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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42

대만인은 중국인인가? 글: 주한경(周漢卿) 대만인은 중국인인가? 이 문제는 먼저 중국과 중국인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한다. 1990년대이전의 대만인은 중국인일뿐아니라, 유일한 중국인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문화대혁명을 진행할 때, 양장(兩蔣, 장개석과 장경국부자)은 대만에서 중국문화를 부흥시켰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파사구(破四舊,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을 타파하는 운동)"를 진행할 때, 대만은 대륙을 '공비(共匪)'라고 욕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1988년 중국CCTV의 6부작 다큐멘터리로 중국은 하류,대지를 기반으로 한 '황색문명'으로 인하여 보수, 우매, 낙후했으니, 생존을 위하여 반드시 해양을 기반으로 하는 '남색문명'을 배워야 한다는 내용임. 개혁개방과 시장경제를 진행해야하는 근거를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음.. 2023. 6. 23.
"문화대혁명" 명칭에 관한 두 개의 중요개념분석 글: 왕영괴(王永魁) "문화대혁명"이라는 명칭은 점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1966년 5월이전에 그것은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고 불렸다. 1966년 5월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 이후, "사회주의문화대혁명"과 "무산계급문화대혁명"이 혼용되었고, 의미는 미세한 차이가 있었다. 1966년 8월 중공8기11중전회에서 이 통과된 이후에는 이 운동의 정식명칭이 "무산계급문화대혁명"으로 정리되고,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후 "사회주의문화대혁명"이라는 명칭은 일부 외국전문을 번역하는 경우에 언급되는 외에 다른 경웅는 기본적으로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된다. 1. "사회주의문화대혁명"개념의 탄생과 의미 1963년 12월 12일과 1964년 6월 27일, 모택동은 문화계에 존재하는 문제에 대하여 각각 비시.. 2023. 5. 1.
최후의 귀족: 강동벽(康同璧) 모녀의 인상 (1) 글: 장이화(章詒和) 강동벽(康同璧). 여, 자(字)는 문패(文佩). 호는 화만(華鬘), 광동 남해 사람. 1886년 2월생. 강유위(康有爲)의 차녀. 일찌기 미국유학을 떠남. 전후로 Radcliffe College와 Barnard College를 졸업했고, 졸업후 귀국한다. 만국부녀회 부회장, 산동도덕회 회장, 중국부녀회 회장을 지낸다. 일찌기 부작의(傅作義)가 소집한 화북7성참의회에 대표로 추천되고, 인민해방군과 북경을 평화적으로 해방하는 협상에 참여했다. 1951년 7월 중앙문사관 관원이 되고, 북경시 인민대표가 된다. 제2,3,4기 전국정협위원이었다. 1969년 8월 17일 병사하니, 향년 83세였다. ---에서 내가 학교에서 공부할 때, 동창중에 도시평민출신이 한명 있었는데, 그 시대에는 계급성.. 2023. 4. 16.
진독수(陳獨秀) vs 모택동(毛澤東): 중국공산당의 초기지도자 글: 오성수행(悟性隨行) 중국공산당 최초의 지도자는 진독수이다. 진독수의 특징은 학술사상분야에서 독립구신(獨立求新), 자신불기(自信不羈), 시야서리(視野犀利), 격정양일(激情洋溢)하며,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기 좋아하고, 또한 잘 말할 수 있었다. 이런 특징은 현대교육에 종사하거나 방향성과 기치성을 확립하는 인물로서는 더 이상 적합할 수 없다. 그래서 진독수가 중국공산당의 초대 지도자가 된 것은 아주 적합하다. 민주와 과학 덕선생(德先生, Democracy를 말함)과 새선생(賽先生, Science를 말함). 중국의 신문화운동은 모두 진독수가 극력 추진하여 중국의 넓은 대지 위에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스며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의 한계성이다. 그는 멀리 보고 깊이 보지만, 현실은 도외시했다. 192.. 2023. 2. 1.
장국도(張國燾)의 홍콩세월 글: 조대부화실(趙大夫話室) 장국도의 중국역사상 지위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그는 여전히 많은 밀리터리덕후와 역사애호가들이 자주 언급하는 인물이다. 그의 시비공과에 대하여는 후인들의 평가가 아마 더욱 적합할 것이다. 몇가지 점은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의견이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1. 장국도는 북경대학 학생으로서, 북경학생연합회 강연부장과 북경학생연합회 총간사를 맡았다. 그는 "5.4"운동의 가장 중요한 학생지도자중 한명이다. 2. 장국도는 중국공산당의 주요창시자중 한명이다. 100년전 가흥남호(嘉興南湖)의 작은 배 위에서 강서(江西) 평향(萍鄕) 상률(上栗) 방언을 하는 그는 "제1차대표대회의 폐막선언"을 했다. 3. 장국도는 "8.1" 남창의거의 주요발기인중 한명이고 홍군(紅軍)의.. 2023. 1. 25.
현재와 향후의 중국정치방향 (1): 고위층투쟁은 생사결전이다. 글: 낙원지(駱遠志) 보통사람들이 중국정치를 보면, 최신의 가장 완전한 정보를 얻는 것이 불가능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찰사지금(察史知今)"이다. 유사한 역사적 선례에 근거하여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1967년 1월 13일, 문화대혁명이 불꽃처럼 일어났다. 중국의 2인자이자, 당내투쟁을 통해 그 자리에 올라갔고, 많은 전우를 타도했던 국가주석 유소기(劉少奇)는 이떄 이미 모택동과의 투쟁에서 패배했고,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대면했다. 유소기는 모택동에게 사직서를 내면서 이렇게 말한다: "처자식과 연안이나 고향으로 가서 농사를 짓고 싶습니다." 모택동의 태도는 오만하지 않았지만, 뭐라고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이번 만남후 얼마 지나지 않아, 유소기는 연금되고, 이어서 홍위병에게 학대와 .. 2022. 5.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