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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정치/중국의 정치

왕후닝(王滬寧): 3명의 총서기를 보좌한 중공의 핵심두뇌

by 중은우시 2013. 11. 10.

글: 양국선(楊國選)

 

 

 

뉴스에서 그의 이름은 자주 국가주석의 뒤에 불린다: "삼개대표론"에서 "과학발전관"까지 그의 공헌이 아주 많다; 1993년 복단문정사성변론회(復旦問鼎獅城辯論會)에서 그는 고문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가장 젊은 부교수였다. 그는 바로 왕후닝이다. 학자에서 "홍장(紅墻)" 제1지낭(智囊)까지 된 것이 우연은 아니다.

 

3월 중순 중공총서기, 국가주석 시진핑이 취임한 후 지금까지, 그는 사방을 시찰했고, 삼군을 고루 방문했다. 러시아 아프리카 4국등 처음 방문하는 등 일련의 활동에서, 신규 중앙정치국 위원, 중앙정책위연구실 주임 왕후닝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통계에 따르면, 시진핑이 중공총서기에 당선된 일에 모두 5번 지방시찰 혹은 참가활동의 행선지는 베이징, 광동, 후베이, 깐수의 4개 성시가 포함되어 있다. 공식적으로 공표된 뉴스에서, 모두 왕후닝은 수행했다. 그외에, 금년 3월말 시진핑주석의 러시아, 아프리카 4개국 최초방문에서이건 아니면 5월말의 미주행이건 수행인원 명단에 모두 왕후닝이 있었다.

 

왕후닝은 1955년 10월 6일,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관적은 산동성 액현(지금의 내주)이다. 공부를 좋아한다는 것은 왕후닝을 소개하는 글에서 자주 보이는 글자이다. 알려진 바에 이하면, 공부를 좋아하는 왕후닝의 성격은 아주 내성적이다. 왕후닝이 중학을 다닐 때, '문화대혁명'을 만난다. 학교수업이 끝난 후, 그는 혼자서 집에 숨어 책을 보았다. 그는 비투(秕鬪), 초가(抄家)등의 활동에는 전혀 참가하지 않는다. 1971년, 16세의 왕후닝은 중학을 졸업한다. 몸이 약하고 병이 많아서, 상산하향(上山下鄕)하지 않고 집에 남아서 계속 혼자 공부했다.

 

파사구(破四舊)로 읽을 수 있는 책은 한계가 있었다. 다만 왕후닝은 뭐든지 잡으면 읽곤 했다. 현재 회상해보면, 왕후닝은 여전히 그 시기에 대하여 그리움을 지니고 있다. 그는 곁에 있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그 때 비록 특별히 가치있는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나 개인에게는 두 가지 장점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하나는 내가 사고를 배웠다는 것이다. 일부 가장 보편적인 사정을 조리있게 분석하고 몇 가지 왜 그런지를 물을 수 있었다; 둘은 스스로 독서의 습관을 양성했다는 것이다. 현재까지, 나는 여전히 독서는 나에게 가장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좋아해서, 사람됨도 조심스럽다. 1972년 여름, 단기간의 학도공을 지낸 후, 왕후닝은 "공농병학원"으로 상해사범대학 외국어배훈반에 추천되어 프랑스어를 배운다. 1977년, 왕후닝은 졸업후 상해시 신문출판국에 배치되어 1년간 일을 한다. 이 때 마침 중국은 10여년간 중단되었던 대학시험과 연구생제도가 부활된다. 왕후닝의 영어와 프랑스어는 아주 뛰어났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외교관생활을 할 수 았었을 것이다. 다만 1978년, 그가 응시한 것은 당시 막 회복된 복단대학 국제정치학과 국제정치전공연구생이었다. 스승은 유명한 <자본론>연구의 권위자인 천치런(陳其人) 노선생이다.

 

졸업후, 왕후닝은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는다. <중국고등교육> 1986년 제9기의 왕후닝을 소개하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대학교에는 소수의 젊은이가 있었다. 외국으로 나가려는 것은 거의 모든 것을 불구하고 바라는 것이었댜. 청년교수는 인재가 부족했다. 왕후닝도 적당한 기회에 출국하여 공부하는 것이 학문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그는 출국만이 대기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왕후닝은 항상 적극적으로 수업을 이끌었다. 교학의 신임 교수로서 왕후닝은 짧은 몇년만에 계속 새로운 과목을 만들어 냈다. 한 학기에 통상 2,3개의 과목을 수업했다. 많을 때는 동시에 4개과목을 개설했다. 근면하여, 왕후닝은 금방 정치학이론연구의 저명한 청년학자가 된다.

 

1985년, 나이 겨우 30사의 왕후닝은 파격적으로 부교수로 승진한다. 전국에서 가장 젊은 부교수가 된 것이다. 이 일은 왕후닝을 전국적인 유명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그후 왕후닝은 교수, 박사생지도교수가 된다.

