서제가 돌연 붕어한다. 다음 날 11월 15일, 서태후도 곧이어 병사한다.

 

그때부터 시작하여, "서태후가 광서제를 독살했다"는 주장이 유행했다. 지금까지 백여년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주장은 중국인들이 무조건적으로 믿어왔다.

 

필자는 법률을 공부하여, '증거벽'이 있다. 본문에서 현대과학의 검시보고서를 가지고 여러분들과 얘기해보고자 한다.

 

국가청사편수공정중대학술문제연구과제조(청광서사인연구)는 북경의 숭릉(崇陵)에서 광서황제의 유골 및 두발의 비소함량을 검사한 다음 <청광서제사인연구공작보고>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연구과제조의 구성원은 중국원자력과학연구원반응퇴공정연구설계소의 전문가인 왕커, 장용바오, 저우슈윈, 샤푸, 리이궈이 포함되어 있을 뿐아니라, 북경시공안국 법의검사감정센터의 법의관 장신웨이, 장다밍, 송차오진, 판관민도 포함되어 있다.

 

다만, 이 보고서는 양이 많을 뿐아니라, 기술적인 언어가 포함되어 있어 내용이 단조로와 대중독자들이 읽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필자는 이 보고서를 간략화시켜 직접적으로 보고서의 요점만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의학은 우리에게 말해준다: 비상중독은 체내의 비소함유량을 끌어올린다. 그래서 과제조는 광서제의 유체에서 '비소함유량'을 검사했다.

 

과제조가 광서제의 두발을 화학검사를 했고, 대비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의 두발도 검사한 후, 아래와 같은 '두발비소함유량'을 비교한 수치를 얻어냈다(단위: 마이크로그램/그램)

 

현대인(1호)의 두발비소함유량: 0.14

현대인(2호)의 두발비소함유량: 0.59

융유황후유체의 두발비소함유량: 9.20

청나라말기 모건시(乾屍) 두발비소함유량: 18.20

광서제유체의 두발비소함유량: 2404.00

 

이를 보면, 광서제의 '두발비소함유량"은 정상인의 수백배 내지 1만배이상이다. 이런 전형적인 증상은 직접적으로 '비소중독'임을 드러낸다.

 

독자들은 아마도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광서제의 두발은 1백년이 지나면서 수분이 증발했다. 상술한 수치는 정확하지 않다. 독자의 의심은 어느 정도 이치에 맞는다. 다만 필자는 이렇게 생각한다:

 

1. 광서제의 두발수분은 확실히 증발했다. 다만, 동시에 '비소'도 증발한다(분자와 분모가 동시에 감소함), 그러므로 '두발비소함유량'의 백분비에 미치는 영향은 어느 정도 상호 감쇄된다;

 

2. 과제조는 융유태후의 유체의 두발과 청나라말기의 간시의 두발에 대하여도 대비검사를 한다. 데이타를 보면, 광서제의 두발에서의 비소함유량은 그와 동시대의 다른 사람과 비교하더라도 여전히 압도적으로 휠씬 초과함을 알 수 있다.

 

엄격하게 하기 위하여, 과제조는 관목이 광서제의 두발을 오염시켰을 가능성도 고려했다. 그래서, 과게조는 관목내의 나무부스러기, 향료, 분말등 잔여물질에 대하여도 샘플을 채취하여, 그 비소함유량을 조사했고, 광서제의 두발과 대비했다. 이렇게 하여 아래와 같은 대비수치를 얻는다(단위; 마이크로그램/그램)

 

관목내 나무부스러기의 비소함유량: 0.39 - 29.00

관목내 향료의 비소함유량: 0.429 - 7.06

관목내 분말의 비소함유량: 11.20

광서제 두발의 비소함유량; 2404.00

 

이를 보면 관목내 각 물체의 비소함유량은 광서제 두발의 비소함유량보다 훨씬 낮다. 즉 광서제의 두발내의 '비소'는 관목에서 오염된 것이 아니다.

 

그외에 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광서제는 오랫동안 병을 앓았고, 장기간 한약(中藥)을 복용했다. 그러므로, '만성비소중독'에 걸렸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과게조는 추가로 '만성비소중독'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하여, 다시 <중국의학보> 2004년 12월 29일 제7판에 보도한 '만성비소중독'(당해 환자는 장기간 우황해독환을 지나치게 많이 복용하였음)의 환자사례를 참고했다. 양자를 대비한 후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한다: 광서제의 두발 비소함유량은 만성비소중독환자의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비소함유량의 66배이다.

 

바꾸어 말하면, 광서제는 만성비소중독도 아니다. 광서제는 장기간 한약을 복용하여 비소함유량이 지나치게 높았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치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광서제 두발내의 높은 비소함유량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과제조는 이어서 광서제의 골격쇄편과 잔류의복을 화학검사하여, 아래와 같은 수치를 얻었다(단위: 마이크로그램/그램)

 

두발에 붙은 잔유물의 비소함유량: 3060.00

척추골 뼈부스러기의 비소함유량: 1269.00

내의잔류물오른소매부위의 비소함유량: 2439.00

내의 잔류물 비소함유량: 2182.00

광서제두발의 비소함유량: 2404.00

 

확실히, 광서제 두발의 비소함유량은 그의 두피, 척추골, 내의 잔류물등의 비소함유량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수준이다.

