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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역사분석/중국역사의 이론

"양개문혁설": 문혁연구의 전개

by 중은우시 2013. 8. 4.

글: 서우어(徐友漁) 

 

중국인들 가운데 그 당시 문혁연구로 가장 유명한 대표인물은 먼저 양샤오카이(楊小凱) 즉, 양시광(楊曦光)를 꼽을 수 있다. 그외에 정이, 류궈카이, 왕샤오광(王紹光)등이 있다. 왕샤오광은 현재 홍콩 중문대학 정치학과의 주임이다. 양시광은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그는 "양개문혁론"과 사회충돌온의 중국쪽에서 가장 중요한 대표인물이다. 그는 나중에 중국인들 가운데 노벨경제학상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공인되었었다. 그의 경력은 아주 전설적이다. 그의 부친은 문혁전의 후난성위 비서장이자 원래 노혁명가였으며, 나중에 펑더화이, 장원텐 여산회의의 형향을 받아, '펑더화이분자'로까지 낙인찍히지는 않았지만, 우경으로 분류되어 당내처벌을 받은 사람이다. 그는 혁명참가자들 중에는 중용되거나 고위직에 있었던 사람은 아니다. 양샤오카이는 그 자신도 문화대혁명에 깊이 빠져들었고, 문혁가운데 많은 조사를 한다.

 

양샤오카이는 문화대혁명때 아주 유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왕시저가 <사회주의의 민주와 법제를 논함>이라는 글을 쓴 것과 마찬가지로, 1968년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글을 써서, 중국의 각 계층을 분석하고, 중국의 미래사회가 어떻게 변혁해야할 것인지에 대하여 여러가지 주장을 한다. 그는 이 글 때문에 반혁명으로 몰려, 감옥에 갇힌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운이 좋았다. 그가 감옥에 갇힌지 10년동안 그는 중국내에서 가장 좋은 대학을 10년간 다닌 셈이 된다. 당시 중국의 대학은 모조리 문을 닫았고, 일반인들은 10년간을 허송세월해야 했고, 10년간 학업을 내팽개치게 된다. 그러나 양샤오카이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다. 그 자신이 정치범이고, 정치감 감옥안에는 후난에서 당시 가장 학문이 깊고, 가장 사상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들어와 있었다. 그는 그 안에서 영어, 수학, 기계를 배웠다. 그래서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쯤에 그는 이미 상당히 지식을 갖춘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 사회과학원이 그를 모셔가고, 나중에 미국유학까지 떠난다. 그는 금방 아주 유명한 경제학자가 된다. 나중에 모두 가장 큰 손실로 여기는 것은 그가 몇년만 더 살았더라면 노벨경제학상을 탔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오스크레일리아의 모나시대학에 있을 때, 그 학교의 사람이 그를 노벨상을 받은 사람으로 대우해주었다. 그에게 지위나 경비를 모두 아주 높게 책정해주었었다.

 

