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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인물-개인별/역사인물 (원세개)

원세개는 왜 융유태후를 첩으로 삼으려 했는가?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중천비홍(中天飛鴻) 

 

1911년 10월 10일, 국민혁명군이 무창(武昌)의거를 일으킨다. 20일후, 원세개는 청나라정부 내각총리대신이 된다. 다음 해인 1월 25일, 원세개 및 각 북양장령은 전보를 보내어 공화(共和)를 선택한다. 남방혁명정부로부터 대총통의 자리를 보장받은 후, 원세개는 청황제의 퇴위를 핍박한다. 그러나, 융유태후는 비록 권모술수를 쓸 줄 모르는 여인이지만, "나가도 걱정, 물러나도 걱정'인 곤경 속에서 여전히 처변불경(處變不驚)의 기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원세개가 침중한 얼굴고, 통심질수(痛心疾首)의 모습으로 자금성 양심전에 온 후에, 융유태후의 다리 아래 꿇어앉아 눈물을 얼굴 가득 흘렸고, 아주 상심한 모습을 연출한다.

 

당시, 융유태후는 말한다: "나도 공화에 찬성한다. 다만 우리 청황실의 퇴위를 얘기하자면, 현재 이를 막는 힘이 아주 크가. 원총리. 당신은 무슨 양전기미(兩全其美)의 좋은 대책이 있는가?" 융유태후가 원세개를 접견한 이 장면에 대하여 어른이 된 후의 선통황제는 <나의 전반생>에서 이렇게 회고하고 묘사했다: "마지막 날에 발생한 일중에 나에게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하루는 양심전(養心殿)의 동난각(東暖閣)에 융유태후가 남쪽 창을 향한 항(炕, 구들)에 앉아서, 비단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있었다. 앞의 땅위의 붉은 카페트에는 한 뚱뚱한 늙은이가 무릎을 꿇고, 얼굴 가득 눈물자국이 있었다." 이 뚱뚱한 늙은이가 바로 원세개이다.

 

원세개는 신해혁명의 성과를 차지하고 싶었다. 연약한 혁명파도 일찌감치 공화를 건립하고, 혁명을 완수하고자 했다. 남북의화를 거쳐 상방은 합의한다: 청제퇴위(淸帝退位), 건립공화(建立共和), 우대황실(優待皇室). 운명은 융유태후를 역사의 무대로 내몰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여전히 원세개에게 '전권을 수여'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결정된 운명하에서 청실을 위하여 비교적 유리한 조건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남북쌍방의 밀고 당기기식의 담판과정에서, 청실의 퇴위조건이 매번 바뀌었고, 그것은 융유태후에게 모두 보고되었다. "태후는 글자를 한자 한자 살펴보며 토론했고, 견해가 명확하고 빨랐다." 주로 우대조건의 초안을 책임진 사람은 바로 일찌감치 재풍에게 사면받았고, 나중에 일본의 주구가 되는 왕정위(汪精衛)였다.

 

1912년 2월 12일, 즉, 선통3년 십이월 이십오일, 융유태후는 선통황제 부의를 이끌고 양심전에서 정식으로 청실퇴위조서를 반포한다. 이것은 청왕조가 반포한 최후의 청실퇴위조서이다. 이 조서가 공표되자, 경사는 들끓었고, 길거리마다 집마다 중화민국의 오색기가 내걸린다. 사람들은 정말로 대청왕조 276년의 통치가 마침내 끝났고, 완전히 새로운 공화시대가 도래하였음을 믿었다. 전국이 기쁨과 희열에 휩싸였고, 곳곳에서는 축하와 기쁨을 표시하는 축포성과 징괭과리소리가 울려퍼졌다.

 

기실, 원세개가 청실퇴위를 핍박할 때, 융유태후는 대청의 만리장산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어하지 않았다. 원세개는 외교대신 호유덕, 민정대신 조병균, 우전대신 양사이등의 사람을 보내어 차례로 융유태후를 겁준다. 융유태후는 겁이 나서 어쩔 수 없이 원세개에게 애원하게 된다: "우리 모자 2명의 목숨은 보전해달라!" 원세개는 정중하게 말한다: "안심하십시오. 안심하십시오." 융유태후가 청실퇴위조서를 반포한 후, 원세개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심복에게 말했다: "융유태후가 만일 젊었다면 나는 그녀를 첩으로 들이는 것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원세개는 왜 이 대청왕조에서 총애를 받지 못한 마지막 태후를 마음에 두었던 것일까, 그리고 후안무치하게 첩으로 들일 생각까지 했을까?

