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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역사사건/역사사건 (문혁후)

"3중전회(三中全會)"의 특별한 의의

by 중은우시 2013. 11. 13.

글: 신민주간(新民週刊)

 

1978년의 그해 겨울

 

중국공산당의 역사를 돌아보면 최소한 제11기 3중전회때부터 시작하여, 역대 당대표대회이후 3중전회는 왕왕 특수한 의의를 지녔다. 일부 중대한 전환점을 이룬 결정은 3중전회에서 이루어졌다.

 

모든 것은 1978년의 그해 겨울로 되돌아간다. 중앙의 계획에 따라 제11기 3중전회는 1978년 12월 중,하순에 개최된다. 이전에 중공중앙은 공작회의를 소집개최하기로 결정한다.

 

원래의 계획에 따라, 중앙공작회의는 주로 경제문제를 토론했다. 1978년 11월 10일, 당시 중공중앙주석인 화국봉은 중앙공작회의 개막식에서 3가지 의제를 선포한다: 첫째, 농업을 기초로한 방침을 어떻게 더욱 관철집행하여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릴 것인지를 토론할 것, <농업바런약간문제를 가속화하는데 관한 결정(초안)> 과 <농촌인민공사공작조례(시행초안)>의 두 문건을 토론할 것, 둘째, 1979년과 1980년 두 해의 국민경제계획의 안배를 상의하여 결정할 것, 셋째, 이선념 부주석의 국무원 무허회(務虛會, 중화인민공화국의 특수한 회의형태. 務實과 務虛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통상적으로 연초에 방향과 목표를 정하는 것을 무허회라고 하고, 연말에 결산하며 성과와 부족한 부분을 취합하는 것을 무실회라 한다)에서의 발언에 대하여 토론할 것.

 

화국봉은 중공중앙정치국상위를 대표하여 이들 의제를 토론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문제를 토론하자고 제안한다. 즉 다음 해 1월부터 당의 공작중점을 사회주의현대화건설로 옮긴다는 것이다. 화국봉은 지적했다. 이것은 전체국면에 관계된 문제이고, 이번 회의의 중심사상이다.공작중점을 옮기자는 건의는 등소평이 1978년 9월에 제기한 것이다. 화국봉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도 전국이 생산에 노력하고 그가 제출한 각공 계획과 구상을 실현하기를 희망했다.

 

다만 이번 회의에서 여전히 모택동의 "무산계급독재하의 계속혁명이론"과 "조강치국(抓綱治國)"의 11대노선을 견지한다. 회의참석인원중 많은 사람들은 공작중점이전의 제안을 옹호했다. 다만 이렇게 지적한다: "문화대혁명'의 착오이론, 노선과 정책을 비판하지 않고, 억울한 사건, 잘못된 사건, 조작사건을 명예회복시켜주지 않는 상황하에서, 당의 공작중점이전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실상, 일찌기 이해 5월에 발기한 진리표준토론은 이미 옛 울타리를 돌파할 수 있도록 용솟음치고 있었다. 중앙공작회의에서의 발란반정(拔亂反正)에 충분한 이론적 무기를 제공한다. 등소평은 확실히 이번 변혁의 영혼이다. 1978년 6월 2일, 등소평은 전군 정치공작회의에서 발언을 한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반드시 임표, 사인방이 남긴 해독을 숙청해야 하고, 발란반정해야 하며, 정신적인 족쇠를 타파하여, 우리의 사상을 크게 해방시켜야 한다.

 

중앙공작회의가 시작된 후, 참석자들의 비판은 '문혁'때 엄중한 잘못을 저지른 중앙지도자구성원에서 화국봉, 왕동흥등의 사람들이 11대이래 점한 잘못으로 까지 확대발전된다. 그리고 중대결정에 대하여 새로운 건의를 제기한다.

 

일부 당내의 덕망이 높은 노인들이 연이어 발언한다. 당시 금기였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한 돌파구를 마련해준다. 회의는 자연스럽게 방향을 바꾼다.