그는 명망이 아주 높았고, 많은 글을 썼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문화대혁명때 비판받은 <중국은 어디로 가는가?>이다. 그는 나중에 문화대혁명을 계속 연구하고, <우귀사신록>이라는 아주 좋은 책을 쓴다. 여기서 그는 문화대혁명10년을 논하고, 감옥안에서 공부한 상황, 영어를 배우고, 수학을 배우고, 물리를 배우고 뭐든지 배웠던 것을 얘기한다. 사회충돌론에 관하여, 양시광은 일련의 논문에서 이렇게 말해다. 문화대혁명의 연구자들은 일반적으로 자각적으로 혹은 비자각적으로 3가지 이론틀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는 권력투쟁설이라는 것으로, 중공지도자들이 정치권력을 쟁탈하는 것은 메인으로 하여 문화대혁명을 분석하는 것인데, 서방에서는 이 분야의 주장이 가장 많다. 그러나 중국대륙에서는 이를 적나라하게 말하는 것을 꺼리고 있는 펴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에 대하여는 공식적으로 하는 말대로 하는 것이지, 모택동과 유소기가 적나라하게 권력투쟁을 벌였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학설로까지 주장된 경우는 많지 않다. 권력투쟁으로 문화대혁명을 해석하는 것은 서방학자들이 가장 많다. 그들은 문화라는 것은 헛소리이고 근본적으로 문화같은 건 없었다고 말한다. 문화대혁명은 문화에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무화혁명(武化革命)"이라고는 얘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모두 총과 탱크로 싸웠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만, 굳이 "문화"대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택동의 잘못을 덮어주려는 시도라고 본다. 이런 이론은 모택동과 유소기간의 권력투쟁이 어떤지를 분석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양시광은 문화대혁명의 이론을 3가지로 분석하여 첫째는 권력투쟁설, 둘째는 중국관방의 계급투쟁설 혹은 노선투쟁설, 혹은 양개사령부라는 주장인데, 이는 문화대혁명에서 관방의 견해이다. 예를 들어, 모택동, 강청같은 문혁파들은 모두 이런 주장을 펼쳤다. 문화대혁명이 발발한 것은 수정주의노선과 혁명노선간에 진행된 투쟁이고 노선투쟁이라는 것이다. 문혁이후의 등소평, 진운도 노선투쟁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단지 옳고 그른 문제에서는 완전히 반대가 되었을 뿐이다. 문화대혁명때 모주석을 대표로 하는 혁명노선과 유소기를 대표로 하는 수정주의노선간에.

 

종합적으로 말해서, 문화혁명이 발생한 것은 노선이 다르기 때문이고, 노선투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문혁을 부정하는 등소평의 일파도 노선투쟁설에 동의한다. 다만 정확한 노선은 유소기의 노선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성립할 수 있는 면이 많다. 예를 들어 현재 얘기하는 신민주주의, 유소기는 신민주주의를 견지할 것을 주장했다. 모택동은 불만을 가지고, 배신한다. 자신의 장엄한 약속인 신민주주의를 배반한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극좌의 노선을 걷는다. 지나치게 일찌감치 사회주의혁명을 진행한 것이다. 이것도 노선투쟁설이다. 단지 이전의 문화혁명이 정확하다고 보는 것에서 틀렸다고 보는 것으로 바뀐 것뿐이다. 문화대혁명때 비판받는 측이 정확한 측이라고 바뀐 것일 뿐이다. 이것은 문화대혁명의 두번째 이론적인 틀이다. 노선투쟁설로 불리는 것이다.

 

마지막 한가지는 양샤오카이를 대표로 하고 중국인들 가운데서 제기된 것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서방학자들이 일찌감치 제기하였던 사회충돌설이다. 양샤오카이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 관점은 이렇게 본다. 문화대혁명은 상층의 권력투쟁일 뿐아니라, 중국사회에서 서로 다른 이익집단, 계층의 투쟁이라는 것이다. 문화대혁명에 말려든 홍위병과 각양각색의 군중조식은 간단하게 모주석과 기타 중곡지도자의 정치투쟁의 도구라고 할 수는 없다. 그들은 기만당했을 뿐아니라,  그들 자신의 독립적인 의지도 있다. 그들은 문화혁명때 잠시 있었던 대민주의 기회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다. 문화혁명에서 군중의 이익은 집중적으로 현재 조반파(造反派)의 정치강령내에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관료특권계층을 타도하고자 했다. 도 다른 보수파는 기존이익을 보호하고자 했다. 즉 자신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들 쌍방의 투쟁은 문화대혁명에서 군중투쟁의 주요내용이 된다. 동시에 문화대혁명의 전체 경과중 가장 중요한 내용이 된다. 이것이 바로 사회충돌론이다.