 

원세개는 자가 민정(愍亭)이고, 호는 용암(容庵)이다. 북양신군의 창시자이다. 일찌기 조선에 주둔하며 일본군을 격파한 바 있다. 귀국후에는 천진 소참에서 신군을 훈련시켰고, 청나라말기 신정기간동안 근대화개혁을 추진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초기의 원세개는 여색문제에서 어느 정도 절제를 했다. 처인 우씨(于氏)는 용모가 단정하고 글도 읽었으며 이치에 밝았고, 사람됨이 조신했다. 원세개와 함께 사는데 화목하고 행복했다. 그러나, 관직이 계속 승진하면서, 특히 지위고 존귀하고 권세가 혁혁한 대청조정의 고관에 임명된 후, 스스로 풍류가 있다고 여기는 원세개는 여색에 대한 탐욕이 갈수록 강해졌다.

 

원세개의 원보인인 우씨는 나이가 들어 늙었다. 그러나 원세개 본인의 권력이 커지면서 나이들수록 여색에 대한 욕구가 강해져서 만족을 모르게 되었다. 이것은 아마도 "권력이 가장 효과적인 춘약"이라는 말이 나오는 연유일 것이다. 그리하여, 원세개는 여색문제에서 갈수록 거리낌이 없어진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한 명 한 명 마음에 든 여인을 자신의 침상으로 끌어들이고, 괜찮은 여자는 바로 첩으로 삼는다. 남겨두지 않을 여자는 돈을 주어서 철저히 쫓아버린다.

 

한동안 새것을 들이고 옛것을 버리는 일을 벌인 후, 원세개가 융유태후를 핍박할 때는 이미 처첩이 상당히 많았다. 그의 여러 처첩중에서 정처인 우씨가 사람됨이 조심스럽고 현명하고 이치에 밝은 것을 제외하고 다른 희첩들은 비록 미모는 꽃처럼 예쁘지만, 그녀들의 신세와 자질은 보편적으로 낮았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이태 황씨는 두부집의 황씨 딸이다; 사이태 유삼아와 오이태 홍홍은 모두 화류계 출신이다; 칠이태 범씨는 훤세개의 유모의 딸이다; 팔이태 섭씨는 원래 지주집안의 여종이었다; 구이태 태귀아는 다른 집의 여종이었다; 십이태 왕씨는 선부(船夫)의 딸이다; 십삼이태 주씨는 항주 서호의 유명한 기생이었다; 십오이태 취원은 그의 육이태 홍씨의 친조카딸이다; 이렇게 보면 쉽게 알 수있다. 원세개는 첩을 들이는 문제에서, '기불택식(飢不擇食)"했다는 것을. 그러므로, 청나라후궁에서 오랫동안 과부로 지낸 태후를 첩으로 들이려고 했다는 것도 그의 풍류가 이미 습관화된 점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융유태후는 예허나라(葉赫那拉)씨이고 이름이 청분(淸芬)이다. 도통 계상의 장녀이며, 서태후의 조카딸이다. 1889년, 즉 광서15년에 서태후는 강제로 그녀를 광서제의 황후에 앉힌다. 1908년, 광서제와 서태후가 연이어 붕어한다. 순친왕 재풍의 나이 겨우 3살된 어린 아들 부의가 황제에 오른 후, 선통으로 연호를 바꾸고, 융유를 황태후로 모시고, 그녀가 "수렴청정"한다. 재풍은 감국섭정왕이 된다. 융유가 입궁할 때 나이 겨우 20살이었다; 이십년 후, 광서제가 붕어하여 그녀는 청황실 후궁의 과부가 된다; 원세개가 그녀를 첩으로 들이려 할 때, 융유태후의 나이는 이미 45살이었다. 다음 해, 융유태후는 우울함이 범이 되어, 서육중중 하나인 태극전에서 병사한다. 시호는 효정융유관혜신철협천보성경황후로 내린다. 중화민국의 국상의 규격으로 장례를 치르고, 그녀를 광서제와 함께 숭릉에 합장한다.