 

학문에 성취와 저작이 있는 정치학교수로서, 왕후닝은 학문에 엄격하고 기초가 튼튼했다. <비교정치분석>, <반부패.중국의 시험>, <미국반대미국>, <국가주권>, <행정생태분석>, <당대중국가정촌락문화>, <부패와 반부패>등이 모두 왕후닝의 저작이다.

 

왕후닝의 여러 관점은 모두 새로웠다. 그는 외국의 최신이나 경전적인 정치학 명저를 대량 평가했고, 동시에 중국의 구체적인 상황을 결합시킨 대량의 글을 쓴다. 중국의 정치제도에 대한 비교분석을 한다.

 

1986년, 왕후닝은 글을 발표한다. 개혁에서 반드시 중앙권력의 집중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정부의 역량에 의존하여 경제개혁을 추가로 심화하여야 한다고 했다. 이 문장은 많은 반향을 불러 일으킨다. 상해지식계는 국가현대화과정에서 정부중앙집권의 작용에 대하여 토론을 시작한다. 처음에 아시아 4소룡의 경제성장과 미국정치학자 헌팅턴의 개발도상국 국가정치현대화의 이론을 소개한다. 이것은 80년대 중후반 학술계, 사상계를 한때 풍미한 신권위주의의 이론 맹아였다.

 

1987년 5월에 출판된 <비교정치분석>은 왕후닝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책은 중국내지에서 처음으로 거시적인 각도에서 정치현상을 분헉한 정치학 전문서적이다. 이 책은 정치형식, 과정, 의사결정등 10개 분야를 나누어 비교정치학의 학술방법으로 고금중외, 종횡으로 각종 정치현상을 비교했다. 바로 이런 학술의 축적은 왕후닝이 학자에서 의사결정층에 들어갈 수 있는 기초가 되고, 학술연구를 실제업무층면에서 실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988년 그는 미국 아이오와대학,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분교에서 방문학자로 지낸다. 미국에서 방문학자로 있는 기간동안, 왕후닝은 반년내에 크고 작은 30여개 도시와 근 20개 대학을 가보고, 수십개의 정부 및 민간부문을 조사한다. 여러 미국인과 외국인들과 미국을 토론한다. 매일 토론, 방문 관찰한 것을 기록한다. 그리고 <미국반대미국>이라는 채을 쓴다. 이 책에서, 왕후닝은 상세하게 미국대통령 취임의식을 묘사한다.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말한다: "여하한 정치체제도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 하나는 어떻게 권력교체를 하느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회는 지속적으로 안정적인 정치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정치규칙과 정치전통이 작용을 하는 것은 그것이 통치계급내부의 서로 다른 단체간의 권력관계를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왕후닝의 정치체제에 대한 견해는 초기 저작에 흩어져 있다. 그의 일기본 <정치적 인생>이라는 책에서는 정치체제를 얘기한다. 왕후닝은 이렇게 생각한다: 중국은 현대화발전과정에서, 정치체제를 완비할 필요가 있다. 하나의 사회가 장치구안하려면, 반드시 양호한 정치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중국사회의 정치체제모델을 총칙을 완비하고 구축하는 것은 사회주의정치민주와 사회민주를 계속 확대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주의정치발전의 목적이다.

 

1988년 복단대학은 처음으로 팀을 파견하여 아주대학변론회에 참가했을 때, 나이 겨우 33세의 왕후닝은 당시 교장(총장) 세시더(謝希德)(나중에 상하이시 정협주석이 됨)에 의하여 감독의 중임을 맡는다. 팀을 이끌고 싱가포르에 출전하여 중망을 배반하지 않았다. 1993년 복단대학은 다시 팀을 만들어 나간다. 왕후닝은 고문을 맡는다.

 

1993년, 왕후닝은 복단대학 국제정치학과 주임이 되고, 1994년, 복단대학 법학원 원장이 된다.

 

복단에 있을 때, 왕후닝은 당시 모든 정력을 학문에 쏟았다. 그는 1995년에 출판된 <정치적인생>에서 이렇게 자신을 형용한다: "정치적인생은 일종의 정치적 경력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한 명의 정치학을 하는 학자로서, 나의 대부분의 시간을 나의 전공학문을 했다는 것이고, 이 학문이 나의 절대부분의 생명을 점거했다는 것이다."

 

1994년말 출판된 <정치적인생>이 기록한 것은 비록 생활잡기이지만, 그 안에는 그의 국가, 정치체제개혁에 대한 견해가 담겨 있다.

 

왕후닝은 간략한 것을 좋아하고,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그는 격식을 채우는 번잡함이 귀찮아서 일본으로 가서 방문학자가 될 기회를 포기한다. 1월 12일의 일기에서 왕후닝은 한편의 글을 썼는데, "격식주의반대"라는 글이다. 일기에서는 한 가지 일을 언급했다: "지난번 고베대학에 방문학자로 가려고 했을 때, 반드시 초중은 어느 날 졸업했는지, 고중은 언제 졸업했는지, 어느 달인지, 어느 날인지 물었다. 정말 황당했다. 그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내가 방문학자가 되는 것과 무슨 관계인가? 마지막에 안가기로 결심했다. 그런 건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일기선에서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것은 새벽에 책을 읽는 것이다. 새벽에 영화같은 류, 오리지날판, 국외잡지등에도 모두 흥미를 가졌다. 대개 그가 대학에서 배운 것이 프랑스어이므로 프랑스의 <자연과학> <연구>등은 자주 읽는 잡지였다. 책중에 여러번 그가 드라마, 영화를 본 것을 언급하고, 극중의 구조를 분석하고 문예평론가의 견해가 있었다.