 

당시 국무원 연구실의 책임자중 한 명이었던 우광원(于光遠)은 당시 서북조(西北組)에 들어 있었다. 이곳은 회의기간동안 발언이 가장 열렬했던 조이다. 더구나 처음으로 왕동흥의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한 조이기도 하다. 우광원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서북조의 분조명단에는 35명이 있었다. 4명은 모조리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발언을 6번이상한 사람수도 가장 많았다. 일부 사람들은 발언이 10회를 넘어서기도 했다.

 

형세는 바로 변화한다. 회의는 발란반정의 방향으로 큰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11월 14일, 북경시위가 나서서 "천안문사건"을 명예회복시킨다. 11월 15일 <인민일보>에 <실사구시(實事求是), 유착필규(有錯必糾)>라는 사론을 싣든다. 많은 군중들은 '해동'의 분위기를 느낀다. 이어서, "남경사건"(1976년 4월, 남경군중이 주은래를 기념하여 일으킨 북경의 "4.5"비슷한 사건)도 명예회복을 선언한다. 오함(吳唅)의 역사극 <해서파관>도 명예회복이 선언된다.

 

12월 13일, 중앙공작회의가 폐막하고, 등소평은 <해방사상.실사구시.단결일치향전간(團結一致向前看)>의 중요발언을 한다. 이 보고서는 실제상 3일후에 거행되는 제11기 3중전회의 주제보고서가 된다.

 

등소평의 결단

 

우광원은 금년 9월 26일 사망한다. 그는 11기 3중전회이전의 중앙공작회의에 참석했고, 3중전회에 열석(列席)한다. 이 역사사건을 친히 겪은 사람이다. 더욱 대단한 것은 그가 20여만자의 저작 <내가 친히 겪은 그 역사의 전환 - 11기 3중전회의 대전막후(臺前幕後)>를 남겼다. 이것은 지금까지 사회각계에서 공인된 11기 3중전회에 관한 가장 계통적인 회고록이다.

 

화동사범대학 역사과 교수인 한강(韓鋼)은 9월 30일의 우광원 고별의식에 참가했고, 그와 우광원간의 엣날 일을 회고했다. 1997년 2월 22일, 즉 등소평이 서거한 후 3일째 되는 날, 당시 <백년조(百年潮)> 잡지사의 사장인 정혜(鄭惠)는 한강과 함께 우광원의 집으로 가서 원고를 받기로 약속한다(당시 중앙당사연구실에서 일하던 한강은 <백년조>잡지에서 겸직편집인을 맡고 있었다). 말을 하던 중간에, 우광원은 우연히 등소평이 1978년 12월 중앙공작회의 폐막회의에서 발언고 초안에 관한 일부 상황을 얘기했고, 그가 등소평이 친히 만든 이 발언의 제강수고(提綱手稿)를 보존하고 있었다.

 

등소평의 이 발언은 바로 나중의 <해방사상, 실사구시, 단결일치향전간>이라는 제목으로 <등소평문선> 제2권에 수록된 저명한 문장이다. 국내외에는 이 원고의 초안에 대하여 서로 다른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등소평 자신이 제강을 썼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이것은 정혜, 한강으로 하여긍 이 제강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고, 이 원고의 탄생경위에 대하여 큰 흥미를 나타내게 했다.

 

여러날 동안 힘들게 찾은 끝에 우광원의 집에서 등소평의 제강수고를 발견한다. 수고는 등소평이 연필로 16절지 백지 위에 썼다. 모두 3페이지로 근 500자이다. 해가오래 지나서, 종이는 약간 누렇게 되었다.

 

한강의 연구에 따르면, 등소평의 발언원고는 중앙공작회의기간에 완성되었다. 등소평은 초안에 대하여 불만족하여, 친히 제강을 스스로 썼고, 호요방, 우광원등을 불러서 발언원고초안문제를 애기했다. 등소평은 이 제강에 따라 발어원고에 써야 할 몇 가지 부분의 문제를 얘기했고, 천명해야할 사상관점, 방침정책을 모두 하나하나 얘기했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했다.

