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대혁명42 두가지 유행: 어광(語狂)과 어장(語障) 글: 유재복(劉再復) <아주주간> 2001년 12월 16일자 10년전, 필자는 <어광(語狂)>이라는 글을 써서 <명보월간>에 발표했다. 비판한 것은 문화대혁명 기간중의 "일만번 발로 밟아서 영원히 다시 되살아나지 못하게 하자"는 등의 큰소리(大話), 미친소리(狂話)들이었다. 작년 가오싱.. 2013. 11. 24. "3중전회(三中全會)"의 특별한 의의 글: 신민주간(新民週刊) 1978년의 그해 겨울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돌아보면 최소한 제11기 3중전회때부터 시작하여, 역대 당대표대회이후 3중전회는 왕왕 특수한 의의를 지녔다. 일부 중대한 전환점을 이룬 결정은 3중전회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것은 1978년의 그해 겨울로 되돌아간다. 중앙.. 2013. 11. 13. 왕후닝(王滬寧): 3명의 총서기를 보좌한 중공의 핵심두뇌 글: 양국선(楊國選) 뉴스에서 그의 이름은 자주 국가주석의 뒤에 불린다: "삼개대표론"에서 "과학발전관"까지 그의 공헌이 아주 많다; 1993년 복단문정사성변론회(復旦問鼎獅城辯論會)에서 그는 고문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가장 젊은 부교수였다. 그는 바로 왕후닝이다. 학자에서 "홍장(紅.. 2013. 11. 10. 모우식: 1960년대의 배고픈 경력 글: 모우식(茅于軾) 모든 사람들은 배고픈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장기간의 기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극단적인 고통의 경험이다. 현재의 사람들이 다시 그런 고통을 겪을 리는 없을 것이다. 3년자연재해의 두번째 해인 1960년, 필자는 "우파"로 몰려 산동성 .. 2013. 10. 7. 왕홍문(王洪文)의 최후 글: 현세보(現世報) 1977년 7월 중순, 중공10기 3중전회가 베이징에서 거행되었다. 회의에서는 <등소평동지직무회복에 관한 결의>가 통과되어, 등소평(덩샤오핑)은 다시 중공중앙 부주석, 중공중앙 군위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의 "삼부일장(三副一長)"의 직무.. 2013. 9. 14. "양개문혁설": 문혁연구의 전개 글: 서우어(徐友漁) 중국인들 가운데 그 당시 문혁연구로 가장 유명한 대표인물은 먼저 양샤오카이(楊小凱) 즉, 양시광(楊曦光)를 꼽을 수 있다. 그외에 정이, 류궈카이, 왕샤오광(王紹光)등이 있다. 왕샤오광은 현재 홍콩 중문대학 정치학과의 주임이다. 양시광은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 2013. 8. 4. 이전 1 2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