 

기실 양샤오카이보다 먼저 정식으로 이런 이론을 제출한 것은 문혁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이다. 양샤오카이는 전문적으로 문혁을 연구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주로 경제를 연구한다. 그런 사람은 바로 아니카 천이다. 그녀는 중국혈통이어서 연구하기에 편리했다. 그녀는 말했다. 1966-1969년의 문혁은 반관료운동이라고(이런 관점은 현재 중국백성들 사이에 시장이 아주 크다), 그녀는 문화대혁명이 막 시작했을 때, 조반파는 모택동이 제출한 구호와 이상에 고무되었다. 모택동은 우리는 군중을 해방시켜야 하고, 군중을 존중해야 하며, 우리는 무산계급혁명노선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군중노선이라고 하였다. 유소기의 노선은 국민당의 훈정노선이라는 것이다. 군중을 아두(阿斗)로 취급하고 자신을 제갈량으로 생각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조반파는 당초에 이런 것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문화대혁명에 가담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첫 몇년동안 중앙문혁의 조종을 받았고, 모주석을 옹호하였다고 한다면, 그들은 즉시 이 점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들은 독립한 정치강령과 정치계획을 지닌 한 무리의 역량이었다.양샤오카이는 더욱 앞서서 주장했다(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문화대혁명의 군중조직을 준정당(準政黨)으로 보았다. 그는 정당이라고까지 말하기는 곤란했을 것이어서 그저 준정당이라고 한 것이다. 그는 모주석이 말한 군중동원수법을 "모주석이 자유결사라는 패를 들고 나왔다"고 하였다. 이런 주장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의 생각으로 조금 지나친 점이 있다. 양샤오카이의 주장대로라면, 1966-1969년 모택동은 유소기를 타도하기 위하여 자유결사와 언론자유라는 패를 들고 나왔다는 말이 되는데, 그때 중국은 중국공산당통치역사상 드물게 볼 수 있는 때였고, 예외적으로 결사자유와 언론자유가 있던 시기이다. 그때는 신문을 만들고, 언론에 발표하는 것이 사전검열을 받지 않고 발표할 수 있었다. 결사자유라는 것은 인민군중이 조직을 성립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필자는 양샤오카이의 관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는 너무 과장했다. 실제로는 제한과 규정이 있었다. 예를 들어 <공안육조>가 있었다. 여하한 언론도 모주석, 임표를 공격하면 군중은 즉시 무산계급전정기관으로 보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의 생각으로 양샤오카이는 좀 지나친 점이 있다. 다만 그의 이런 주장은 전혀 근거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아주 재미있다. 이런 주장은 현재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문화대혁명을 인민군중이 보기드물게 민주와 자유를 구가한 자유시대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양샤오카이는 바로 현대정치학의 술어를 가지고 그당시 실제로 결사자유와 언론자유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양샤오카이는 문화대혁명때 적극적으로 조반을 한 사람들은 모두 시민들 중에서 공산당의 통치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1966-1968년의 2년간, 모택동이 하나의 명령을 내리는데, 군대이외에 모든 공산당의 조직활동은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시민들이 정부에 등록하면 자신의 정치조직을 성립할 수 있었다. 모주석은 일반민중의 공산당체제에 대한 불만을 이용하여, 유소기, 등소평이 시민들에게 진행한 정치적 박해(공작조파견등)를 이용하여 민중의 분노를 자극하여 조반운동을 일으키도록 한 것이다. 그는 말했다 그때의 운동은 진정한 조반이었다고. 중국공산당의 관료가 17년동안 한 일은 모두 민중에게 청산된다고. 당시의 중국은 1966-1968년, 약 2,3년의 기간동안 진정한 노동자운동이 발생하였고, 진정한 학생운동이 발생하였고, 진정한 시민운동이 발생하였다고. 표면적으로 모두 모주석의 말을 듣고, 혁명조반을 하지만 이 운동은 실질적으로 극우적인 것이었다고. 왜 극우적인 것인가? 표면적으로 모주석을 따라서 조반한 것이지만 실제로 진공한 것은 당의 조직이고, 그들이 고치고자 한 것은 당의 영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조반운동의 실질은 극우이다.

