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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송교인)

송교인: 중국근대헌정의 최후희망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장천범(張千帆) 

 

나는 개인적으로 미신이 있다. 항상 13이라는 숫자는 불길하다고 믿는다. 백년전의 그 13(1913년)에 과연 불길한 일이 일어났다. 바로 3월 20일 저녁, 상해 기차역에서, 한 발의 총탄이 청넌정치가의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죽은 사람은 나이 겨우 32살이었다. 이것은 보통의 암살이 아니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중국헌정의 제3차기회를 죽인 것이다. 중국과 같은 전제국가에서 헌정은 전제가 해체될 때 나타나는 일순간의 기회이다. 만일 전체 민족이 심리적 준비를 하고 있지 않다면, 그런 얻기 힘든 기회는 그냥 지나가 버린다. 연이어 3번의 기회를 잃은 후, 중국헌정의 전망은 갈수록 묘망(渺茫)하게 되었다. 

 

중국헌정의 제1차기회는 1898년의 무술변법이다. 원인은 1894년의 갑오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번하면서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는데 내국인들에게 말하기 껄끄로운 내용이었다. 조야상하는 모두 변법을 갈망했고, 황상도 그렇게 생각했다. 기회는 실로 힘들게 얻은 것이다. 아쉽게도 만청의 기득이익을 건드리면서, 황제도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는 서태후가 기른 인물이다. 현재의 비서당정(秘書當政)과 마찬가지로 자신감이 부족했고, 큰 일을 해낼 수가 없었다. 유신파는 중병을 장악하고 있던 원세개를 회유하려고 하였으니, 이것은 대세가 이미 기운 후의 도박이고, 흉다길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통치층내부에 분열이 한 때 발생하였다. 만일 만청의 통치자들이 장기적인 안목이 있었다면, 시류의 흐름을 잘 읽었더라면, 자신의 입장을 잘 고려했더라면, 영국군주입헌의 뒤를 밟을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렇게 통치자의 IQ와 EQ를 높에 평가하는 것은 확실히 비현실적이다. 유신이 실패한 후, 통치층은 더욱 보수화된다. 나중에는 어쩔 수 없이 '헌정을 모방하여 실행"하고 1908년에는 <흠정헌정대강>을 만들지만 모조리 황권지상이었고, 헌정이 그림자는 전혀 볼 수가 없었다.

 

제2차기회는 1911년의 무창의거이다. 청나라조정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 때 서태후와 광서제는 이미 죽었고, 남은 사람은 6살된 부의와 융유태후의 고아과부였다. 조정에 중심을 잡고 일할 사람이 없었다. 그저 약세를 보이며, <십구신조>를 반포할 뿐이었다. 이것은 중국의 "허군제(虛君制)"이다. 개척벽지의 시험이고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혁명당이 원치 않았다. 차라리 원세개가 이익을 보게 놔둘 지언정 황제는 폐위시키려 했다. 명목은 공화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뼛속으로는 1당독재였다. 당연히 만청은 스스로를 폐쇄시키고, 혼자서 하려고 하다가, 이렇게 좋은 제2차기회를 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아직 철저히 실망할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신해혁명"은 실제로 하나의 지방쿠데타였고, 혁명당은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거저 승리의 과실을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피를 흘리지 않은 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 만하다. 비록 이전의 몇번의 폭동에서 모두 유혈희생이 있었지만, 규모는 크지 않았고, 원한도 깊지 않았다. 확실히 상당히 철저하지 못한 "쁘띠부르조아혁명"이었다. 대규모의 계급투쟁은 아니었다. 수천만열사의 대우문제를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므로 "공화"의 희망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중국헌정의 제3차기회였다. 만일 만청의 유로 원세개가 국민당의 신고위층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면 신해혁명은 중국의 "명예혁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정치는 한번도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를 용납한 적이 없다. 국민당, 원세개의 두 호랑이는 서로 양보하려 하지 않았고, 양패구상한다. 헌정은 이리하여 다시 한번 물거품이 된다.

 

이제 100년전에 암살당한 송교인은 헌정성패의 관건인물이었다. 송교인이라는 이름을 얘기하자면, 사람들에게 "대부"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다. 비록 삼십여세에 불과했지만, 그는 확실히 국민당의 "대부"였다. 민국이 성립된 후, 그는 동맹회를 다른 소규모정당과 합병시켜, "국민당"을 성립시키고,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다당경쟁을 선언한다. 선거투표를 통하여 정권을 획득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손중산은 아직도 계속혁명을 주장하고 있었다. 손중산과 송교인의 다툼은 단순히 총통제, 내각제의 체제다툼만이 아니다. 헌정민주와 혹력혁명의 기본노성투쟁이다. 손중산도 헌정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헌정은 먼저 폭력혁명으로 일체의 군벌세력을 몰아내는 '군정'의 기초위에서 건립된다. 그후에 일당독재하의 '훈정(訓政)'을 실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송교인의 귀한 점은 그가 원세개등 구세력과 타합 협력하려 했다는 점이다. '체제내'의 의회민주의 길을 가려고 했다는 점이다. 사실은 증명한다. 송교인의 노선은 중국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1913년 국회대선에서, 그가 이끄는 국민당은 일거에 국회 제1당이 된다. 내각을 조직하고, 총리를 노릴 기세였다. 만일 이렇게 점진적이고 이성적인 길로 발전해갔더라면, 중국은 아마도 세계에서 처음으로 이원집정을 실시하는 헌정국가가 되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죄악의 총탄은 중국의 헌정몽을 깨트렸따. 흉수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송교인암살사건의 원흉의 혐의는 원세개뿐아니라, 국민당내의 급진혁명파에게도 향한다. 한 정치게임규칙이 건립되지 않은 국가에서, 송교인의 죽음은 아마도 그저 시간문제였는지 모른다. 다만, 그의 죽음은 국민당과 원세개의 결렬과 제3차헌정기회의 파멸을 의미한다. 비록 송교인이 임종전에 원세개에게 남긴 유언에서 평화협력의 간절한 희망을 얘기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손중산은 "2차혁명"을 조직하여 원세개를 토벌한다. 실패후에는 "중화혁명당"을 조직한다. 10년후, 소베테트 큰형님의 도움을 받아, 국민당은 마침내 다당연맹의 오합지졸에서 조직기율이 엄밀하고 총리에 절대복종하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당으로 거듭난다. 북벌의 승리로, 국민당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절대통치지위를 차지한다. 동지들이 노력하여, 혁명이 성공했다. 다만 헌정기회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안타깝다 송교인, 슬프다 중국헌정. 송교인암살사건의 100년후, 오늘날 중국에서는 이 문제를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다. 왜 우리의 이 사회에서 진취적이고 이성적이며 온화한 개량파는 모조리 죽어없어지고, 남은 사람은 명철보신의 견유(犬儒)이거나 두눈 멀거니 뜨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어용문인들 아니면 항상 극단을 달리는 과격혁명파만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