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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문화/중국의 언어

두가지 유행: 어광(語狂)과 어장(語障)

by 중은우시 2013. 11. 24.

글: 유재복(劉再復) 

<아주주간> 2001년 12월 16일자

 

10년전, 필자는 <어광(語狂)>이라는 글을 써서 <명보월간>에 발표했다. 비판한 것은 문화대혁명 기간중의 "일만번 발로 밟아서 영원히 다시 되살아나지 못하게 하자"는 등의 큰소리(大話), 미친소리(狂話)들이었다. 작년 가오싱젠(高行健)이 노벨문학상을 탔을 때는(가오싱젠은 2000년 노벨문학상을 탔다), 또 어떤 사람이 나서서, "노벨문학상을 만번 파묻자"고 말했다. 그래서 "광어(狂語)"라는 단어가 다시 머리 속에 떠올랐다.

 

이전에 부사년(傅斯年) 선생의 <출입사문(出入史門)>을 읽었는데, 그가 1919년에 쓴 <수감록(隨感錄)>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제2칙에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을 떠나서 고립된 미치광이(狂人)를 제외하고, 세상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미치광이는 세 종류이다, 하나는 색광(色狂), 하나는 이광(利狂), 하나는 명광(名狂)이다." 그러나 그는 네번째 유형의 미치광이는 발견하지 못했다. 즉, 어광(語狂)이다. 아마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왜냐하면 5.4시대에 큰소리치는 사람은 많았지만 아직까지는 명확하게 '어광'이라고 부를 만한 경우가 나타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소위 '어광'은 주로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아과대,자아팽창의 망어자(妄語者, 헛소리를 하는 자)이다. 자신이 천하제일, 역사제일이라고 과장하는 것이다. "과거는 모조리 제로이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한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말이 극단적이다. 위언송청(危言慫聽, 일부러 위험한 말을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다)은 인생의 기본책략이다. 백년전 니체는 이렇게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 비록 미친 말이지만, 동심이 남아 있었다. 지금의 어린 니체들은 광조(狂躁)하면서 심기(心機)가 있다. 또 다른 '어광'은 언어폭력자이다. 필자는 <언어폭력을 논한다>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이런 사람은 자아팽창일 뿐아니라, 언어를 다른 사람에 대한 공격무기로 삼아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5.4시기에 비록 언어폭력의 맹아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아직은 기풍을 이룰 정도는 아니었다. 어광도 아직 집단이나 그룹을 형성할 정도가 아니었따. 문화대혁명에 이르러 비로소 진정한 어광시대가 열린다. 이 시대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미친 소리는 사람을 정말 상처입히고, 개념이 정말 사람을 죽인다, 납으로 인쇄된 글자는 정말 독이 있으며, 벽에 붓으로 쓴 글자도 독이 있다. 1960,70년대의 언어현상은 하나의 악몽과 같다. 우리에게 잊지못할 인상을 남겼다. 생각지도 못하게, 최근 몇년 다시 많은 망어자와 언어폭력자를 보게 되었다. 그들은 전목(錢穆)을 욕하고, 전종서(錢鍾書)를 욕하고, 파금(巴金)을 욕하고, 가오싱젠을 욕한다. 말을 하면서 오물을 뿌린다.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하여 '부관참시'도 서슴지 않는다.

 

부사년이 미치광이(광인)을 얘기하면서, 미치는 원인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기실 색광,이광,명광뿐아니라 어광도 그 배후는 모조리 욕망이 있다. 미칠 것같은 욕망이 미친 언어를 나오게 한다. 욕망은 사람을 팽창시킬 뿐아니라 사람에게 공격성과 침략성을 부여한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미친 소리의 배후에는 항상 불순한 동기가 있다. 노신은 "학계삼혼(學界三魂)"을 쓴 바 있다: 문단에는 민혼(民魂), 관혼(官魂), 비혼(匪魂)이 있는데, 오로지 민혼만이 고귀하다. 수십년이 지났지만 현재 문화계는 여전히 삼혼이 나란히 존재한다. 관혼을 가진 자는 틀에 박힌 말, 헛된 말, 쓸데없는 말을 잘 하고, 비혼을 가진 자는 미친 소리, 큰 소리, 더러운 소리, 깡패같은 말을 잘 한다. 오로지 민혼을 가진 자만이 진정한 말, 사실인 말을 한다. 색광, 이광, 명광, 어광은 표현방식이 다르지만, 그 안에는 마찬가지로 끝없이 탐욕스러운 욕망이 있다. 현재 중국의 양안삼지(兩岸三地, 대륙, 대만, 홍콩)에는 비혼이 아주 창궐하고 있다. 이들의 언어는 바로 비혼이 지탱하고 있다.