 

한 사람이 아주 날카롭게 말했다. 양샤오카이와 비슷하다. 프랑스에 문화혁명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데 화린산(華林山)이라고 부른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국적을 취득하고, 프랑스부인을 얻었다. 그는 당초에 광동의 가장 유명한 홍기파(紅旗派)의 조반파구성원이었다. 그는 실제로 문화대혁명의 조반파는 중국공산당을 뒤집어엎으려 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이런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그와 논전을 전개한 바 있다. 그리고 필자는 그를 심하게 비판했다. 최소한 이런 주장은 혹세무민하는 것이다. 다만 동시에 필자의 비교적 학술적인 언어로 얘기하자면 부분적으로 사실적 근거가 있다. 해외에서 이런 주장을 믿는 사람이 아주 많다. 필자의 생각으로 이런 주장은 완전히 근거없는 것은 아니다. 정도와 규모를 어느 정도 고려하여야 할 것이냐는 문제이다. 그들의 주장은 일부 사실적 근거가 있다.

 

또 다른 입장은 아주 정통적이고 관방적인 사람의 것이다. 현재 일반적으로 그를 신좌파(新左派)라 부른다. 이름은 왕샤오광이다. 그는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논문은 문화대혁명때의 군중운동에 관한 것이다. 그의 박사논문의 중문본과 영문본은 모두 간행되었다. 그는 사회충돌론의 아주 중요한 대표인물이다. 그는 학술적으로 왜 문화대혁명이 사회충돌이지 사람들 모두가 기만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했다.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서 모주석을 옹호한 것이고, 모주석의 주장에 호응하여 문화대혁명을 진행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각도에서 논증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이 자주적이고 모주석의 명령을 들은 것이 아니라는 아주 중요한 증거가 있다고 말한다. 그 증거는 어떤 것인가? 바로 그는 모주석이 여러가지 말을 인용했다. 모주석은 문화해혁명을 3개월간 진행한 이후, 문화대혁명은 보기에 6개월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6개월이 지난 후에는 다시 2,3년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2,3년을 하고난 후에도 모주석은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결과 10년이 지나도 끝나지가 않았다. 왕샤오광은 이런 논단에 근거하여 이렇게 말했다. 모택동의 문화대혁명일정표는 계속 폐기되었고, 계속 중단되었다. 이것은 무슨 문제를 설명하는가?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의 진전을 장악하고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택동은 아예 통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문화대혁명의 진전은 모택동을 밀고 갔고, 모택동은 군중운동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영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한 것처럼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쥐락펴락하면서 철저히 통제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모택동은 운동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지 않으면 2개월이 안되고 다시 6개월, 6개월이 안되자 다시 2,3년, 2,3년이 안되자 10년동안 다시 한 것은 설명할 수가 없다. 군중운동이라는 마귀가 호리병에서 나온 후에는 모택동도 수습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그래서 모택동은 그저 제자리를 맴돌 수밖에 없는 상황이 초래된다. 그래서 왕샤오광은 말한다. 이런 사정은 그가 일으킨 문화대혁명이 그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고 한다. 오히려 그가 그 자신이 일으킨 운동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그 자신이 문혁의 최대희생자가 되었다고 본다. 이것이 왕샤오광의 관점이다.

 