 

이를 보면, 광서제 두발의 높은 비소함유량은 그의 신체에서 온 것이다. 이를 보고, 나아가 과제조가 반복적으로 연구검토한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광서제는 비상중독으로 사망했다.

 

여기까지 읽은 독자는 아마도 의문을 가질 것이다: 광서제의 몸이 비상중독이라면, 왜 그의 내의의 위장부위의 비소함유량이 가장 높지 않고, 오른 소매부위의 비소함유량이 가장 높을까?

 

이 문제는 확실히 존재하고, 회피할 수 없다. 필자는 아래와 같은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1. 광서제는 오른손으로 가슴을 감싸고 죽었다. 그리고 사후에 심지어 매장후에도 이 자세를 유지했다;

 

2. 광서제의 내의는 다 입지를 않았고, 오른 소매가 직접 가슴부위를 접촉했다;

 

3. 광서제의 내의 위장부위의 의복은 이미 썩어서, 없어졌다;

 

4. 광서제의 능묘인 숭릉은 이전에 도굴당한 바 있다. 시신이 움직였을 수 있다;

 

5. 광서제의 사후, 북경일대에 여러번 강한 지진이 있었다. 관목내부의 모든 물건위치가 지면의 진동으로 옮겨졌을 수 있다.

......

......

 

독자들은 더 많은 가능한 버전을 생각해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광서제의 척추골, 내의 잔류물, 두발의 위에 있는 '비소'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없는데서 생겨난 것도 아니다. 반드시 온 곳이 있다. 관목 내부의 사방에는 높은 함량의 '비소'가 없다. 고농도의 '비소'는 광서제의 척추골, 두발, 내의...에만 존재한다. 이 점에 관하여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심지어 단정할 수 있는 해석은 바로, "광서제는 사망전에 비상중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제조는 "광서제는 비상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검시보고서의 작성과정과 그 안에 포함된 데이타를 보면, 근거와 이유가 모두 강한 설득력을 지녔다.

 

이 보고서의 전체명칭은 <청광서제사인연구공작보고>이다. 이는 공개된 자료이고, 여러 경로를 통하여 열람할 수 있다.

 

현재 학계에는 여러 학자들이 "광서제가 비상중독으로 사망했다"는 견해를 부인한다. 다만 논쟁시 왕왕 이 검시보고서는 회피한다. 그리고 다른 경로를 찾는다. 청나라때의 궁중의료기록, 궁내인사의 회고록, 논리적 추리등을 이용한다. 필자는 이것은 검토해볼만한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아무리 합리적으로 추론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이 검시보고서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들 과학적인 수치는 확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과학의 화학검사수단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 효력 및 증명력은 자연히 궁정진맥기록, 소문, 회고와 논리적 추리보다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즉, 반대자는 어떻게 다른 문자자료를 연구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이 검시보고서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 수치는 모두 회피할 수 없고, 반드시 직면해야할 과학적 수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비상을 넣어 광서제를 독살했을까? 서태후인가? 그건 확실하지 않다. 적지 않은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당당한 자금성의 내에서 서태후를 제외하고, 아무도 감히 광서제에게 독을 넣을 수 없다"

 

필자는 생각한다: 이처럼 '당연히 그러할 것이다", '유죄추정"의 추측은 치학의 각도에서 보면, 취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역사상, 통치자를 감히 모해한 사례는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필자가 아무렇게나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번째 사례: 1803년, 북경시민 진덕은 혼자서 칼을 들도 자금성으로 쳐들어간다. 벌건 대낮에, 직접 가경제를 찌른다.

 

두번째 사례: 1813년, 북경시민 임청은 '천리교'의 신도를 이끌고, 칼과 검, 활과 화살을 들고, 직접 자금성으로 쳐들어간다. 창끝은 직접 가경제를 향한다.

 

세번재 사례: 1898년, 북경에 있던 강유위, 담사동은 당시의 극권통치자, 서태후를 암살하고자 모의한다.

 

........

 

이들은 그저 일부 사례일 뿐이다.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면 더 많은 사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은 가능하다. "서태후외에 아무도 감히 광서제를 독살할 수 없다"는 견해는 언듯 보기에는 합리적인 것같지만, 기실 우물안 개구리식의 주관적인 억측이다. 이런 주관적인 태도는 엄격한 학문하는 사람들이 없애도록 노력해야할 학풍이다.

 

즉, "광서제는 비상중독으로 죽었다."는 것에서 직접적으로 "서태후가 광서제를 독살했다"고 추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서태후가 광서제를 독살했다고 지목하려면, 반드시 충분하고, 기본적인 증거능력을 갖춘 인증, 물증, 서증 혹은 기타 확실한 증거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그저 추측일 뿐이다. 혹은 기껏해야 '합리적인 추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 뿐, '결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본사건의 흉수는 도대체 서태후인가 아닌가? 혹은 다른 사람이 있는가? 이 사건에 관련된 사료는 너무 많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시 시간이 있을 때 다루기로 하고 이상의 내용에 비추어 다음과 같이 임시 결론을 내리기로 한다:

 

1. 광서제는 비상중독으로 죽었다. 이것이 가장 믿을만한 견해이다.

2. 서태후가 흉수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는 이르다. 여전히 검토해야 할 사항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