 

학계에 '어광'현상이 나타나는 외에 또 하나의 큰 현상이 있는데 그것은 "어장(語障)"이다. 소위 어장은 바로 개념장애이다. "주의"장애이다. 관념장애이다. 얼마전 필자는 글에서 '언어차폐(言語遮蔽)"문제를 비판한 바 있다. 우리 세대의 사람들은 일찌기 "주의"에 포위되어 길을 잃은 바 있고, '생명'과 '영혼'으로 대화한 것이 아니라, 개념으로 말한 적이 있다. 나중에 많은 힘을 들여서 비로소 '주의'와 각종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요 몇년간 다시 우리의 젊은 일부 학자들이 서방에서 유행하는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콜로니얼리즘등 큰 개념에 빠져서 주화입마하고 있다. 그들의 글은 비록 유행하는 말이 아주 많지만, 진짜 문제와 진짜 견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문학창작에서, 일부 학자들은 일부러 언어를 가지고 놀고, 재기를 팔아먹는다. 그 결과 오히려 진실감과 현실언어의 활기와 활성이 사라졌다. 여기까지 얘기하면 나는 다시 호적, 전목, 주광잠등 노선생들의 글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심지어 조수리(趙樹理)의 글이 그리워진다. 그들의 문자는 평실(平實)하고 여하한 개념으로 둘러싸이지도 않았다. '어장'이 없는 것이다.

 

쵝근 2,3년간 나는 계속하여 '반박귀진(返璞歸眞)'이라는 네 글자를 떠올리고 있다. 그 뜻은 지식인은 독서를 많이하면 할수록, 두뇌는 갈수록 복잡해지고, 생명의 본질 본연에서 갈수록 멀어지며, 언어와 지식에 가려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히려 세계의 근본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영아의 시각으로 되돌아가는 편이 낫다. 20세기에 언어학은 큰 발전을 이루었고, 언어는 '정신본체'의 고도로 강조되고 있다. '주의'는 지고무상의 '정대정신'의 지위로 강조되고있다. 그 결과, 오히려 가장 중요한 것이 가려졌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존엄과 '인간'의 활력이다. 언어,절대정신, 주의등이 사람의 생명보다 더 중요하게 되어 버렸다. 이것은 20세기의 근본적인 정신교훈이다. 이전에 우리가 받아들였던 "머리를 자르는 것은 중요하지 않고, 주의만 진실이면 된다"는 구호는 개인의 시정(詩情)으로는 확실히 숭고하다. 그러나 이성원칙으로서는 완전히 인간의 생명가치와 생명의 무게를 무시하고 있다. 주의가 많이 말을 할수록, 자유는 줄어들고, 개념이 아름다울수록, 생명은 오히려 빛을 잃게 된다.

 

이런 '어장'이 조상한 미로는 바로 가오싱젠의 <영혼의 산> 제58절에서 묘사되고 있다:

 

"네가 침중한 사고와 언어를 끌며 기어오를 때, 항상 하나의 실을 끄집어 내어 자신을 일으키고자 하며, 오를수록 피곤해지고, 언어의 실에 감겨버린다. 마치 실을 뽑는 누에처럼 자신이 자신의 고치를 만든다. 그리고 갈수록 짙은 암흑 속에 싸여버린다. 마음 속의 그 희미한 빛은 갈수록 어두워지고 결국 짓는 것은 한바탕 혼돈일 뿐이다."