이런 "양개문혁"의 주장은 토론이 가장 집중되고 가장 오래된 문제이다. 이런 토론은 문화대혁명 30주년까지 계속 된다. 1996년, "양개문혁록"에 관한 논쟁이 그해 문화대혁명발동30주년기념의 아주 중요한 이슈가 된다. 2006년이 되어 문화대혁명발동40주년을 기념할 때도 가장 중요한 이슈의 하나가 되었다. 류궈카이가 2006년 문혁40주년기념회에서 아주 중요한 논문을 하나 발표한다. <인민의 문혁을 논함 - 문혁40주년을 위하여 씀>이라는 글이다. 이 글에서 그는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것은 수단이고, 목적은 중앙과 그와 의견이 다른 성시의 사람들을 숙청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모택동의 관방문혁의 첫번째 주장은 문혁숙청이다. 모택동은 유소기를 우두머리로 하는 사람들을 숙청하는 것이다. 문화혁명에서 군대와 권력을 장악한 문관이 혁명군중을 극히 잔혹하게 진압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관방문혁은 문혁숙청이외에 또 하나의 내용을 가지는데 바로 문혁진압이다. 다만, 또 다른 방면에서, 모두 보지 못한 것은 광대한 인민군중이 정치적 차별에 반대하고, 정치박해에 반대하는 것이다. 군중들이 자신의 생존권리를 쟁취하려는 운동을 문혁반항이라고 부른다. 문혁반항은 바로 "인민문혁"의 내용이다. 이런 관점은 2009년에 발표되었을 때, 대륙에서도 반응을 보인 사람이 있었다. 그 학자의 이름은 류쯔리(劉自力)이다. 그는 중앙선전부 간부의 자제라고 한다. 이론사고가 아주 많았다. 현재 많은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런 관점에 반대했다. "양개문혁설"에서, 문혁중 조반파에 대한 인식과 평가와 관련이 있다. 중요하면서도 극단적인 하나의 관점은 문혁중 조반파를 정의를 대표하는 역량으로 보는 것이다. 왜먀하면 인민군중이 탄압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문혁전의 17년간 관료계급, 특권계급의 압박을 받았고, 정치적으로 박해를 받고, 경제적으로 수탈을 당하였으므로 그들이 문화대혁명의 기회를 이용하여 특권에 반항하고 관료에 반항하였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양개문혁설"은 조반파에 대한 평가에 관련된다. 이 방면에서, 2006년에 책이 한권 나온다. 쓰촨성이 저우룬줘(周倫佐)가 쓴 것으로 <문혁조반파의 진상>이라는 글이다. 즉, 문화대혁명의 조반파는 등소평이 "삼종인(三種人)"으로 규정되었는데, "머리에는 긴 뿔이 나 있고, 몸에는 긴 가시가 나 있고, 좋은 마음을 품지 않고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은 모두 정파의 인물이라고 한다. 그들은 핍박받은 사람들이고 그들은 자신의 이익쟁취를 위하여 투쟁한 것이다. 이런 주장은 여러가지가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두 가지 점을 얘기하고자 한다. 첫째는 나 자신에게도 견해가 있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이 논쟁에 참가했고, 하나의 관점을 대표했다. 당초 필자는 기본적으로 "양개문혁설"을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필자는 천후이(秦暉)가 나의 관점에 대하여 별로라고 생각한다고 느꼈다. 천후이의 견해는 "양개문혁"은 없다는 명확한 것이었다. 약간은 "인민문혁"설에 치우친 것이었다. 나 자신은 문혁을 아주 상세히 연구했다.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말하는 그것을 그러나 필자는 모택동의 문혁이 없으면 배후의 조반파의 활동공간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인민의 문혁"은 기본적으로 모택동문혁의 파생물,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학자로서 연구하며 통계적 의미에서, 관련된 사람의 수에서 보면, 그것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다. "양개문혁론"의 이론에서 말하는 자각적이든 비자각적이든 진정으로 반관료, 반특권을 한 사람은 우리가 말하는 또 다른 이야기(즉 우리가 말하는 문화대혁명의 홍위병운동은 바로 '오대영수'이다. 당초의 혈통론을 얘기하고, 괴대부와 같은 사람을 얘기하는 것이다)에 관련된 사람과 비교해서 말하자면 인원수나 역량이 너무나 적고 작다. 필자의 생각으로 거의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양개문혁설"에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현재 사회의 모순과 충돌이 갈수록 격렬해지면서, 필자는 "양개문혁설"이 문화혁명의 조반파에 관한 이론, 사상관점과 정서가 3,4십년동안 잠복했다가 현재 중국의 이런 사회에서 이런 사회모순이 급격하게 발효하는 상황하에서, 필자의 관점은 점전 천후이에 가깝게 접근해갔다. 필자의 생각으로 통계적인 의미애서 수량이 너무 적다. 그것은 첫번째 문혁과 나란히 언급할 수준이 못된다. 다만 그것의 의미는 현재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그래서 현재 필자의 관점은 약간 "양개문학설"에 가까워져 있다. 다만 필자는 기본적으로는 "일개문혁설"에 동의한다.

