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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전)

모우식: 1960년대의 배고픈 경력

by 중은우시 2013. 10. 7.

글: 모우식(茅于軾)

 

모든 사람들은 배고픈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장기간의 기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극단적인 고통의 경험이다. 현재의 사람들이 다시 그런 고통을 겪을 리는 없을 것이다.

 

3년자연재해의 두번째 해인 1960년, 필자는 "우파"로 몰려 산동성 등현(藤縣)으로 하방(下放)되었다. 당연히 그때 하방된 것은 "우파"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동지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파"에 대하여는 더욱 엄격하게 단속했고, 고생도 가장 많이 하게 된다. 우리 철도연구원에서 함께 하방된 사람은 개략 6,7십명이었고, 필자는 장리동촌으로 하방되었으며, 당해촌 당지부서기 이모의 집에 거처했다. 그의 집에는 그의 부인과 두 아이가 있었다. 큰 애는 3,4살이고, 작은 애는 막 돌이 되었다. 삼년자연재해때 간부의 집안만이 새로 태어난 아이가 있었다. 일반인들은 아예 생육능력이 없었다. 필자 자신은 농촌에서 꼬박 10년을 머무는데, 근본적으로 무슨 성욕같은 것은 생기지 않았다. 우리가 막 도착했을 때, 옆집의 일가 4식구 중에서 이미 2명이 굶어죽었다는 것을 알았다. 남은 사람은 호주 1명과 그의 큰 딸이다. 그의 부인과 작은 딸은 전년(1959년)에 죽었다. 엄마가 살아있을 때는 아이를 보호했지만,엄마가 죽자 아이도 죽음을 면키 어려웠다. 현지에서 가장 참혹한 곳은 12명의 식구중에서 겨우 1명만 살아남은 집이다. 당시 그는 십여세로 겨울에도 입을 옷이 없었다. 그는 내가 입고 있던 낡은 바지를 눈독들였는데, 엉덩이에는 이미 구멍이 나 있었다. 내가 떠날 때 바지를 그에게 주었는데 그는 감격해 마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나의 그 바지를 탐내던 사람이 많았던가보다. 어떤 사람은 나를 원망하였다. 그 바지를 그 남자에게 주었다고. 왜냐하면 그보다 더욱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말이다.

 

우리가 막 등현에 도착했을 때, 현의 지도자들이 우리를 위하여 연회를 베출어주었다. 북경에서 온 사람들은 배고파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현지의 백성들은 이미 1년이나 배를 곯았다. 우리는 현지간부들과 공통언어가 없었다. 현지의 간부들은 입만 열면 백성들에게 먹을 것이 충분하고 양식도 문제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날의 연회에 나온 것은 좋은 요리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양식은 마음껏 먹었다. 그 당시에는 마음껏 먹는 것에 대하여 기이하다고 여기질 않았다. 나중에, 배가 고파진 이후로 마음껏 먹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다. 그때 가장 보기 어려운 관경은 사람이 입을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게 어찌 가능한가? 우리가 바라는 것은 바로 현으로 가서 회의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한 끼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이런 기회는 아주 적었다. 기억하기로 겨우 2번 열렸던 것같다. 매번 1주일가량이었다. 이 1주링중 우리는 매일 아침, 정심 저녁의 세끼에 매 끼당 1근의 만두(5개)를 먹었다. 일주일동안 먹어도 배고픔은 가시지 않았다. 배고픔이 가시려면 기름기있는 음식을 먹어야 했다. 기름기없이 양식만 먹어서는 배가 여전히 고팠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이상이 있다. 자신의 인생추구가 있다. 다만 모두 취피낭(臭皮囊, 더러운 가죽껍데기)도 있다. 정상적인 상황하에서라면 이상과 인생추구가 작용을 한다. 사람은 의식의 지배를 받는다. 다만 배고플 때가 되면 취피낭이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 사람의 의식은 완전히 취피낭에게 양보한다. 사람은 이상을 잃고 단지 하나의 바램만 갖게 된다. 그것은 바로 '먹는 것'이다. 이것은 극도로 특수한 인생경력이다. 의식이 없는 경력이다. 사람이 야수의 상태로 퇴보한 것이다.