 

우광원은 발언원고초안에서의 역할을 조직자중 한 명으로 포지셔닝했다. 그는 이것이 적절한 지위라고 생각했다. 우광원이 말했다: "발언의 지도사상과 중요관점의 제출은 모두 등소평 본인이 했다. 이 공작에 참가한 호요방과 나도 당연히 약간의 말을 했다. 그러나 특별히 가치있는 것은 없었다."

 

우광원은 분명히 기억한다. 발언원고의 제목도 등소평이 내놓았다.등소평은 이 제목이 괜찮은지 물어보았고, 호요방이 좋다고 말하고, 우광원도 좋다고 말한다. 제목이 신선하고 눈에 띈다고 여겼다.

 

그 때, 호요방은 중앙조직부 부장이었고, 우광원은 국무원 연구실 책임자중 하나였다. 모두 중앙공작회의상에서 아주 활약한 인물들이다. 등소평은 제강을 그들에게 넘겨주고, 그들에게 새로 발언원고를 초안하도록 지시한다. 이때 중앙공작회의 의사일정은 이미 절반이 지났다. 시간이 급박했다. 호요방, 우광원은 그리하여 급히 국무원 연구실의 임간청(林澗靑)등의 사람을 찾아서 붓을 들어 초안을 만들게 했다. 이틀후 초안이 완성되고,등소평에게 봰다. 등소평은 다시 호요방, 우광원을 불러서, 글자 하나하나를 읽으면서 수정했다. 이후 다시 약간의 문자윤색을 거쳐 최후의 발언원고가 형성된다. 발언원고초안이 완성된 후,이 제강수고는 우광원의 손에 남겨져서 지금까지 보존되었다.

 

등소평은 제강에서 7개 방면의 문제를 열거했다: 1. 사상해방, 기기발동; 2. 민주발양, 법제강화; 3. 뒤를 돌아보는 것은 앞을 보기 위함이다; 4. 관료주의 및 인부어사(人浮於事, 일에 비하여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것)의 극복; 5. 일부가 먼저 좋아지는 것을 허용한다; 6. 책임제, 고기정(搞幾定)의 강화, 7. 새로운 문제. 가장 앞부분에 다시 '회의에 대한 평가'라는 말을 추가했다.이것은 당연히 중앙공작회의에 대한 평가이다.

 

<등소평문선> 제2권에 나중에 수록된 발언원고와 비교해보면, 한강은 사상관점이나 논리구조 혹은 주요관념의 무자표현에서 이 발언원고는 등소평의 제강을 근거로 하여 만든 것이다. 그는 제강에서 가장 주목받는 두 가지 사상은 하나가 "일부분이 먼저 좋아지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등소평은 '이것은 대정책이다'라고 명확히 지적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형성되고 완고한 증세가 된 평균주의의 분배체제를 변경하는 것이다. '먼저 좋아진다'는 시범약용은 전체 국민경제발전을 추진하고, 인민샐활을 개선시키는 기본정채이다. 다른 하나는 자주권과 국가계획의 모순은 주로 가치법칙 수요공급관계(제품품질)로 조절한다"는 것이다.

 

"11기 3중전회가 소집개최될 때, 전체 당이 주목한 것은 사상상, 정치상 및 조직상의 발란반정, 경제회복과 발전을 진행하는 것이다. 개혁은 아직 전당의 주목하는 중심이 되지못했다. 발란반정과 상대적으로 개혁은 복잡하고, 어렵고 심도있는 혁명이다." 한강의 말이다. "등소평은 제강에서 제기한 개혁에 관한 일련의 창조성이 풍부한 관점과 주장은 그가 건국이래 역사경험을 심사숙고한 결과이다. 그의 뛰어난 지혜와 시대를 앞서는 의식을 드러낸다."