 

이 방면의 견해는 여러가지이다. 예를 들어, 충칭에 허슈(何蜀)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충칭당사잡지의 주편(主編)이다. 그의 관점은 대체로 나와 일치한다. 조반파는 속았다는 것이고, 그는 심지어 조반파는 문화대혁명기간중 그거 깨고 부수는 것밖에 할 줄 몰랐다고 본다.

 

필자는 현재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점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본다. 모두 이 점에 흥미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현재 중국사회의 모순이 날로 첨예해지면서, 모택동의 문화혁명이론은 현재, 당대에 미치는 영향이 더욱 커지고 있다. 모택동은 인민군중, 혁명군중의 "조반유리(造反有理)"를 얘기하고, "타도주자파"를 내걸었으며, 대민주를 해야한다는 이론을 내걸었다. 당초 내걸때는 중국혁명은 좌경화되어 무슨 '자본주의의 길을 간다'는 것도 없었고, '시장경제는 그림자도 없었다. 그래서 약간은 견강부회이다. 나중에 중국이 시장경제를 하고, 무슨 부정부패가 나타나고, 지금 '주자파'라고 얘기하는 것은 그래도 갈수록 이치에 맞는 점이 있다. 심지어 모택동이 당시 문화혁명을 선전할 때보다는 더 이치에 맞는다. 모택동은 당시에 말했다. "사회주의혁명을 하는데 자산계급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고 느낀다. 바로 공산당내에 있다." 이것은 황당무계한 말이다. 자산계급이 어찌 무산계급의 선봉대 안에 있단 말인가? 모두 이것은 황당하다고 여겼다. 현재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주장이 모택동의 영명과 식견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현재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집권파는 바로 특권계층이다. 부정부패했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다. 현재 하는 것은 시장경제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생각으로 상황은 이렇다. 80년대에 모택동의 이 이론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진운과 등소평이 문혁을 부정한 것이 깊이 사람들의 마음에 와닿았다. 나중에 특권계층이 갈수록 심해지고, 특수이익집단이 갈수록 심화되면서, 특히 시장경제를 하고난 후, '주자파'라는 이 개념은 합리성이 더욱 두드러지게 된 것같다. 황당함이 점점 약화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이론을 믿기 시작한 것이다. 필자 자신의 연구에 따르면, 조사를 해보고 알아냈다. 구정때, 허난성의 일부 군중, 해고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그들이 내건 기치는 바로 모주석의 기치였다. 가지고 나온 화상은 모주석의 화상이고, 그들의 구호는 당초 문화혁명때의 그 "특권계층타도"와 같은 구호였다. 이점은 주목할 만하다. 필자는 최근에 충칭의 사건을 주목하고 있다. 충칭의 조반파의 모든 우두머리들은 미친듯이 보시라이를 옹호하고 있다. 이들 조반파는 원래 등소평과 진운의 숙청을 당했고, 원래 불평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들은 당초 그들이 모택동에 충성하는 것이 공산당에 충성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결국 모조리 두드려맞고, 청산을 당해버렸다. 지금 보니, 모택동이 말한 것이 갈수록 들어맞는다. 너희는 바로 주자파의 복벽이다. 중국을 자본주의의 길로 끌고 가는 것이다.