 

필자는 등현에서 배가 고팠지만 방법이 없었다. 온 몸이 부어서, 신발을 신을 수도 없었고, 허리를 굽히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배가 고프면 물을 마셔서 뱃 속의 배고픔을 채워주었다. 소변이 아주 많아서, 하룻밤에 7.8번 일어나야 했다. 필자가 버텨온 것은 원인이 있다. 바로 여름과 가을에 메뚜기를 많이 먹었기 때문이다. 들판에는 메뚜기가 많았다. 한마리를 잡으면 봉투 안에 넣었다가, 7.8 마리가 되면, 봉투를 불에 넣고 태운다. 봉투가 타면, 메뚜기도 뜨겁게 익는다. 입에 넣고 씹어서 뱃속으로 넘긴다. 메뚜기의 소화계통에는 녹색의 물이 있었다. 그것은 메뚜기가 풀을 먹고 나서 소화하는 과정의 산물인데, 아주 썼고, 씹기 힘들었다. 그러나 배고픔은 이 모든 것을 신경쓰지 않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말한다. 재해가 있는 해에는 배터져 죽는 사람이 배고파 죽는 사람보다 많다고. 사람들은 배가 고프게 되면 모든 것은 먹기 시작한다. 그래서 배가 터져서 죽는 것이다. 한 화교청년이 있었는데, 배가 고파서 견딜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모친이 홍콩에서 먹을 거리를 한보따리 보내왔다. 그는 무조건 다 먹었다. 결국은 너무 많이 먹어서 죽었다. 상황은 아주 참혹해서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모친은 시신을 수습하러 왔을 때 역시 살고 싶어하지 않을 정도로 힘들어 했다. 필자가 등현에서 북경으로 돌아온 후, 그날 저녁에 처가 나에게 돼지고기캔을 하나 열어주었다. 나는 그래도 절제하며 돼지기름이 묻은 쌀밥을 한 그릇 먹었다. 저녁이 되자 모조리 토했다. 필자는 일생에서 몇번 죽음을 마주했는데, 한번은 깊은 물에서 수영할 때였으며, 나이 11살때이다. 익사가 있는지도 모를 때였다. 한번은 치치하얼에서 부기관사를 할 때였는데, 겨울에, 나는 기름을 한 통들고, 전진하는 기차를 쫓아가고 있었다. 하마터면 기차에 부딛쳐 죽을 뻔했다. 그 다음은 등현에서 배가 고팠을 때이다. 만일 그 곳에 2달만 더 있으라고 했다면 나는 분명히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번은 '문화대혁명'때 홍위병에게 가죽허리띠로 맞을 때이다. 다행히 당시는 아침 7,8시경이어서 길거리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둘러싸고 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몇몇 홍위병들이 계속 때렸을 것이고 결국은 죽었을 것이다.

 

배고팠던 참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필자는 나중에 매번 식사를 할 때 많은 요리를 남기게 되면, 항상 마음에 부담을 느낀다. 필자는 먹을 때 절대로 골라먹지 않는다. 뭐든지 맛있다. 왜냐하면 배고픈 경험때문이다. 배고픔은 진정한 "절부지통(切膚之痛, 살을 찢는 고통)"이다. 그리고 내심으리 깊은 곳까지 아픔을 느끼게 하고, 영원히 가게 하는 것이다.

 

배고파본 적이 없는 사람은 배고플 때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3년자연재해때 가장 기뻤던 것은 양표가 필요없는 1끼의 밥을 먹는 것이다. 이런 기회가 있었는가? 있긴 있었다. 예를 들어, 출장으로 기차를 탈 때, 규정에 따르면 식사시 4량 양식의 식품을 공급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두 개의 화소(火燒, 길게 구운 밀가루) 혹은 빵이었다. 특권이 있는 사람은 인민대표대회에 참가할 때, 양표가 필요없는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때 친구 집에 가서 대접을 받을 때도 모두 자신의 양표를 가지고 가거나 스스로 먹을 건량을 가지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