 

3중전회 관례

 

국가행정학원 교수 왕옥개(汪玉凱)가 보기에, 만일 11기 3중전회가 어느 정도 우연적인 요소가 존재한다면, 최소한 12기 3중전회부터 역대 3중전회의 중요지위는 이미 제도화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역사상, 1대에서 10대까지, 당의 전국대표대회의 소집개최시간과 빈도는 부정기적이었다. 1921년 건당이후, 연속 3년간 당의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한다. 그리고 2번의 전국대표대회는 서로 10여년이 떨어져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당은 1928년에 6대를 개최하는데, 17년후인 1945년에 비로소 7대가 개최된다.

 

11대부터, 당의 전국대표대회는 정기적으로 소집개최되기 시작한다. 매5년에 1번씩 개최되는 것이다. 개회일자는 대부분 9,10,11월의 3달에 집중된다. 당의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를 우리가 약칭하여 '중앙전회(中央全會)'라고 하는 것도 고정된다.

 

왕옥개는 말한다.12대부터 시작하여, 매번 당의 대표대회 폐막후 곧이어 1중전회를 개최한다. 여기서 새로운 중앙지도자를 선출한다; 다음해의 전국 '양회"이전에 당은 다시 2중전회를 개최한다. 여기서 국가기관의 관련인선을 결정한다.

 

"3중전회에 이르러, 새로운 중앙지도자들은 완벽한 정책방안을 내놓는다" 왕옥개의 말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 당의 정상적인 업무규칙과 업무절차가 되었다. 이미 제도화된 것이다."

 

개혁원로이며 중국경제체제개혁연구회 명예회장인 고상전(高尙全)은 자신의 경력으로 역대 3중전회의 중요성을 입증한다. 고상전은 6개의 중앙문건의 기초에 전후로 참가했다. 그중 3개는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이다. 모두 3중전회에서 만든 것이다. 첫번째는 1984년 10월 제12기 3중전회로, <중공중앙의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이고, 두번째는 1993년 11월 제14기 3중전회로 <중공중앙의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건립에 관한 약간문제의 결정>이며, 세번째는 2003년 10월 16기 3중전회로 <중공중앙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완비하는데 관한 약간문제의 결정>이다.

 

이 3개의 중공중앙의 경제체제개혁에 관한 결정은 중국개혁을 추진하는데 관건적인 작용을 한다. 14기 3중전회를 예로 들면, 1992년 등소평의 남순강화후, 중공 14대가 소집개최된다. 14대에서는 명확히 제출한다. 중국경제체제개혁의 목표는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를 건립하는 것이라고. 목표가 명확해지니,어떻게 건립할 것인가에 대하여 당시의 모든 사람들은 아이디어가 없었다.

 

고상전은 회고한다. 중앙이 14기 3중전회를 소집개최하기로 결정하고,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를 어떻게 건립할 것인지에 대하여 토론과 연구를 거쳐 반드시 5개의 기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첫째로 건립해야 할 것은 시장경제의 요건에 적응하고, 재산권을 분명히 하고, 권리와 책임을 명확히 하며, 정부와 기업은 분리하고, 과학적인 현대기업관리제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건립해야할 것은 통일되고 개방적인 시장체제이다; 셋째로 건립해야할 것은 간접조절을 위주로 하는 거시조절체제이다; 넷째로 건립해야할 것은 노동에 따른 분배를 주체로 하여, 효율을 우선하고, 공평한 수입분배제도를 함께 고려하는 것이다. 다섯째로 건립해야할 것은 다단계의 사회보장제도이고 상응하는 법률법규체계를 건립하는 것이다.