 

양판은 이렇게 물었다: 충칭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진짜라고 생각하는가 가짜라고 생각하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가짜이다. 충칭에서 필자가 이해하고 있는 바로는 가장 미친듯이 충칭을 열렬히 옹호하고, 심지어 충칭을 위하여 도산검림도 오르겠다고 하고 그를 위하여 목숨을 내걸겠다고 하는 것은 바로 문화혁명의 그 조반파들이다. 특히 그 조반파의 우두머리들이다. 양파는 당초에 심하게 싸웠었다. 현재는 공동으로 일치하여 충칭을 열렬히 옹호한다. 이것이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또 하나의 사고방식이 있다. 모두 잘 알지는 못하고 있을 것이다. 문화혁명에 열렬히 참여했던 본인같은 사람들은 나중에 모두 청산을 당했으므로, 그들은 반성을 했다. 본인은 문화혁명에 대하여 철저히 부정하는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서방에도 1968년에 대응하는 조반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문화혁명중에 파리학생, 미국학생, 스탠포드의 학생, 하버드대학의 학생, 일본의, 독일의 학생들이 일으킨 조반이다. 서방학생의 1968년 조반파는 중국의 조반파의 최후와 같지 않았다. 우리는 청산을 당하여 매우 비참하게 되었다. 그들은 민주사회였고, 아무도 그들을 청산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중에 학자들중의 엘리트가 되고, 현재 그들은 서방사회의 주류가 되었다. 그들의 일부는 대학에서 학과장이나 원장급이 되었다. 그들은 문혁의 관점을 견지한다. 중국이 "사인방"을 체포한 후 그들은 아주 분노했다. 그들은 "모택동의 뼈가 마르지도 않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런 일을 중국우파의 반혁명정변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런 견해를 계속하여 유지한다.

 

아주 불행하게도, 중국인들이 해외로 가서 공부하는 경우, 특히 미국으로 가서 공부하는 경우, 지금도 엘리트이다. 그들은 그곳에 간 후에 그들의 지도교수가 서방의 좌파이므로, 문화혁명에 대한 견해를 그들에게 주입시켰다. 여기에 저명한 인물 가장 전형적인 인물은 바로 추이즈웬(崔之元)이다. 추이즈웬은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의 지도교수는 미국이 좌파학자이다. 그들에게 문혁을 찬미하는 내용을 가르친다. 그래서 추이즈웬이 나중에 발표한 견해는 "모주석이 우리를 가르쳤고, 문화대혁명은 7,8년내에 다시 한번 오며, 이것은 중국미래이 정치건설에서 하나의 원칙이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우리같이 문화대혁명을 겪은 사람들에 있어서 특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7,8년내에 다시 한번 문화대혁명이 오고, 우귀사신이 뛰어나오며, 우리는 무산계급의 쇠빗자루로 모조리 그들을 쓸어낼 것이다"라는 것은 아주 공포스럽고 아주 두려운 일이다. 다만 이 귀여운 추이즈웬같은 신좌파는 서방의 지도교수로부터 그것을 배운 후에 주장한 것이다. 그의 민주모델은 "모주석이 가르친 문혁이 7,8년내에 다시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문화혁명에서 조반파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사회공정을 추구한 것이라고 믿었다. 게다가 현재의 사회는 불공정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문혁이론은 시장을 가지는 것이다. 게다가 중국은 현재 유명대학(추이즈웬은 미국에서 돌아와 칭화대학에 갔다)에는 일부 서방의 좌파스승에게 문혁이론을 배운 교수가 있다. 그들은 현재 중국의 대학생들에게 문화대혁명의 이론을 주입시키고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을 나는 아주 두렵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양개문혁록"이 그들에게 유력한 기반을 제공해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문화혁명이라는 대동란과 대투쟁의 사정이 또 발생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만일 국면이 안정적이면 문화대혁명에 투신하였던 이세대는 철저히 무대에서 퇴출될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일찌감치 은퇴하면 문화대혁명을 겪은 가장 젊은 사람은 57,8세가 될 것이다. 그들도 몇년이 지나면 은퇴한다. 이 세대는 없어지는 것이다. 문혁과 유사한 현상이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중국사회가 통제불능이 되면, 다시 문화혁명과 같은 것이 나타날 것이다. 누군가 '주자파타도'와 같은 당당한 구호를 내걸고 관료특권계층을 공격할 것이며, 대동란이 나타날 것이다. 이럴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래를 생각할 때, 사회에 통제불능상황이 발생한다면 문혁이라는 괴물이 다시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문혁에 대한 연구를 중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