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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서태후)

서태후의 마지막 하루

by 중은우시 2013. 6. 11.

글: 이옥광(李玉廣) 

 

1908년 11월 15일

 

새벽

 

서태후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잠에서 깨었다. 즉 소위 "청가(請駕)"이다. 전날, 즉 14일에 광서제가 붕어했다. 서태후는 종일 광서제의 후사를 처리하느라 바빴고,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저녁 늦어서야 쉴 수 있었다. 무엇때문인지 몰라도, 서태후의 기색은 전혀 나쁘지 않았을 뿐아니라, 오히려 더욱 좋아보였다. 일어난 후, 세수와 화장을 한다. 궁문 밖에는 그를 모시는 태감들이 일찌감치 조용히 기다린지 오래되었다. 예를 들어, 머리를 빗는 전용태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태후는 자신을 가꾸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에, 화장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아주 길었다.

 

화장을 마친 후, 태감 한 명이 소리친다: "주렴을 걷어라!(打簾子)". 이 일을 전문으로 하는 태감은 급히 주렴을 열었다. 이와 동시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태감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노조종길상(老祖宗吉祥)"을 외친다. 그후 풍성한 아침식사를 한다.

 

아침 6시.

 

서태후는 군기대신을 만나기 시작한다. 황후(즉, 광서제의 처, 예허나라씨, 즉 나중의 융유태후), 감국 섭정왕 재풍등과 오랫동안 얘기를 나눈다. 나중에 새로운 황제의 명의로 조서를 내리는데, 서태후를 태황태후(太皇太后) 로 높이고, 황후를 태후(太后)로 높였다.

 

정오

 

점식식사를 시작할 때는 서태후가 아직 괜찮았다. 그러나 식사를 하면서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흐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상황은 오랫동안 지속된다. 사람이 죽을 때면 당사자는 이를 느낀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긴급회의를 소집한다. 그리고 태후가 중요한 일을 처리하고, 감국 섭정왕이 재정하도록 정한다.

 

상유를 내린 후, 서태후의 병세는 갈수록 심해진다. 그래서 군기대신에게 유조(遺詔)를 준비하게 명령한다. 군기대신이 초안한 유조를 서태후에게 올리자, 서태후는 읽어본 후 몇 곳을 고친다. 예를 들어, "부득이 다시 훈정을 행했다"와 "오십년동안을 되돌아보니" 등등이다. 말을 마치고, 그녀는 다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나는 평생 수렴청정을 여러번 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내가 권력을 탐하는 것으로 알겠지만, 실제로는 시세가 급박하여 부득이하게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었다."

 

이때의 서태후는 아직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두뇌는 맑았고, 정신도 멀쩡했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 화애가친(和藹可親)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점점 정신을 잃기 시작한다. 그러다 순간적으로 다시 눈이 반짝거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그다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아마도 회광반조(回光返照)일 것이다.

 

서태후는 자신이 오랫동안 장악하고 있던 대청왕조에 대하여 마지막 말을 내던진다: "이후, 여자는 국정에 간여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본조의 가법에 위반되니 반드시 엄히 제한해야 한다. 특히 태감이 권력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엄히 막아야 한다. 명나라 말기의 일을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오후5시

 

서태후는 입을 벌이고 남쪽을 향한채 사망한다.

 

서태후에 대하여 우리는 한단학보(邯鄲學步)해서는 안되고, 즉, 개관정론(蓋棺定論)해서는 안된다. 간단하게 말해서 자신의 생각과 느김을 말하면 된다.

 

통치자로서,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내정이 간섭되고, 영토가 점령되고, 명예가 상실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서태후도 이런 법칙을 벗어나지 못했다.

 

서태후는 노련했고, 미신적이었고, 서방을 배워서 알았고, 백성을 사랑했다. 절대로 자신과 배치되는 자가 눈앞에 서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자신의 통치에 반발하고, 자신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서태후가 추진한 소위 '신정(新政)'은 캉유웨이(강유위), 량치차오(양계초)가 추진한 무술변법과 근본적으로는 일치하는 것이다. 그저 당사자로서 서태후가 승인하지 않은 것뿐이다.

 

외국에 아첨하여 구차하게 살아남고, 영토를 할양한 것은 '천고의 욕을 먹는 일'이다. 이것은 치욕의 기둥에 못박히는 치욕이다.

 

필자가 보기에, 서태후는 여강자이다. 원래는 한 떨기의 꽃인데, 다듬이돌위로 끌려올라가서 세살사람들이 모두 '구명도초'로 보는 도초(지푸라기)가 되었다.

 

과거의 일은 모두 흘러갔다. 역사의 가장 큰 가치는 기만과 우롱이 아니다. 우리같은 후손들이 다시 읽을 때, 다시 알때, 약간의 이치를 깨닫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현재의 기초위에서 더 잘 살도록 하는 것이고, 더 행복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최대의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