 

얘기하자면, 융유태후의 자색은 출중하지 않았다. 성격도 유약했다. 젊었을 때는 황후로서 총애를 받지 못했고, 서태후라는 고모의 환심도 사지 못했다. 평소에 여러 제명부왕비들과 만날 때도 위신이 그다지 없었다. 다만, 그녀는 황후를 지냈고, 태후도 지냈다. 나이 겨우 3살의 선통제를 어른이 되도록 키웠다. 선통제의 친부모 섭정왕 재풍과 함께 위기에 흔들리는 청왕조를 주재한 바 있다. 이를 보면 그녀는 절대 무능한 사람이 아니다.

 

사료의 관련 기재를 보면, 융유태후는 "사람을 대하고 일처리를 하는에 아주 노련했다", "사무처리에서 능력을 드러냈다"고 한다. 그녀는 책을 많이 읽었고, 일찌기 "서로 다른 나라의 역사를 읽었따", 당시 상대적으로 낙후한 사회에서 폐쇄된 만청고등귀족가정에서 자라면서, 전통윤리도덕을 배우고 보수적인 만청권력중심에 들어온 전통여성에게 이것은 아주 도전적인 일이다. 서태후의 곁을 지키던 비빈과 궁녀들은 대부분 아주 폐쇄적이었다. 그녀들은 시무를 잘 몰랐다. 서방국가의 사회상황도 잘 몰랐다. 후궁의 우두머리인 융유황후는 '눈을 뜨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청나라의 저명한 여관인 덕령군주의 책에서도 당시에 황후 융유에 대한 이런 기록이 있다:

 

경친왕의 넷째딸은 젊고 아름다운 과부였는데,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영국에도 국왕이 있는가? 나는 계속하여 태후가 전세계의 여황인줄 알았다." .....황후가 말했다: "너희는 어찌 그렇게 무지한가? 나는 알고 있다. 모든 나라에는 모두 최고통치자가 있다. 그리고 어떤 나라는 공화정체이다. 미국과 같은 경우이다. 미국은 우리에게 아주 우호적이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것은 현재 미국으로 간 것은 모두 평민이다. 그들 미국인들은 우리 중국에 모두 그런 사람들만 있는 줄 알지도 모르겠다. 나는 몇몇 만주귀족들이 갔으면 좋겠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후에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그녀는 현재 서로 다른 나라의 역사를 읽고 있다고. 당연히 이미 중문으로 번역된 것이다. 융유황후는 글을 많이 읽었을 뿐아니라, 서방역사와 정치에 대하여 일정한 이해가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맹목적으로 유신변법의 실행을 반대하지 않았다. 비록 그녀의 정치적 재능은 서태후에 미치지 못했지만, '눈을 떠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방면에서는 융유태후가 당시의 자금성내에서 아주 진보적이었다. 융유태후가 글을 많이 읽고, '열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점이 당시 사상이 비교적 개방적이었던 원세개가 그녀에게 마음이 기울어진 중요한 원인일 것이다.

 

당연히 더욱 중요한 원인은, 융유태후는 청왕조후궁의 주재자이다. 중국전통의 부녀에 대한 요구조건을 따르고, 충서인양(忠恕忍讓)의 품덕을 갖추고, "겸양공덕(謙讓恭德), 선인후기(先人後記), 유선막명(有善莫名), 유악막사(有惡莫辭), 인욕함구(忍辱含垢), 상약외구(常若畏懼)"하는 전형적인 중국전통부녀였다. 이것들은 모두 원세개의 집안에 있는 모든 처첩들이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기실, 가장 중요한 원인을 따져보면, 아마도 청황실훅우의 과부인 태후를 첩으로 들이면, 그가 이후 황제의 꿈을 실현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년후인 1915년 12월, 원세개는 홍헌(洪憲)으로 연호를 바꾸고, 동시에 총통부를 신화궁으로 개칭한다. 그리고 자칭 홍헌황제가 된다. 그러나, 얼마후, 원세개는 병으로 사망한다. 당시 나이 57세였다. 원세개의 복벽칭제의 황량미몽은 이렇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