 

왕후닝은 무협소설을 보는 것도 좋아한다. 무협소설에 대하여 아주 높이 평가한다. <사조영웅전>을 읽고는 김용의 소설이 "사람에게 계발시키는 것은 그 교묘한 구상과 대담한 상상력이다. 비록 허구이지만, 이런 상상력은 과학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에 있어서, 가치가 있다. 어떻게 독특한 생각을 떠올릴 것인지, 원래 평범한 일을 특별하게 볼 것인지 이러한 재능이야말로 창조성이 있다. 어떤 대과학자는 학생을 훈련시킬 때, 먼저 그들에게 무협소설을 보라고 말한다."

 

1995년, 복단대학 법학원 원장을 맡고 있던 왕후닝은 보통의 중공당원 신분으로, 중앙정책연구실에 들어가 정치조 조장을 맡게 된다.

 

이번에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들어온 기연에 관하여, <현대영도> 2010년 제8기에서는 소식통의 말을 통하여, 일찌기 중공13대 전에, 왕후닝의 정치적 재능은 당과 국가지도자들의 눈에 띄었다고 한다. 특히 당시 중공중앙 판공청주임으로 있던 쩡칭홍(曾慶紅)의 인정을 받았다. 상해시위 서기를 지낸 우방궈(吳邦國)는 중앙으로 가기 전에 왕후닝을 정치고문으로 부를 생각을 했었다. 중앙에 들어간 후에도 그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여러번 당시 총서기인 장쩌민의 앞에서 말을 꺼낸다. 나중에 장쩌민이 왕후닝에게 농담으로 말했다: "만일 내가 베이징으로 오지 않았으면 이들은 나와 싸웠을 것이다."

 

 베이징으로 옮겨온 후, 왕후닝이 받은 첫번째 임무는 제14기 5중전회문건을 초안하는데 참가하는 것이었다. 보고서에서 계통적으로 "십이대관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즉 정확하게 개혁, 발전, 안정등 12개 방면의 관계를 처리하는 것이다. 십이대관계를 전회내용으로 결의의 형식으로 전달한 후, AP통신은 그날 평론을 발표하여, 새로운 결의는 제3대 지도자의 집단지혜를 보여줄 뿐아니라, 미래 중국의 강대한 희망을 나타냈다고 말한다.

 

1998년, 왕후닝은 중앙정책연구실 부주임이 되고, 이때부터, "국가주석특별조리"의 신분으로, 장짜민의 외국방문등 외사활동에 수행한다. 장쩌민시대에 가장 중요한 고위지낭이 된다.

 

왕후닝에 대하여 외부에서 가장 많이 얘기하는 최대공헌은 그가 "삼개대표" 중요사상의 초안자라는 것이다. 이에 관하여 중대한 이론공헌을 한다.

 

2002년 중공16대에서, 후진타오가 중공총서기에 당선된다. 장쩌민이 총서기에서 물러난다. 상하이에서 온 왕후닝은 이때 한 단계 더 오른다. 중앙정책연구실의 부주임에서 주임으로 올랐을 뿐아니라, 직접 중앙위원회에 들어간다. 중공권력의 최고위층에 진입한 것이다. 5년후인 17대에서, 왕후닝은 중앙서기처에 들어간다. 당시 중앙판공실 주임이던 링지화(令計劃), 후진타오 판공실 주임 천스쥐(陳世炬)와 함께 후진타오 신변의 "철삼각(鐵三角)"이라 불린다. 일상업무안배에서 지낭건의까지, 후진타오의 집정 10년이 정치적 업적을 위하여 많이 관여한다.

 

작년에 소집된 중공 18대에서 왕후닝은 204명의 권력대명단에서 25명의 의사결정 핵심권으로 승진한다. 중공정책연구실 주임이 정치국에 진입한 선례를 만든 것이다. 18대이후, 왕후닝은 신임 총서기 시진핑의 곁을 긴밀히 따라다니며, 새 중공고위층의 핵심 지낭이 된다.

 

이제 왕후닝은 3명의 총서기를 보좌한 신기록을 세우게 된다. 1995년 상하이에서 베이징으로 온 후, '특별조리', '중앙정책연구실주임'등의 신분으로 장쩌민, 후진타오를 보좌한 왕후닝은 이번에 다시 시진핑을 도운다. 그의 당내 정치적 지위도 보통당원(1995-2002), 중앙위원(2002-2012)에서 현재 정치국위원으로 승진했다. 분석가들은 연속하여 3명의 총서기를 보좌하며, 정치적 지위가 계속 올라갔다. 왕후닝의 정치적 역할을 더욱 중요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