 

<결정>의 초안과정에서, "노동취업시장"으로 할 것인지, "노동력시장"으로 할 것인지에 관하여 모두 서로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고상전은 강하게 노동력시장을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력이 어찌 시장에 들어갈 수 있는가? 노동력이 시장에 진입하면 노동자계급의 주인지위에 영향을 준다. 그래서 노동력시장이라는 용어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고상전은 반드시 '노동력시장'이라고 명확히 해야한다고 생각했다. "노동자계급은 하나의 전체적인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개인 노동자는 부분적인 개념이다. 양자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고상전의 말이다.

 

결국, 노동력시장이 14기 3중전회의 <중공중앙의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건립에 관한 약간문제의 결정>에 쓰여진다.

 

12기, 14기 및 16기 3중전회에서 나온 문건은 거의 모두 10년씩 사이를 두고 있다. '현재 거리상 1개 문건이 나오는데 10년이 걸렸다. 개혁은 새로운 상황과 임무에 직면했다. 우리는 예견할 수 있다. 18기 3중전회에서 중국의 향후 개혁개방에 대한 중요한 전략적 배치를 할 것이고, 중요한 전략적 문건을 내놓을 것이다."

 

우연인가 필연인가

 

최근 한동안, 왕옥개는 반복해서 말했다. 18기 3중전회는 아마도 '제2차개혁'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중국개혁개방사업의 전환점이 될 것이다. 왕옥개는 말한다. 18기 3중전회는 35년의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제11기 3중전회와 일종의 역사적 관련이 있다.

 

왕옥개가 보기에, 12기 3중전회에서부터 17기 3중전회까지 내놓은 6개의 결의는 많은 것이 개혁의 어느 방면과 관련있다. 예를 들어, 시장경제체제, 가격, 급여개혁 혹은 농촌개혁발전문제이다. 18기 3중전회는 전면적인 개혁의 의미를 가진다.

 

중공중앙 총서기 시진핑의 말에 따르면, 이번 회의는 전면적인 개혁심화의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고, 전체적인 배치를 말하는 것이고, 종합개혁방안을 제출한다.

 

왕옥개는 말한다. 그가 이런 판단을 한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현재 개혁이 이미 전략적 전환점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과거 상당한 기간동안 우리는 모두 경제체제개혁을 주도로 각종 개혁을 전개했다. 다만 뒤로 갈수록, 경제개혁은 다른 개혁을 손도하기 더욱 곤란해졌다. 그리하여, 정부 자신의 개혁이 더욱 중요하게 보인다. 이것은 즉, 중국개혁이 현재의 이 단계까지 발전하였으므로, 개혁의 내재적인 논리에 변화가 발생하였다. 행정체제개혁은 큰 판의 개혁에서 중요한 선택사항이다. 정치요소개혁을 통하여 경제개혁, 사회개혁을 추진하는 것이 현재의 생각이다.

 

다른 하나는 전통발전방식이 이미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중국경제는 급속한 발전을 지속한다. 다만 지나치게 높은 댓가를 치렀다. 이것은 발전방식의 전환으로 나타나야 한다. 저비용수출전략, 하급산업주도의 경제구로, 자원환경의 사용방식, 노동의 수입분배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지속적 하락과 수입분배의 불공정으로 나타난 사회문제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중국사회전환, 체제전환을 급속히 추진하면서 대량의 사회모순과 사회충돌을 축적해갔다. 이들 경제층면의 개혁, 사회층면의 개혁은 거의 모두 정부 자신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개혁의 난이도가 높고, 심도있게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모두 정부자신에 존재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개혁은 반드시 정부자체부터 손을 보아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만 경제개혁, 사회개혁을 위하여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제2차개혁의 해김이다. 일단 시작하면, 그 형향은 1년 2년만이 아니라 장기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왕옥개의 말이다.

 

당사연구에 전문적으로 종사해온 한강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그는 3중전회의 중요성이 도대체 제도발전의 내재적인 필연인지 관례인지,아니면 깊은 의미없는 우연인지는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

 

당연히, 역사는 하나하나의 우연으로 구성된다. 알아야 할 것은 11기 3중전회이전의 그 중앙공작회의는 원래 경제문제만을 토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